우리나라 지방자치도 20년(1995년 완전 민선자치 개막 기준) 역사를 넘겼다. 최근 개헌 방식을 둘러싸고 여러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단순히 정부 형태의 교체에 그치는 것이 아닌, 지방자치·분권 시대를 여는 개헌이어야 한다는 주장들이 힘을 얻고 있다. 지방자치·분권에 대한 현황, 필요성, 외국 사례를 조망함으로써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수직적 권력집중 관계가 아닌, 수평적 권력분립 관계로 정립하여야 함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 칼럼은 5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다.
개헌 논의와 함께 지방분권에 대한 열망이 어느 때보다 뜨겁다. 일찌감치 레이스를 시작한 대선 주자들은 저마다 '지방분권'에 관한 공약을 내놓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 지방분권 문제는 화두가 될 모양새다. 실제 지방자치단체장들 상당수가 대선 출사표를 던졌다.
지방분권의 학술적 의미는 지방자치단체에 대하여 통치권의 일부로서 자치권을 부여하고 지방행정관청에 대하여 행정권한을 분산시키는 것이다.
쉽게 풀이해, 풀뿌리 민주주의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평범한 시민들이 자신이 사는 지역의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서 지역공동체의 운영과 생활의 변화에 참여하는 민주주의의 형태이다.
풀뿌리 민주주의는 우리의 전통과도 연관이 있다. 조선 후기에 생겨난 두레와 같은 공동 노동 조직, 계와 같은 자조 모임 등의 풍습을 가지고 있다.
이같은 풍습은 개인의 문제를 공동체 차원에서 서로 논의하고 협력하여 풀어나간 것으로, 오래전부터 우리 삶 속에서 풀뿌리 민주주의가 실천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과 암울한 현대 정치사를 거치면서, 우리 지방자치는 제대로 된 모양새를 갖추지 못한 채로 오랜 기간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어야 했다.
정치 제도의 의미에서 지방분권의 역사는 1949년 7월 제헌국회에서 지방자치법을 제정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서울특별시장과 도지사는 대통령이 임명하되, 시‧읍‧면장은 지방의회에서 선출하도록 했다. 하지만, 5.16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 독재가 장기화되면서 사실상 지방 분권은 암흑기를 맞았다.
이후 노태우 정부의 1990년 12월 31일 지방자치법 8차 개정, 1991년 지방의회 부활, 김영삼 정부의 1995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실시 등으로 지방자치는 부활의 날개를 펴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지방분권의 현실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정치적으로는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지방의회 의원들은 모두 중앙당의 공천을 받아야 정계에 진출할 수 있다.
지난 2014년 지방선거 당시, 민주당은 기초단체장과 의원 정당공천 폐지를 단행했지만, 결국 선거 패배를 우려한 반대에 밀려 '회군'을 하고 말았던 사례가 있다. 중앙 정치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이 그대로 드러난 셈이었다.
또 자치단체는 조례를 제정할 수 있으나, 법령의 범위 안에서 조례제정권을 허용함으로써, 지역실정에 부합하는 개별적이고 창의적인 조례를 만들 수 없는 구조를 갖고 있다.
경제도 마찬가지이다. 서울, 인천, 경기도는 전 국토의 11%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구의 50%, 경제 자금의 80%, 대기업의 90%가 몰려 있다. 지자체가 중앙 정부의 '교부금'만 바라봐야 하는 현실에서, 재정 자립은 언감생심이다. 이를 통해 중앙정부는 지자체를 길들이려 한다는 의혹도 안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자체의 재정권을 틀어쥐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중앙 정부의 영향력 유지를 위해서다.
세금의 80%를 중앙정부가 쥐고 있는 바람에 지방자치단체는 재정난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실정이다. 한마디로 중앙정부는 돈과 권력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나 마찬가지다. 강원도와 같이 지방재정이 취약한 지방자치단체는 중앙정부에 대한 의존을 심화시켜 나간다.
지자체는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정책의 최종 집행자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 지자체의 역할이다. 또 지방 의회의 역할이다. 그런데 정부는 정책 집행을 지자체에 떠넘긴 채, 예산권만 쥐려 하고 있다. ‘분권’을 거부하니 ‘자치’가 제대로 이뤄질 리가 없다. 중앙 정부의 비대화는 곧바로 국정 운영의 비효율성으로 나타나게 된다. 중앙 집권적 권력 체제의 폐해를, 우리는 ‘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상황이다.
만약 지방 분권이 제대로 이뤄졌다면 최순실 같은 사람의 ‘국정 농단’이 가능했을까? 올림픽을 준비하는 평창이 ‘최순실 아방궁’이라는 불명예 스러운 이름에 오염될 수 있었을까?
지방자치단체가 중앙정부의 돈과 권력이라는 햇볕을 조금이라도 쬐기 위해 일찌감치 불합리한 정책에 순응하게 되고, 지방자치는 더욱 약화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지방분권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그 점에서는 어떤 이유에서든 지방분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다만, 개헌과 맞물려 논의되고 사안이 단순히 중앙 정부 형태 논의에 집중되고 있는 것은 우려스럽다. 중앙정부 권력구조의 개편만으로는 절반의 분권에 불과하다.
정세균 국회의장은 최근 광주를 방문해 지방분권과 관련해서 “개헌에는 제왕적 대통령 중심제를 바꾸는 권력구조 개편뿐 아니라 지방분권도 함께 담겨야 한다”고 밝혔다.
단순히 대통령제와 내각책임제중 하나를 선택하는 정부형태 중심이 아니라, 입법, 사법, 행정, 재정 등 총체적인 분권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정 의장의 발언은 환영할 만하다.
그동안 수차례의 개헌 논의에서는 지방자치라는 소외돼 왔다. ‘염불’보다는 권력구조 개편이라는 ‘잿밥’에 더 큰 관심이 있었기에, 지방 자치는 조금도 나아지지 못했다. 지방 자치, 지방 분권은 경험해 볼수록 매력적이다. 지난 20년간 지방 자치는 국민의 삶 속에 깊숙히 파고들었다. 이 물결을 되돌릴 수는 없다. 유권자 열 명을 잡고 묻더라도 대답은 한결 같을 것이다. “지방 자치 덕분에 우리 삶이 나아졌다”
지자체의 역할은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이다. 현장에서 국민을 만나고, 그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주체는 국민이 되어야 하는 게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에 충시한 것 아닌가. 앞으로 진행될 개헌 논의에서는 ‘염불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많은 일은 없기를 바랄 뿐이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경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국가 및 중앙 집권식으로는 다양화·세분화되는 국제정세에서 경쟁력을 갖기는 어렵다.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이 중요하다. 가장 지역적인 것(local)이 가장 세계적인 것(global)이다. 전 세계에서 경쟁력이 있는 국가는 대부분 지방 정부의 저력을 바탕으로 한다. 선진국이 ‘연방제’를 채택하고, 일본의 지방 자치가 고도로 발달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지방 거점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이것이 국가경쟁력의 강화로 연결될 수 있도록 변화는 절실하다.
무엇보다, 지역주민들이 지역공동체의 삶과 일터를 스스로 가꾸어 나갈 수 있다면 행복한 일이 아닌가? 주민의, 주민에 의한, 주민을 위한 지방자치단체가 만들어 갈 풀뿌리 민주주의의 새로운 전환점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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