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40강은 서해를 통해 한양으로 들어오는 한강의 입수구(入首口)이고 중국과 조선의 사신들이 왕래하였던 의주로(義州路)의 길목이며, 한양도성에서 가까이 있어 왕릉이 많이 조성된 고양을 찾아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40강은 2017년 2월 26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30분 서울을 출발합니다.(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7시 2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서울 강북에서 한 번 더 정차합니다. 오전 7시 45분 서울지하철 2호선, 6호선 합정역 8번출구 홀트아동복지회관앞에서 탑승하실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행주산성(충장사/행주대첩비/토성)-강매동석교-공양왕릉-연산군금표비-최영장군묘-고양향교-벽제관지-서삼릉(희릉/예릉/의령원/효창원/소경원/효릉/회묘)-점심식사 겸 뒤풀이-흥국사-서오릉(명릉/수경원/익릉/순창원/경릉/대빈묘/홍릉/창릉)-이석탄장대비-서울의 순입니다.
고양고을의 산 북한산
백두대간의 분수치에서 갈라져 나온 한북정맥(漢北正脈)이 북한산에 이르러 영봉을 지나 노고산에서 치솟아 너른 고양 들판에 작은 봉우리들을 펼쳐놓고 교하의 장명산에서 서해로 숨어드는데, 고양의 산줄기는 한북정맥이 서해로 숨어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부려놓은 산줄깁니다.
북한산(北漢山)은 면적의 약 92%가 고양에 위치해 있습니다. 최고봉인 백운대를 비롯한 인수봉, 만경봉의 세 봉우리를 일러 삼각산(三角山)이라 하며, 삼국시대 초기에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이곳에 북한산성을 축조하였고 그 후 이곳에서 신라와 고구려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으며, 고려, 조선시대에는 수도인 개성과 한양의 방어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이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개명산(開明山 565m)은 고령산(高嶺山, 高靈山)으로도 불리는데 북한산 다음으로 높은 고양의 대표적인 명산입니다. 파주, 양주와 경계하는 고양의 최북단에 있고 해발 400m 이상의 높은 봉우리가 이어져 있으며 동북쪽으로 파주로 넘어가는 퇴패고개가 지나고 남쪽으로는 목암고개가 지나갑니다.
노고산(老姑山 487m)은 고양의 동쪽에 자리한 산으로 북한산과 마주보고 있으며, 달리 한미산(漢美山)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동남쪽에 천년고찰 흥국사를 품고 있으며 양주와 고양의 경계를 이루는 산입니다.
덕양산(德陽山 125m)은 남서쪽으로 한강이 흐르며 이곳에 행주산성이 있습니다. 성산(城山)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삼국시대에 백제를 중심으로 한 전쟁터로 유명하며 조선시대에도 권율 도원수가 이끄는 조선군과 왜군이 전투를 벌인 행주대첩으로 유명한 산입니다.
망월산(望月山 179.4m)은 산 위에서 큰 달을 바라볼 수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서오릉의 안산 역할을 하는 명산입니다. 화전 사람들이 예전부터 산신제를 지내는 등 신령한 산으로 여기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대덕산, 남쪽으로는 봉산, 북쪽으로 고봉산이 있습니다.
견달산(甄達山 138.7m)은 고봉산의 동쪽 약 4km 지점에 자리하고 있으며 중국의 황제가 세숫대야에 비춰져 그 기운이 중국에까지 도달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달리 본달, 번달, 현달로도 부릅니다. 산봉우리가 중국을 향하고 있어 일명 역적산(逆賊山)이라고도 하는데 이곳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고 합니다.
황룡산(黃龍山 129.7m)은 누런 용이 산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정상에서 멀리 북한 땅도 볼 수 있는 고양의 서북단에 있으며 고양시와 파주시를 경계 짓고 산 아래에 성석동 감내마을에는 용강서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정발산(鼎鉢山 87m)은 낮은 높이에도 불구하고 일산신시가지 중에서 가장 높은 일산의 주산입니다. 정상에서는 일산신시가지 및 호수공원이 한눈에 바라다 보이며 정상에는 전통적인 기법으로 지어진 평심루가 있으며 예부터 산 정상에서는 3년에 한번씩 도당굿이 열립니다.
한강으로 흘러드는 공릉천과 창릉천
고양의 큰 물줄기는 북쪽에 있는 북한산, 노고산, 개명산의 연봉에서 발원하여 한강으로 흘러드는 공릉천과 창릉천이 있습니다.
공릉천(恭陵川)은 챌봉(521m) 남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선유동에서 발원하는 선유천(仙遊川), 오금동에서 발원하는 오금천(梧琴川), 벽제동에서 발원하는 벽제천(碧蹄川), 대자동에서 발원하는 대자천(大慈川), 원당동에서 발원하는 원당천(元堂川), 지영동(芝英洞)에서 발원하는 장진천(長津川) 등의 지류를 받아 안고 파주 교하(交河)에서 한강(漢江)과 만납니다.
공릉천은 달리 가둔천(佳鈍川)이라 부르며, 중류 지역인 고양시 부근에서는 심천(深川),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부근에서는 봉일천(奉日川), 금촌동(金村洞) 남쪽에서는 금성진, 하류의 교하동(交河洞) 부근에서는 방천(防川), 오금천 합류 지점부터 대자천 합류 지점 사이는 신원천(新院川)이라고도 하였습니다.
공릉천의 명칭은 조선 예종의 원비 능인 '공릉(恭陵)'에서 유래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구부러진 하천의 모양을 보고 곡릉천(曲陵川)으로 바꿔 불렀다가 2009년 1월 1일부터 원래의 명칭인 공릉천(恭陵川)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창릉천(昌陵川)은 북한산에서 발원하여 신도, 원당, 화전, 지도 지역을 지나며 북한동에서 발원한 북한천(北漢川), 용두동에서 발원한 순창천(順昌川), 강매동에서 발원한 성사천(星沙川)을 받아 안고 현천동에서 한강(漢江)으로 유입되는 하천입니다. 전 유역이 그린벨트 지역이라 수질이 양호하고 자연하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원래는 덕수천(德壽川)이었으나, 서오릉 안에 있는 예종의 능인 창릉의 이름을 따서 창릉천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데, 삼국 중 고양 일대를 제일 먼저 차지한 백제는 온조(溫祚)가 북한산에 올라 지세를 살피고 도읍을 정했다고 전해집니다. 북한산 고성(古城)과 그 주변 지역에서 백제의 토기 조각들이 발견되었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132년(개루왕 5)에 북한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구려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때 이곳을 차지하여 달을성현(達乙省縣)과 개백현(皆伯縣)을 두었고 달을성현은 고봉현(高峰縣)으로, 개백현은 행주(幸州)로 고쳐졌습니다. 고봉은 지금의 일산동, 서구 지역의 옛 이름이며, 행주는 지금의 덕양구 지역 이름인데 이때 성저마을 앞 벌판에 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있으며 고봉산에 남아 있는 토성(土城)도 고구려의 성으로 여겨집니다.
신라는 진흥왕 때 한강 유역을 차지하게 되는데 북한산의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에 이 시기의 역사적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 후에도 603년(진평왕 25) 고구려의 장군 고승(高勝)이 수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한산성을 포위, 공격했는데 이때 진평왕(眞平王)은 친히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한강을 건너 고구려군을 물리쳤습니다. 661년(문무왕 원년) 고구려, 말갈 연합군이 북한산성을 포위하고 20여 일간 치열한 전투를 치룬 뒤에 비로소 신라의 땅이 된 고양 지역에 북한산주(北漢山州)를 두었습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전국을 9주(州) 5소경(小京)으로 행정구역으로 나누었는데 고양 지역은 한산주(漢山州)에 속했습니다. 고양 지역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흔적은 행주산성으로 성 부근에서 통일신라시대의 토기와 기와 조각들이 출토되었으며 지축동에 있는 흥국사(興國寺)는 원효(元曉)가 처음 세운 1,000여 년이 넘은 고찰입니다.
고려시대에 고양은 양주(楊州)와 함께 남경(南京)에 속했다가 한양부의 속현이 되었고 고려의 도읍인 개성과 가까운 지리적 조건으로 당시의 역사적 유물이 많이 남아 있는데, 고려청자를 만들던 가마터와 공양왕릉, 최영 장군의 묘를 비롯한 고려시대의 무덤이 남아 있습니다.
고려 개성과 조선 한양의 연결로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가 도성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자 이때부터 고양은 새로운 수도 한양과 옛 도성인 개성을 연결하는 위치에 있고 또한 중국으로 오가는 사신들이 다니는 의주로가 고양을 지나게 되어 도로가 새롭게 만들어지고 사람의 왕래가 많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1413년(태종 13) 고봉(高峰)과 덕양(德陽)의 이름을 합쳐 ‘고양현(高陽縣)’이라 하고 현감을 두었는데 이때 비로소 고양이란 이름이 생겼습니다. 1471년(성종 2) 세조의 아들들인 예종의 창릉과 덕종의 경릉이 있는 곳이라 하여 현(縣)에서 군(郡)으로 승격되었고 그 후 고양지역에는 왕족이나 양반들의 무덤이 많아졌고 이들을 유지하기 위한 사패지(賜牌地)도 늘어났습니다.
연산군은 고양 지역을 왕의 사냥터로 만들어 일반 백성은 출입할 수 없는 ‘금표구역(禁標區域)’으로 정하여 고양의 능과 묘는 모두 잡초가 우거졌고 관청과 주민들은 인근의 파주나 양주로 옮겨졌습니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금표구역이 풀렸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몽진(蒙塵)하자 도읍인 한양과 가깝고 평양과 의주를 오가는 길목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대자동에 있던 관아건물이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잠시 한성부(漢城府)에 속해 있다가 이후 경기도에 속하게 되었고 1906년 양주군의 신혈면이 고양 지역에 새롭게 들어와 8개면에서 9개면이 되었으며 1900년대 초반 경의선(京義線) 철도가 고양 지역을 지나게 되어 새로운 문물이 밀려들었는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일산장도 이때 생긴 것입니다.
벽제관(碧蹄館)은 조선시대 한양으로 통하는 6대로(六大路) 중 의주로(義州路)에 위치했던 객관(客館)입니다. 원래는 현재의 벽제관지에서 서쪽으로 3km 가량 떨어진 웃고골(고읍)에 처음 세워졌지만, 임진왜란으로 훼손되어, 1625년(인조3)에 고양향교와 함께 지금의 자리로 이전된 이후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어 그 터만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벽제관은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중국에서 조선으로 오는 중국 사신이 한양으로 임금을 뵙기 전에 예를 갖추던 곳이며, 반대로 조선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사신들이 긴 여정을 준비하는 외교적 통로로 사용되었습니다.
고양향교(高陽鄕校)는 1428년 지금의 서삼릉(西三陵) 자리에 향교가 새로 설립된 것으로 알려져 왔는데, 1537년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의 장지가 서삼릉으로 정해지자 향교는 대자동의 고읍마을로 옮겼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25년에 현재의 위치에 재건되었습니다.
건축물은 내삼문(內三門)을 기준으로 전면에 명륜당(明倫堂)과 동재(東齋), 서재(西齋)가 있고, 후면에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廡), 서무(西廡), 전사청(典祀廳)이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양식이며,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5성(五聖)을 동무, 서무에는 ‘송조 2현(宋朝二賢)’으로 불리는 정자(程子), 주자(朱子)와 우리나라의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강매동 석교(江梅洞 石橋)는 강매동 창릉천 위에 놓여 있으며 고양의 일산, 지도, 송포 등 한강 연안의 서부지역 사람들이 서울을 오갈 때 이용된 다리로, 이곳을 통해 각종 농산물, 땔감 등을 현천동, 수색, 모래내를 거쳐 서울 염촌교에 내다 팔았습니다.
다리의 구조는 네모진 돌기둥 18개로 교각을 만들고 그 위에 판석을 깐 모양이며 다리의 전체적인 모양은 약간의 곡선을 이루며 총길이 18m, 넓이 3.6m, 높이 2.7m로 이중 남쪽 끝 3m 정도는 시멘트로 보수한 상태이나 나머지 부분은 아직도 견고하게 남아 있습니다.
1755년 영조 연간에 발간된 <고양군지(高陽郡誌)>에는 해포교(醢浦橋)라 기록하고 있는데, 이때는 석교가 아닌 목교(木橋)였으며, 자금의 석교 중간 부분에는 ‘강매리교 경신신조(江梅里橋庚申新造)’라 음각되어 있는데 경신년은 1920년으로 이때 새로 다리를 신축한 것으로 보입니다.
뛰어난 요새 행주산성
행주산성(幸州山城)은 덕양산(德陽山 124.8m)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축조된 포곡식 토축산성(土築山城)입니다. 전체 둘레는 1km 정도 되는데 남쪽은 한강에 연하여 있고, 동남쪽으로는 창릉천이 덕양산을 돌아 한강으로 유입되어 자연스럽게 해자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산성의 동남쪽과 남쪽 일대는 경사가 매우 급하여 요새로서의 지형을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행주산성은 선조 16년(1593) 권율(權慄) 장군의 전적지로서 한산도대첩, 진주성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으로 유명합니다.
만취당(晩翠堂) 권율은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전적(典籍), 전라도도사, 예조정랑, 호조정랑, 의주목사를 지낸 뒤 임진왜란 때 전라도순찰사, 충청도순찰사, 도원수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시호는 충장(忠莊)입니다.
문봉서원(文峰書院)은 1688년(숙종 14)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고양팔현(高揚八賢)이라 부르는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 복재(服齋) 기준(奇遵),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 행촌(杏村) 민순(閔純),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 석탄(石灘) 이신의(李愼儀), 만회(晩悔) 이유겸(李有謙)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습니다. 1709년(숙종 35)에 ‘文峯(문봉)’이라고 사액되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0년(고종 7)에 훼철되어 아직도 복원하지 못한 채 그 터에 몇 기의 주춧돌과 대석만 남아 있습니다.
석탄(石灘) 이신의(李愼儀) 장대비(蔣臺碑)는 석탄이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군과 접전을 벌인 장소임을 알리는 비석으로 비의 앞면에는 ’이석탄 장대(李石灘 蔣臺)’, 뒷면에는 “선생이 임진년에 의병을 일으켜서 장대를 설단한 후 149년이 되는 경신년에 마을 사람들이 세우다.(先生壬辰起義兵設臺後百四十九年庚申洞人立)”라고 쓰여 있습니다.
석탄(石灘) 이신의(李愼儀)는 1551년 정3품 형조참의를 지낸 이원손과 전주이씨 부인 ‘정종대왕 현손녀’ 사이의 둘째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고양고을에 근거를 두고 생활했던 학자이자 무인(武人)으로, 일찍이 현천동(玄川洞)에 거주하던 행촌(杏村) 민순(閔純)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문봉서원(文峰書院)에 제향된 고양팔현(高陽八賢)의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1582년(선조 15) 학행(學行)으로 천거 받아 예빈시 봉사(禮賓寺奉事)가 되고 1584년 참봉과 종묘서봉사(宗廟署奉事)를 지냈고 임진왜란 때 적과 싸워 공을 세우고 사옹원 직장(司饔院直長)이 되었으며 공조좌랑, 고부군수(古阜郡守), 임천군수(林川郡守), 남원부사(南原府使), 홍주(洪州), 해주(海州)의 목사(牧使)를 지냈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석탄이 의병 300여 명과 군자금을 모집, 도라산에 진을 치고 부대를 편성한 후 ‘이신의창의대(李愼儀倡義隊)’라 명명하고 왜병들에게서 탈취한 신무기로 무력을 강화하여 왜병의 측방, 후방의 외곽을 협공하는 작전으로 수많은 왜적을 쳐부수고 승리하였으며 그 후 전란이 소강상태에 들어간 1593년 5월 창의대를 해산하였습니다.
광해군(光海君) 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하려는데 대해 항소를 올렸다가 회령(會寧)에 유배되었는데,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1627년(인조 5) 형조참의,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같은 해 정묘호란으로 왕을 호종하여 강화로 가던 도중 병사했습니다.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문정(文貞)이란 시호가 내려졌으며 문집으로 <석탄집(石灘集)>을 남겼습니다.
특히 석탄은 회령 유배지에서 그곳 병사 이수일에게 거문고를 청하였고 그도 죄인에게 가야금을 주는 일이 간당들에게 지탄받을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문고를 구해 주었다고 하는데, 거문고를 얻은 선생은 ‘송죽매국(松竹梅菊)’의 <사우가(四友歌)>를 지어 거문고로 곡을 부쳐 외로움을 달랬다고 합니다.
<사우가>는 1642년에 발표한 고산 윤선도(尹善道)의 <오우가(五友歌)>보다 24년이나 앞선 것으로 <석탄집>에 수록되어 있으며 문학적으로 <오우가>에 못지않게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바회예 셧는 솔이 늠연(凜然)한 것이 반가온뎌.
풍상(風霜)을 겪어도 여위는 줄 전혀 없다.
엇지타 봄빛을 가져 고칠 줄 모르느냐.
동리(東籬)의 심은 국화(菊花) 귀(귀)한 줄 뉘 아느냐.
춘광(춘광)을 번폐하고 엄상(엄상)에 혼자 퓌니
어즈버 청고(淸高)한 내 벗이 다만 녠가 하노라.
꽃이 무한(無限)하되 매화(梅花)를 심근 뜻은
눈 속에 꽃이 퓌여 한 빛인 것이 귀(貴)하도다.
하물며 그윽한 향기(香氣)는 아니 귀(貴)코 어이리.
백설(白雪)이 잦은 날에 대를 보려 창(창)을 여니
온갖 꽃 간데 없고 대숲이 푸르러셰라.
엇디한 청풍(淸風)을 반겨 흔덕흔덕 하느냐.
고양에는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릉(恭讓王陵)과 고려 최후의 충신인 최영(崔瑩) 장군의 묘가 있습니다.
공양왕릉은 1394년(태조3) 축조된 고려의 마지막 공양왕과 순비 노씨의 쌍릉으로 주위에 배치된 석물들은 그 양식과 수법이 간략하고 소박하여 고려 왕릉의 전통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비석은 처음부터 세워져 있었지만, ‘고려공양왕고릉(高麗恭讓王高陵)’이라는 글씨가 있는 묘표석(墓表石)은 조선 고종 때 세운 것입니다.
공양왕릉은 그의 유배지이자 사사지(賜死地)였던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에도 있는데, 고양의 공양왕릉은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나, 삼척공양왕릉(三陟恭讓王陵)은 민간에 오랫동안 구전되어 왔습니다.
최영장군묘(崔瑩將軍墓)는 대자산 기슭에 있는 부인 문화 유씨(文化 柳氏)와 합장한 2단 둘레석을 두른 방형묘(方形墓)로서 묘 주위에 곡장을 둘렀습니다.
최영의 본관이 철원(鐵原), 시호(諡號)는 무민공(武愍公)으로, 1316년(충숙왕 3)에 동주(東州 지금의 철원)에서 출생하여 젊은 시절부터 북쪽의 홍건적과 왜구를 토벌하였으며, 1354년에는 중국 산동지방의 장사성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어 그 이름을 중국에까지 널리 알리게 되었고 또한 원나라의 압록강 서쪽 지역을 수복, 점령하여 고려의 영토를 넓히기도 하였습니다.
이외에도 최유 등 고려 내부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큰 공을 세우게 되는데 그때마다 상을 내리면 모두 나라에 되돌리는 충직한 장군으로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한' 청렴한 인물로 전합니다. 명나라와 철령위 문제가 생기자 이성계 등으로 하여금 요동을 정벌하도록 하였으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고양에 유배되었다가 개경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왕릉 대거 모이다
고양은 조선시대에 도읍인 한양으로부터 100리 거리인 교(郊)에 해당하는 지역이라서 왕릉(王陵)이 많이 들어섰는데 서삼릉과 서오릉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서삼릉(西三陵)은 원래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능인 희릉지(禧陵址)로 택하여진 곳으로, 한 때는 중종의 정릉(靖陵)이 여기에 있었으며, 그의 아들인 인종과 비 인성왕후(仁聖王后)의 효릉(孝陵)도 이곳에 있어 중종과 인종의 2대의 능지(陵址)로 사용되다가 정릉은 성종의 능인 서울 강남 선릉 옆으로 옮겨갔고 철종(哲宗)과 비 철인왕후(哲仁王后)의 예릉(睿陵)이 들어서면서 ‘서삼릉’이라 불렀습니다.
서삼릉엔 그밖에 인조(仁祖)의 장자인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소경원(昭慶園), 북아현동에서 옮겨온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장자 의소세손(懿昭世孫)의 의령원懿寧園), 청파동 효창공원에서 옮겨온 정조(正祖)의 장자 문효세자(文孝世子)의 효창원(孝昌園) 등 세자의 원(園) 3기와 폐비 윤씨의 회묘(懷墓)를 비롯해 조선 역대의 후궁(後宮), 대군(大君), 군(君), 공주(公主), 옹주(翁主)의 묘 45기가 있습니다.
희릉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단릉으로 원래는 헌릉(獻陵)에 있었으나 22년 뒤 김안로의 술책으로 지금의 자리로 이장했습니다. 장경왕후는 영돈녕부사 윤여필의 딸로 8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에 의하여 양육되었는데 중종반정으로 단경왕후 신씨가 폐위되자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1515년 인종을 낳고 산후병을 얻어 7일 만에 사망하였습니다.
효릉은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의 쌍릉으로 인종은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인 장경왕후가 죽자 대왕대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성종의 계비)를 더욱 섬겼으며, 아버지인 중종이 위독하자 반드시 먼저 약의 맛을 보았다고 하며 중종이 죽자 8개월 만에 승하하였는데 부모의 곁에 묻어줄 것과 장사를 소박하게 해달라고 하였는데 그 때문인지 그의 능은 원래 병풍석이 없다가 인성왕후가 승하한 후 인종 곁에 묻히면서 지금과 같은 병풍석을 둘렀다고 합니다.
예릉은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의 쌍릉으로 조선왕조의 상설제도를 따른 마지막 능이며 ‘강화도령’으로 널리 알려진 철종은 강화도에 살던 중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힘든 궁궐 생활을 이어가다가 재위 14년 만에 후사 없이 죽습니다.
서오릉(西五陵)은 추존왕 덕종과 소혜왕후(昭惠王后)의 경릉(敬陵),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安順王后)의 창릉(昌陵), 숙종의 원비인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익릉(翼陵), 숙종과 인현왕후(仁顯王后), 인원왕후(仁元王后)의 명릉(明陵), 정성왕후(貞聖王后)의 홍릉(弘陵)을 일컫는 명칭으로, 원래 1457년(세조 3) 원자(元子)였던 장(暲)이 죽자 풍수지리설에 따라 세조가 직접 답사하여 경릉 터로 정하여 서오릉의 조성이 시작되었습니다.
서오릉에는 이밖에 조선왕조 최초의 ‘원(園)’인 명종(明宗)의 장자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순창원(順昌園),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의 수경원(綏慶園)과 숙종(肅宗)의 후궁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희빈 장씨의 대빈묘(大嬪墓)가 있습니다.
경릉은 동원이강식(同原二岡式)의 쌍릉(雙陵)으로 일반적인 쌍릉 배치와는 달리 왕은 오른쪽, 왕비는 왼쪽에 조성되어 있으며 왕비의 능이 왕의 능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화려하여 왕과 왕비의 능을 혼동하게 할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그 이유는 덕종은 사망 당시 대군(大君)이었고 더구나 세조가 능제(陵制) 간소화정책을 추진하던 때여서 덕종릉은 난간석, 망주석이 없지만 소혜왕후릉은 남편이 덕종으로 추존된 뒤 조성되었으므로 왕릉의 예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덕종은 세조의 장자로 용모가 준수하고 예의가 있어 세종과 소헌왕후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으나 몸이 약하여 20세 나이로 죽고 덕종의 차남이 성종으로 즉위하여 ‘덕종’으로 추존되었습니다. 소혜왕후는 세조1년에 세자빈에 간택되어 월산대군과 성종을 낳았으나 세조3년에 덕종이 죽자 홀로 47년간을 대비로 살면서 아녀자가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한 <여훈(女訓)>을 찬하였으며 연산군이 생모 윤씨가 폐위, 사사되었다고 관련자들을 처단할 때 그를 나무라자 연산군이 머리로 받아서 일어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창릉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라 조성했는데, 고석에 고리 모양을 세기고 팔각장명등의 지붕돌 상륜부에 있는 연잎 등 개성 있는 조각미가 돋보이는 합장릉입니다.
예종은 덕종의 동생으로 형이 죽은 뒤 세자가 되어 왕위를 물려받았는데 즉위한 뒤 14개월 만에 사망하였으며, 안순왕후는 청원부원군 한백륜의 딸로서 1460년 세자빈으로 책봉된 장순왕후 한씨(한명회의 딸)가 병사하자 2년 뒤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는데 남편이 죽은 뒤 29년을 더 살았습니다.
익릉은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의 능으로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하여 홍살문에서 시작되는 참도(參道)가 큰 계단식으로 되어 있으며, 숙종의 능제간소화정책(陵制簡素化政策)이 내려지기 전 무덤이면서 임진왜란 이후의 변형된 양식으로 장대한 석물과 팔각장명등은 그 특징을 잘 반영한 것입니다.
인경왕후는 20세에 천연두에 걸려 발병 8일 만에 사망하였으며 세 딸을 두었으나, 두 딸은 그녀보다 먼저 사망하였고, 마지막 남은 딸도 곧 사망하였습니다.
명릉은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둘째 계비 인원왕후의 능으로 원래 인원왕후는 명릉에서 400여 보 떨어진 언덕에 자신의 자리를 잡아두었는데 영조가 현재의 위치에 능을 썼다고 합니다.
숙종은 14세에 즉위하여 45년간 집권하였는데 그때는 당쟁이 가장 심했던 시기입니다. 남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의 붕당과 정쟁이 심화되어 나라가 파탄에 이를 지경이었지만 숙종은 대동법의 실시, 상평통보 주조를 통한 상업 활동의 지원 등, 많은 치적을 남겼으며 1711년 북한산성을 크게 보수하였고 북한산성 행궁도 조성하였습니다.
인현왕후는 인경왕후의 뒤를 이은 숙종의 두 번째 부인으로 후사가 없는 죄로 희빈 장씨에게 왕비자리를 빼앗겼다가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복귀되었지만 건강악화로 7년 만에 사망하였는데, 희빈 장씨의 저주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부친은 경은부원군 김주신으로 그의 묘와 신도비는 대자동에 있습니다.
홍릉은 정성왕후 서씨의 능으로, 영조는 그녀를 무척 좋아했는데 생전에 옆자리에 누울 예정으로 자신이 안치될 정혈에 십자를 새긴 돌을 묻어두었으나 손자인 정조는 구리시의 동구릉에 있는 원릉에 할아버지를 묻어서 정성왕후 서씨의 오른편은 끝내 비어있게 되었습니다.
순창원은 명종의 장자인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원으로 순회세자 명종의 장자로 태어나 1557년(명종 12) 7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13세에 요절하였고 공회빈 윤씨(?~1592)는 윤옥의 딸로 1559년에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순회세자가 요절하자 30년을 홀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수경원은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의 원으로 원래는 연세대학교 내에 있었으나 1968년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였으며 1899년(고종 36)에 정자각과 비각을 새로 신축하고 비석도 새로 세웠는데 정자각과 비각은 연세대학교 내에 그대로 남아 있어 비각과 비석이 서로 떨어져 있습니다.
대빈묘는 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의 묘로 원래는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문형리에 있었으나 1970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습니다. 희빈 장씨는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궁녀의 신분으로 왕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후미진 위치와 전체적인 꾸밈새, 석물 등이 일반 사대부의 묘보다도 초라한 것을 보면 희빈 장씨에 대한 후대 역사가들의 평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흥국사(興國寺)는 노고산 남동쪽 기슭에 있는 사찰로 661년(문무왕 1) 원효(元曉)가 창건하여 흥서사(興瑞寺)라 하였는데 원효가 북한산(北漢山)의 원효대(元曉臺)에서 수행을 하던 어느 날, 서쪽 산기슭에서 3일 동안 서기(瑞氣)가 일어 찾아가보니, 현 약사전 자리에서 약사여래좌상이 솟아나 방광하고 있었으므로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1686년(숙종 12)에 중창하였고1770년(영조 46) 영조가 자신의 생모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묘소인 소령원(昭寧園)에 행차하는 길에 이곳에 들러 절 이름을 흥국사로 바꾸게 하고 직접 약사전의 편액 글씨를 써서 하사하였으며 이후 망모(亡母)의 원찰(願刹)로 삼고 약사전을 증축하고 미타전을 신축하였으며, 상궁(尙宮)들이 번갈아 머무르면서 선학(禪學)을 익히도록 허락하였다고 합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따뜻한 차림, 보온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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