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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로 내려오길 잘한 것 같다"

[귀농통문] 우당탕탕 순창 적응기

그래, 같은 고생이라면 차라리 순창에서 하자

"그래, 도시에서 고생하면서 몸 다 버리느니,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시골 가서 네가 하고 싶은 거 해봐도 괜찮겠다."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기자생활을 한 지 1년 반쯤 됐을 때, 나의 귀농을 완강하게 반대하던 엄마 입에서 나온 말이다. 그 전까지는 힘들어도 조금만 더 버티라는 위로를 해줬는데 어느 순간 딸의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암묵적인 동의로 마음을 돌리셨다. 귀농에 대한 갈망은 있지만 스스로도 농사짓고 살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고,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투쟁하듯 내려갈 결심은 더더욱 서지 않던 처지에서 엄마의 이 한마디는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결국 지난 3월, 서울 생활을 과감히 접고 순창으로 내려갔다. 아직 귀농할 깜냥은 못돼서 이곳에서도 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이번엔 무려 팀장이다. 지난 직장과 견주면 엄청난 고속 승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팀원이 없다. 직급 수당도 물론 없다. 바로 귀농운동본부에서 운영하는 순창군 귀농귀촌지원센터(이하 순창귀농센터로 줄임)의 교육 팀장 자리다. 순창귀농센터에는 일하는 사람이 셋인데 모두 소장, 사무국장, 교육팀장이라는 멋진 직급이 있다. 어깨에 힘은 들어가는데 실속은 그다지 없다. 서울에서 하던 고생, 순창에서 하는 고생으로 바뀐 정도다. 그래도 활동가 신분이 내게는 더 편하다. 도시에서의 삶은 경제적으로 윤택해도 늘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는데 이곳에서의 삶은 바쁘고 정신없어도 제대로 맞는 옷을 입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려와 산 기간은 이제 아홉 달 남짓. 제대로 살아봤다고 하기에도 민망한 기간이다. 그러나 내려온 지 일주일 만에, 먼저 귀농하신 분이 타던 수동 소형차를 50만 원에 샀고, 석 달 만에 젊은 사람들과 땅을 같이 사기로 의기투합해 지금은 그 위에 농막까지 지었다. 여기에 매우 자유로운 옷차림과 슬리퍼로 순창을 활보하다 보니, 귀농한 지 3년은 된 것 같다는 동네 형님들의 놀림을 받고 있다.

귀농을 썩 반기지 않으셨던 부모님은 몇 번 순창으로 귀농 교육을 받으러 오시더니 이제는 다른 지방자치단체 교육도 찾아서 듣고는 비교 분석까지 해주신다. 은퇴 뒤 계획안에 귀농도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것 같다. 순창에 내려가면 살도 빼고 건강하게 살겠노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는 부도수표 같은 딸이지만 아직까지는 신뢰의 눈으로 봐주고 계신 듯해 고마울 뿐이다.

▲ 순창 귀농귀촌지원센터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식구들. 첫째 줄 가장 오른쪽이 나. 나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유미 사무국장, 이수형 소장, 센터 일을 많이 도와주는 김재곤·이경아 부부, 전희식 운위원장. ⓒ김현희

알면 알수록 매력 넘치는 순창


전라북도 가장 남쪽에 자리한 순창, 사실 귀농지로 고려해 본 적이 없었던 곳이다. 따뜻한 남쪽 지역은 1년 내내 농사가 바쁘게 돌아가는 만큼, 게으른 나는 좀 더 추운 강원도로 갈 꿈을 꾸고 있었다. 여기에 땅을 살 충분한 돈이 없으니, 최대한 국경 가까이에 붙어 땅을 지어 먹다가 통일되면 바로 위로 올라가 땅을 사겠다는 허황된 로망도 남몰래 품고 있었다.

그런 만큼 순창과의 인연은 100퍼센트 귀농운동본부와의 인연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년 전 소농학교 4기를 다니면서 귀농운동본부를 알게 됐다. 그러면서 지금 순창에서 사무국장을 하고 있는 유미 언니를 도와 귀농인의 날 행사를 준비했고. 그때 제로 눈도장을 콱 찍게 된 것 같다. 행사를 도운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 잘한 일이다.

내려오고 나서 보니 순창은 정을 안 붙이려야 안 붙일 수 없는 곳이었다. 먼저 동고동락하며 1년 농사를 함께 지었던 소농학교 4기 동기들이 네 집이나 순창에 살고 있다. 다들 시골에 온 목적이 같고 비슷한 생각들을 하고 있어 언제 만나도 즐거운 이웃들이다. 또 경관이 아주 빼어난 것은 아니지만 야트막한 산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4대강사업'을 피해간 섬진강이 굽이굽이 흐르고 있어 참 편안한 느낌을 준다. 연기 나는 공장이 없고 규모시설을 갖추기 힘든 소농들이 대부분이라 자연 환경도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여기에 무엇보다 큰 자랑은 지난 4년 동안 순창귀농센터에서 교육을 받고 정착한 30~40대 교육생들이 많다는 점이다. 이들은 취약한 자본력에도 악으로 깡으로 버티면서 농사로, 취업으로, 마을사업으로, 문화예술로, 그냥 살아가는 것 자체로 지역에 큰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순창 귀농센터 교육을 제대로 받아서인지 재미있고, 의미가 있다면 어설프더라도 일단 해보자는 의지가 충만하다. 지금까지 귀농자 장터, 살림강좌, DJ파티 등 크고 작은 행사들이 젊은 귀농자들의 손으로 기획되고 꾸려졌다.

한 강사는 순창을 보고 "홍성과 상주의 20년 전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제 막 움트는 단계지만, 순창도 언젠가는 생태귀농과 탄탄한 지역 인프라로 유명한 곳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든다.

그러나 가끔 생각한다. '이러려고 귀농했나'

물론 교육팀장 자리가 순탄하지만은 않다. 순창에서는 올해 500명이 넘는 귀농 희망자들을 교육했는데 귀농 교육의 특성상 나이 많은 교육생들을 인솔해야 하기에 더욱 그렇다.

처음 6주 동안 장기 합숙 교육을 맡았을 때는 아버지뻘 되는 교육생들이 많았다. 그때 가장 나이가 많았던 교육생 한 분이 '교육팀장은 무조건 교육생보다 한 살이 많다'고 교통정리를 해주시고 계속 깍듯하게 해주셨다. 이 일로 교육팀장 자리에 한 두려움이 크게 줄어들 수 있었다. 그 뒤로는 교육생이 나이를 물어오면 무조건 한 살 많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하고, '아가씨'라는 호칭에는 정색하고 '팀장'이라고 불러 달라고 말할 정도의 담력은 갖추게 됐다.

▲ 부모님이 교육생으로 참여했던 '귀촌학교1기'. ⓒ김현희

그러나 사실 몸이 고되고 바쁜 것은 그다지 힘들게 느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우리의 의도와는 다르게 소득과 개발 중심의 귀농 지원 사업에 일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또는 '우리가 열심히 활동할수록 지역의 젊은 귀농인들의 정착이 더욱 어려워지는 역설적인 시점에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다. 한 예로, 요즘 순창에서는 민둥산을 어디서나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논과 밭을 구하기 어려운 귀농자들이 가파른 임야를 싸게 사서, 원래 있던 나무는 산림조합에 헐값에 넘기고 굴삭기를 동원해 땅을 뒤집어 돈깨나 된다는 두릅, 호두나무 따위를 심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기 때문이다. 순창에서는 두릅 재배가 광범위하게 늘어나고 있는데 민둥산에 막기 같은 묘목만 세워져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산 하나가 하나의 거대한 무덤이 된 것 같아 기가 막힌다. 산은 산이 가지고 있는 생태적인 역할이 무궁무진한데, 이를 소득이 보장된다는 단일작물로 덮어버리니, 제아무리 약을 치지 않고 기른들 밭에 비닐을 치고 약을 뿌리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때로는 이미 생태적으로는 파괴돼 폐허가 된 도시에서 사는 것과, 시골에서 살면서 막 파괴되어 가고 있는 것을 눈으로 목도하는 것 중 어느 게 더 나은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을 때가 있다. 이러한 생태파괴의 선봉에 귀농자들이 있고, 싼 이자로 융자를 받을 수 있도록 귀농 교육 시간을 주면서 1년에 500명이나 진행하는 순창 귀농센터의 귀농교육도 이러한 파괴적인 흐름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이 들 때는 더욱 그렇다.

그래도 이곳에서는 할 일이 있다

그럼에도 결론적으로 조금이라도 일찍 시골로 내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파괴돼 버린 도시에서는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랄 것도 별로 없지만, 이곳에서는 분명 나에게 맡겨진 사명과도 같은 일들이 있을 것이기에.

많지는 않지만 가끔, 순창 귀농센터교육을 통해 땅과 시골, 귀농과 귀촌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됐다며 고마움을 표시하는 교육생들이 있다. 소득 중심의 귀농에서 가치와 생태 중심의 귀농을 고민하게 됐다고. 가끔 나는 이런 분들이 지자체나 정부에서 하는 귀농 교육만을 받고 귀농했을 모습을 상상해 본다. 교육받은 대로 개인이 받을 수 있는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시설을 짓고 산을 깎고 농기계를 장만하지만, 뾰족한 수익이 나지 않을 확률이 높다. 이는 지역에도 개인의 삶에도 엄청난 낭비와 파괴다. 이러한 상황을 조금이나마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귀농운동본부의 활동가이기에 누릴 수 있는 자부심이며 보람이라 생각한다.

순창 귀농센터 교육팀장 이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도 나에게는 큰 즐거움이다. 마을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지, 또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지 탐색하고 있다. 또 농사에서도 귀농 첫해인 올해는 비닐을 친다는 크나큰 타협을 하고도 제대로 된 소득을 내지 못했는데, 내년에는 좀 더 심기일전해서 몇몇 작물만 제대로 키워 볼 생각이다. 여기에 양봉도 다섯 통정도 해보려고 준비하고 있다.

이렇게 과욕을 부리다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내 고생 내가 사서 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날마다 하고 싶은 게 생겨나는 지금의 일상이 참 즐겁다. 시골로 내려오길 잘한 것 같다.

▲ 최근 시작된 귀농자 장터, '촌장(촌빨작렬 시시콜콜 순창골 목장)'. ⓒ김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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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통문은 1996년부터 발행되어 2017년 10월 현재 83호까지 발행된 전국귀농운동본부의 계간지입니다. 귀농과 생태적 삶을 위한 시대적 고민이 담긴 글, 귀농을 준비하고 이루어나가는 과정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귀농일기, 농사∙적정기술∙집짓기 등 농촌생활을 위해 익혀야 할 기술 등 귀농본부의 가치와 지향점이 고스란히 담긴 따뜻한 글모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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