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간 ‘광부간첩’ 올가미 쓴 이병규씨
순탄하기만 했던 이씨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꾼 것은 20세가 되던 1969년 4월 2일 조기잡이 어선을 승선하면서부터였다.
화천이 고향인 이씨는 머리가 좋아 당시 강원도에서 수재들만 모인다는 춘천고등학교에 진학해 청운의 꿈을 키웠으나, 집안형편이 어려워서 3학년 때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그는 집안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청년봉사활동을 하는 지역 4H 클럽회장으로 활동을 하다가 군 입대를 앞두고 어선을 탔다.
인천에서 조기잡이 어선 흥덕호를 탄 그는 나이도 어리고 어부경력이 없어 주방 일과 허드렛일을 하면서 그물을 걷어 올리는 일을 도와주는 일을 맡아 했다.
그해 5월 1일 흥덕호에 선배 어부들과 승선한 그는, 연평도까지 운항하며 그물을 드리웠는데 어획량이 기대보다 많았다.
어린이 날인 5월 5일. 덕적도 근해에서 조업을 하는데 오후 7시부터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운항을 중단하고 바다 한 가운데에 배를 정박시켰다. 선장은 다음날 날이 밝으면 인천항에 입항할 요량 이었다.
이튿날 동이 트자 흥덕호 선원들은 서둘러 그물을 걷어 올리고 선수를 남으로 돌려 최대한 빠른 속력으로 운행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1시간 가량을 운행하였는데 갑자기 앞을 바라보던 선장이 말했다.
“멀리 보이는 검정색 배는 분명 남쪽 배가 아닌 것 같다. 우리 배가 파도에 밀려 북한 해역까지 들어온 모양인데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할 것 같다.”
선장이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흥덕호 어창에 가득한 조기의 무게와 낡은 엔진 때문에 시속은 겨우 10노트 수준에 불과한 정도였다.
잠시 후 북한 인민군 경비정 두 척이 다가와 흥덕호를 향해 라이트를 연속적으로 번쩍이며 정선명령을 내렸다.
“정지하라! 정지하라!”
이씨를 비롯한 흥덕호 선원들은 초조한 나머지 식은 땀을 흘리며 북방어로한계선을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이 없었고, 쾌속선 수준의 인민군 경비정에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특히 인민군의 정선명령을 거부하고 흥덕호가 남쪽으로 도주하자 인민군 경비정에서는 기관총을 쏘아 불빛이 번득였다.
“따르륵, 따르륵!”
기관총 사격에 위협을 느낀 흥덕호 선장은 결국 시동을 끄고 정선을 했다.
이윽고 두 척의 인민군 경비정이 흥덕호에 뱃머리를 대자 따발총을 든 인민군들이 갑판으로 올라왔다.
“이 동무새끼들! 서라는데 서지 않고 도망가고 있어!”
이들은 금방이라도 총을 갈길 것 같은 자세를 취하며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인민군 해군 모자에 ‘인민공화국’이라는 적색 글씨가 보이자 선원들은 “이젠 죽었구나!”하며 체념을 했다.
인민군 가운데 계급이 높은 사람이 소리쳤다.
“꼼짝 말고 손들어!”
벌벌 떠는 선원들을 갑판에 엎드리게 한 인민군들은 선원 7명을 확인한 뒤 포승줄로 묶고는 선실에 이들을 가뒀다.
이때가 1969년 5월 5일 밤 11시 정도였다.
흥덕호 선원 7명의 운명은 이때부터 자신들의 의도와는 전혀 관계없이 벼랑 끝에 내몰렸다.
포승줄에 묶인 채 선실에 갇힌 이씨는 자신의 지갑에 반공연맹 회원증과 4H회장 증명서가 들어 있다는 사실이 찜찜했다.
옆에 있던 선배 선원에게 “입으로 주머니에 있는 지갑을 빼달라”고 부탁했다.
이씨는 지갑에서 꺼낸 반공연맹 회원증과 4H회장 증명서를 입으로 갈기갈기 찢어 선실 틈새에 버렸다.
인민군 경비정에 예인된 흥덕호는 5시간 가량 끌려간 끝에 이튿날인 5월 6일 오전 4시께 황해도 남포항에 입항했다.
남포항에 도착하자 해군복장의 인민군들은 공포와 불안에 떨고 있는 선원들을 상대로 선실에서 북한 해역으로 홍덕호가 월경한 경위와 선원 개개인에 대한 조사를 강도 높게 실시했다.
1차 조사가 끝나자 인민군들은 자신들이 먹는 식사와 동일한 식사를 나포된 흥덕호 선원들에게 선심 쓰는 것처럼 제공했다.
이씨 일행은 북한에 피랍된 첫 날 하루는 남포항 흥덕호에서 조사를 받으며 지냈다.
이튿날 날이 밝자 인민군들은 창문을 모두 천으로 가린 버스에 이씨 등 선원 7명을 태워 출발했다.
남포항에서 1시간 30분 이상을 달려 버스가 도착한 곳은 평양 국제호텔 이었다.
호텔에 도차하자 안전보위부 요원이 나포선원들을 개별적으로 불러서 구체적인 인적사항과 가족관계, 남한의 사회생활 등에 대해 면밀히 조사하며 반응을 살폈다.
특히 나이가 갓 스물에 불과했던 이씨는 군화를 신고 신체 건장한 특징을 보여 육군에 입대했다가 간첩교육을 받은 뒤 선원으로 위장 취업하여 간첩활동을 하러 북한에 고의로 월경한 것이 아니냐며 집중 추궁을 당했다.
“이병규 동무는 선원도 아니면서 선원행세를 하고 있는데 사실대로 자백해라. 육군에서 간첩교육을 받고 어선에 승선했다가 간첩활동을 위해 우리 해역에 고의로 침투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이씨는 “나는 아직 군에 영장을 받지 않아 입대를 하지 않은 상태다. 고향 화천에서 친구들과 패싸움을 하다가 경찰에 쫓기는 바람에 인천으로 와 배를 탄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동무는 거짓말을 계속하는데 사상이 의심스럽다.”
“전혀 그렇지 않다.”
취조는 계속 반복됐고 나중에는 짜증이 날 정도였다.
그러나 식사를 비롯해 이들에 대한 대우는 최고로 예우를 하는 듯 했다.
쌀과 잡곡이 섞인 밥과 돼지고기 국에 생선구이와 김, 김치 등을 매 끼니마다 메뉴를 바꿔가면서 제공해 주었다. 특히 밥은 얼마나 많이 퍼 주는지 밥그릇 위로 산처럼 수북이 쌓였다.
이들은 식사시간이 되면 “남에서 얼마나 배가 고팠겠나. 고깃국과 밥은 얼마든지 줄테니 실컷 먹어도 된다”며 선심을 썼다.
평양 국제호텔에서 3일을 지낸 뒤 흥덕호 선원들은 5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5층 건물의 평양여관 3층에 다시 옮겨져 조사를 받았다.
평양여관은 남한에서 피랍되거나 납치된 남한출신의 사람들에게 간첩교육을 시키는 곳으로 명성이 난 숙박을 겸한 교육장이었다.
평양여관으로 옮긴지 며칠이 지나자 이씨 일행보다 며칠 앞서 피랍된 제2 신흥호(선원 8명), 복순호(선원 7명), 신성호(선원 8명) 선원 등 4척의 피랍어선에 승선했던 31명의 선원들을 집단으로 수용하며 회유와 사상교육을 시켰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위원이라고 신분을 밝힌 조사요원은 “북조선은 노동자와 농민들의 지상낙원”이라며 “북조선에 남아 혁명과업을 함께 수행하자”고 선원들에게 북한 잔류를 노골적으로 꼬드겼다.
이에 이병규씨는 “나는 집안의 장남으로 병든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을 뿐 아니라 나이 어린 동생들도 돌봐야 하니 꼭 고향으로 보내 달라”고 사정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북한에 남으면 대학도 보내주고 어여쁜 여자와 결혼도 시켜주겠다”며 집요하게 이씨를 유혹했다.
“나는 홀어머니 때문이라도 제발 고향에 갈 수 있게 해달라”
이번에는 예쁘장한 간호사가 수줍은 보조개를 띄우며 이씨를 유혹했다.
“지상낙원인 이곳에 남아 저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삽시다!”
당시 북한 요원들의 회유를 듣고 6개월 뒤 북한에 잔류한 선원들은 흑산도에서 승선했던 나이어린 이강원 등 4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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