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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언어를 북돋우라

[ACT!] <버라이어티 생존토크쇼>, <자, 이제 댄스타임> 리뷰

술 한 잔 곁들이며 지인들과 두런거리다 흥얼흥얼 귀가하는 길은 즐겁다. 몸의 긴장을 풀어주는 어둠과 한 모금 술이 깊은 이야기를 즐기기 위한 최적의 무드를 제공하고 밤은 너무 빨리 깊어지곤 한다. 그리고 이 시간을 곱씹으며 귀가하는 밤길도 무섭기보다는 평온하고 싶다. 아니, 그럴 권리가 있다! 그러나 예를 들어 강남역 화장실 여성혐오 살인사건을 접하고 어느 날, 여느 때라면 흥에 취해 재잘거렸을 귀가길 주사 문자가, 혼자 택시를 타면서 느낀 공포와 긴장을 토로하는 장이 되고 말았다. 제길, 더러운 기분이다. 이런 불쾌한 일들은 왕왕 반복된다.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상은 불현듯 기쁨보다는 공포를 앞세우는 현실과 대면한다. <버라이어티 생존토크쇼>는 이러한 켜켜이 쌓인 폭력을 찰지게 씹는다.

여성과 안전 - “21세기 대한민국의 국민은 두 종류로 나뉜다, 남자와 생존자.”


<버라이어티 생존토크쇼>는 성폭력 피해자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작은 말하기' 모임에서 시작한다. 화두는 모임에 참여할 수 있는 멤버가 어떤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지, 다시 말해 직접 피해를 겪은 사람들만 가능한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개방될 수 있는지 여부다. 직접적인 피해자만 참여했으면 하는 구성원들에게서, 아무나 참여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자리가 ‘안전’하기 때문에 가능했던 대화를 나눌 수 없을 것이란 이야기가 들려온다. 그게 무슨 뜻이지? 누가 오는가에 따라 불쾌하거나 불편한 감정을 넘어 심지어 안전하지 않게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 <버라이어티 생존토크쇼> 포스터
그리고 영화는 모임 바깥으로 나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사회의 무지(無知)를 기록한다. ‘무지’라는 단어를 찾아보니, ‘아는 것이 없음’과 함께 ‘미련하고 우악스러움’이라는 뜻이 적혀 있다. 그래, 미련하고 우악스러운 시선들이 만드는 일상에 편견과 혐오가 세세히 스며들어 끊임없이 여성의 안전을 위협한다. 그것은 여성의 말을 묵살하고, 여성의 욕망을 재단하며, 여성을 외면한다. 그렇게 뒤틀려버린 정체성으로 나를 억누르는 일상이 안전할 리 만무하다. 옷을 짧게 입어 문제고, 늦게 돌아다녀 문제고, 대범하게 넘기지 못해서 폭력의 피해자인 ‘내가’ 문제라는 걸.

무지, 편견, 혐오 등으로 구성된 여성, 그렇게 말할 자격을 박탈당하고 대상화된 존재로서 겪은 많은 폭력이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 즉, 문제로 성립하지 않는다. 영화는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폭력과 책임전가 및 무심한 말들로 만연한 현실을 비춘다. 한 번 먹고 체한 음식을 다시 보기만 해도 싫어지곤 하는 게 인간의 몸이다. 몸은 직관적으로 자신의 안전을 담보로 외부와 관계한다. 폭력은 공포와 고통의 기억을 통해 우리의 몸을 제한하고 위축시키며, 그렇게 미래의 관계에까지 폭력을 가동하려 든다.

게다가 이런 과정에서, 나의 의사와 의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대상화되어 조각난 ‘여성’이란 이름이 딱지처럼 부과되는 것이다. 이중구속이고 이중의 박탈이다. 여성은 폭력의 대상이 되는 과정에서 존중받을 권리를 박탈당하고, 사회적으로 규정된 여성에 대한 이미지 속에서 한 번 더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 과연 여성의 몸에 가능한 안전함이란 어디에 있는가?

영화는 이러한 세상에 사람은 두 종류로, 즉 남성과 생존자로 나뉜다고 읊조린다. 진정 스스로를 일컫는 말로서의 여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성의 말하기는 이러한 위협에 저항하며 자기 존재에 숨을 불어넣는 생존의 말하기다. 나를 억압하는 힘에 맞서 나 스스로부터 나를 규정하는 힘으로 대항하는 말하기. 성폭력 피해를 입은 당사자가 정당한 권리를 얻지 못하는 분위기에서 피해자를 중심으로 한 커뮤니티는 소중한 출구가 된다. 이 말하기는 그 주체를 존중하기에 자유롭다.

사려 깊지만 냉철하기 – “그녀들의 삶이 내 삶과도 맞닿아 있다. 그래, 난 여자다.”

말하기들의 일부로서 <버라이어티 생존토크쇼>를 이끄는 내레이터인 감독의 목소리에는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느끼고 질문하고 알아가는 바가 솔직하게 드러난다. 어떤 사건을 대하는 나와 타인들의 반응에서 질문을 시작한 영화는, 그 안에 공통적인 이름으로 존재하는 여성을 확인한다. 영화 한 편이 그 자체로 일종의 메이킹필름인 것 같이 영화의 탐색과정은 투명하고 정직하다. 질문을 하고, 이해하고, 다가선다. 비꼬거나 은유하기보다는 곧장 나아가고, 여성이라는 이름이 놓인 사회적 지대를 밝히는 과정은 친절하다. 여성으로 의미화 되는 현실을 공감하거나 알아가는 그대로 솔직하다.

<자, 이제 댄스타임>에서도 문제를 품고 제기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이고 열정적이며 친절한 노력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 문답의 볼륨은 더 두터워졌다. 조세영 감독의 영화가 가진 친절함은 상냥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이 소통하는 바를 어떻게 하면 잘 표현해야 할지 고민하는 데에서 나오는 친절함이다. 어떻게 소통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의 무지를 극복할 수 있을까? <자, 이제 댄스타임>은 그 과정에서 영화장치가 어떻게 다가설지 고심한 흔적과 그 내용들로 여백 없이 꽉 차 있다.

인터뷰, 드라마, 출연배우의 오디션, 낙태금지 법안을 둘러싼 헌법재판, 낙태와 관련한 기호들을 읽을 수 있는 거리, 언론에서 보도하는 낙태 관련 뉴스, 인터넷 댓글, 달팽이라는 상징적 존재, 수술실과 엔딩의 무대화 등등 다양한 형식들이 낙태를 둘러싼 화두를 만들어낸다. 마치 여백 없이 꽉 찬 그림처럼 이 영화는 한국 사회의 낙태 담론을 둘러싼 이야기와 이미지들을 쉼 없이 교차시키며 한 편의 사회적 풍경, 그리고 그것을 오롯이 홀로 겪어야 했던 여성들의 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것은 추상적이지도 않고 어떤 우회도 없이 우리 사회의 실제 경험을 드러내는데, 그 빼곡하게 배치된 화면의 교차를 지켜보며 숨을 수 있는 공간이나 쉴 수 있는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영화는 존재하지만 보이지는 않는 ‘낙태’ 문제를 쉼 없이 무대에 올린다.

그리고 두 작품에서 모두 영화의 적극적이고 친절한 고민에 녹아든 존재가 자기 앞에 놓인 장벽과 마주하며, 극복하고, 나아간다. 사려 깊지만 냉철한 과정으로서 영화 만들기.

여성의 자기결정권 - “그때의 나를 사랑해주고 싶어서, 치우지 않고.”

이런 과정에서 <버라이어티 생존토크쇼>는 우리가 생존을 위한 말하기를 넘어 버라이어티 한 욕망들을 세상 밖으로 쏟아내야 한다는 걸 전한다. 이와 관련하여 영화 속에 존재하는 말하기는 과거에 대한 스스로의 권리 및 결정권을 주장하기에 자율적이다. 그것은 여성이라는 존재를 묵살하는 폭력적 사회의 귀를 후벼 파고 들어간다. 함께 나서는 활동, 인터뷰, 성교육 강의 등등 부당한 현실과 마주하고 부딪쳐보는 말하기의 차원들이 영화를 채우고, 그에 당당한 만큼 영화는 기쁘고 힘차다. 그리고 그 말하기는 세상을 향한 값지고 통쾌한 발차기가 된다.

<자, 이제 댄스타임>은 그 발차기를 이어 용기 있는 이미지로 우리를 감싸 안는다. 그 첫 번째는 낙태 경험과 관련하여 인터뷰하는 여성들의 모자이크가 걷히면서 그들의 모습을 우리가 선명하게 마주하게 되는 장면이다. 그 이미지는 존재감으로 꽉 차고도 넘쳐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그들은 단단하고 성숙한 미소를 띤 전사처럼 우리를 바라본다. 그를 통해 여성의 언어를, 존재를, 돌려준다. 보지 않을 수 없고, 듣지 않을 수 없다.

▲ <자, 이제 댄스타임> 포스터
영화는 여성들에게만 전가되어 있던 낙태의 경험을 다시 관계적이며 담론적이기도 한 공통경험의 자리로 돌려주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존재가 기각된 여성의 경험을, 젠더화 된 무수한 사고와 이미지들에 충돌시킨다. 그리고 모자이크의 뿌연 화면을 걷어낸 이야기는 낙태문제를 둘러싼 시선의 방향을 나에서 우리의 사회로 전복시킨다. 경험이 삭제된 상태에서만 논해지던 낙태의 문제, 즉 신체의 경험, 관계적 경험, 담론적 경험이 삭제된 채로 추상화되어 있던 낙태의 문제는, 뿌연 추상을 걷어내고 주체가 겪는 신체, 관계, 마음을 통해 구체화된다. 인터뷰를 통해, 극영화를 통해, 그리고 극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의 오디션을 통해, 다양한 인서트들을 통해, 우리가 매 순간 경험의 과정을 따라가고 겪을 수 있도록, 우리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스쳐지나가지 않도록, 문제가 존재하도록, 다양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이야기한다.

낙태 문제를 통해 <자, 이제 댄스타임>은 우리사회가 어떤 식으로 여성의 몸을 취하면서 한편으로는 여성에게만 그 책임을 전가하는지 증언한다. 여성의 자기결정권보다 아이의 생명권에 손을 들어준다고 하는 헌법재판소의 남성적 언어 앞에 여성의 말이 대치한다. 한편으로는 철저한 사적소유 시스템을 부과하면서 다른 편으로 주인 행세만 하는 남성-국가의 태도는 얼마나 염치없는가. 이에 대항하여 영화 속의 여성들은 빼앗긴 나에 대한 주권을, 빼앗긴 나에 대한 언어를 되찾아오고자 한다. 알아달라고 울거나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무지와 편견과 혐오와는 비견될 수 없을 만큼 멋있고 당당한 자기 주인으로서의 말과 시선과 자태로 설 때, 그 위풍당당함이 젠체하는 가짜 주인을 떨게 만듦을, 영화는 배워간다.

반란의 언어 - “보호가 아니라 자유를!”

미드 중 <뱀파이어 해결사(한국판 제목임)>라고 가히 ‘걸크러시’계의 고전이라 할 만한 작품이 있다. 선택받은 해결사 버피는 마지막 시즌에서 영웅으로서의 운명을 거스르고 마녀인 친구와 함께 모두에게 자신의 힘을 나누어준다. 그리고 모든 여성이 해결사가 되었으니, 그야말로 버라이어티한 걸크러시 스펙타클이 지옥에서 올라온 이들을 때려눕힌다. <자, 이제 댄스타임>의 설렁탕 집 장면은 이런 걸크러시를 위한 한국판 주문이 될 수 있을까? 위험 앞에 고립되어 외롭고 괴로운 각각의 여성들에게 말을 걸고, 말하기를 북돋우며, 그것을 우리 사회 여성의 도전으로 공감하는 영화의 정직한 발걸음이, 스스로의 경험을 곱씹고 성찰하고 위로하며 극복하고 결국 스스로의 해결사로서 자기를 주장해가는 무수한 여성의 경험과 함께 한다.

<자, 이제 댄스타임>에서 우리를 감싸 안는 두 번째 멋진 장면, 여인과 달팽이의 춤사위는 이렇게 스스로의 해결사가 된 여성의 해방된 몸짓과도 통할 것 같다. 안전이라는 실질적인 장벽 앞에서 질문을 시작한 영화는 이 작품에서 그 우리사회에서 여성이 존재하는 바를 더 꽉 찬 목소리로 더 큰 모습으로 담아냄으로서 과제에 답한다. 더 정면으로 쳐다볼 수 있는 자, 더 바로 설 수 있는 자가 이긴다. 혼자가 아니라 내 앞에, 내 옆에서 함께 앉아 설렁탕 한 그릇씩 채우고 있는 여성들과 함께 말이다.

해결사와 마녀의 주문은 이미 우리 사회에 도착했는지도 모르겠다. 무지를 혐오로 봉합하려는 손쉬운 사회 분위기에 맞서 여성을 말하고 싸우는 지금의 전쟁터에서는 이미 수많은 해결사들이 스스로에 대한 결정권자로서 반란의 언어들을 조직하고 있다. 그리고 2016년 말 현재, 200만이 넘는 국민들이 광장에 모여 자신을 주권자로서 주장하고 있다. 촛불이 만들어내는 그 엄청난 물결이 여성을 대상화하고 억압해온 성차별과 혐오를 극복해가는 감각으로 그 길을 잇지 않는다면, 그 주인임의 주장은 반쪽짜리에 불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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