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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박근혜를 '국민소환'할 수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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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박근혜를 '국민소환'할 수 있어야 했다

[기고] 민주주의의 근본을 묻다

광화문 광장에 서서 왜 박근혜가 그리고 그들이 우리 위에 군림하면서 우리를 대표했으며, 왜 우리는 그들의 지배와 통치를 받아야 했던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조금 멀리 생각해보면, 왜 일제로부터 해방될 때 이승만이 돌아와 우리 위에 군림하였는가? 그리고 지금 어떤 이유로 우리 앞의 정당과 유력 주자들이 권력을 쥐어야 하고 우리 위에 군림하려는 것일까?

이제 난마와도 같은 구체제의 혼돈을 정돈해나가면서 다른 한편으로 시민주권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개벽을 맞이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 차분하게 질문해야만 한다.

참된 '공화'란 모든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하여 독립전쟁을 벌이던 무렵, '독립'이라는 말은 대역무도한 불온 언어였다. 이 불온한 '독립'이라는 말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고 자신감을 갖게 한 것은 다름 아닌 토마스 페인의 <상식>이라는 소책자였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도 "<상식>을 읽은 뒤 내 가슴 속에서는 독립과 자유의 정신이 들끓기 시작했다. 우리는 무릎을 꿇고 노예가 될 수 없으며, 누구도 우리를 압박하고 착취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토마스 페인은 원고료나 인세를 전혀 받지 않고 이 책을 저렴하게 인쇄해, 독립전쟁에 참전한 민병들은 주머니에 이 책을 넣고서 전투를 벌였다.

그런데 토마스 페인은 이 책에서 당시 국민들이 매우 우매하기 때문에 국민의 이익은 반드시 귀족이 대표해야 한다는 영국 헌법의 시각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이러한 주장이 완전히 사람을 속이는 거짓말이고 사기이며, 모든 사람이 국가의 정치에 참여해야 하며 그것이 곧 참된 공화(共和)라고 역설했다.

대표는 선거민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논리는 완전한 거짓이며 사기

오늘날 대의정치의 근간이 되는 논리는 바로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자(의원)는 선거민이 아니라 '추상적으로' 전체 국민을 위한 전체 이익을 추구해야 하며, 선거민에 책임을 지는 명령 위임을 배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의 관계에서 존재하는 것은 오직 국민이 대표자를 선출하는 행위와 대표자가 자기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행위뿐이다. 그리고 대표자의 이러한 행위는 "전체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그리하여 국민을 통제하게 된다.

다시 말해, 대의제에서의 대표자란 더 이상 선거민의 단순한 대변자가 아니며 대리인(Agent)이나 수임자(Kommissar)도 아니었다.

영국에서 대의 제도는 17세기에 형성되었다. 당시 영국에서 의회란 '대자문회의(大諮問會議)'에서의 귀족들의 논의를 의미하였으며, 의원 1/3 이상이 귀족이거나 이에 준하는 계층으로서 의회는 사실상 상류층의 클럽이었다.

선거권도 일정한 재력을 지닌 남성으로 한정되었고, 1866년까지 선거권을 지닌 사람은 불과 100만 명으로서 전체 인구의 3% 수준이었다. 이렇게 하여 당시의 의회는 국민의 대의 기관으로 기능하기보다 귀족과 부호들의 금권정치를 유지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대의제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라고 비판하는 논거는 대의제가 지니는 이러한 발생사적 요인에 근거하고 있다.

왜 대중은 '통치'의 권리가 없는가?

18세기 영국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던 휘그주의(Whiggism)는 귀족적 과두제를 옹호했는데, 명예혁명 후 의회가 강력한 힘을 가지면서 영국에서 지배적인 정치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이 휘그주의를 철저하게 반영하여 이론화했던 버크(E. Burke)에 의하면, 의원이란 어디까지나 공적인 업무의 수행을 위하여 독자성을 지닌 공인(公人)으로 행동해야 했다. 그리하여 그는 특수이익을 추구하는 선거민의 대리인이어서는 안 되며 선거민에게 기속(羈束)되어서는 안 되었다. 이 논리는 이른바 선거민에게 책임을 지는 "명령적 위임(imperatives Mandat)'을 사실상 포기하고 있었다. 오직 통치란 이성에 맞게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미덕을 갖춘 자가 담당해야 하고, 국민은 이에 직접 개입하면 안 된다고 강조되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국민들은 오직 자신들을 뽑을 '권리' 혹은 '자유'가 있을 뿐 통치는 자신들처럼 탁월하고 고귀한 사람들만이 담당할 고유 영역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와 주장은 일찍이 미국 독립전쟁 당시 토마스 페인이 지적한 논리 그대로 대중을 오로지 개돼지로만 간주하는 거짓말이요 사기다.

누구를 위하여 정당은 존재하는가?

현재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의 정치를 그리고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고 있는 정당이라는 존재도 사실 그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다.

정당정치의 고향으로 칭해지는 영국의 정당사를 살펴보면 17세기 이후 19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정당이란 고작해야 사사로운 '그룹'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최초의 '그룹'인 원정당(圓頂黨; 1641년 영국 의회에서 국왕군의 병사와 의회파 지지자들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졌을 때, 의회파 지지자들이 머리를 짧게 깎았기 때문에 경멸의 뜻으로 불렀던 데에서 유래되었다) 라운즈헤즈(Roundheads)와 왕당파인 기사단 캐버리어즈(Cavaliers)는 각기 의회와 왕권을 배경으로 무력 대결을 벌였으며 마침내 청교도혁명에 이어졌다는 점에서 정당이라기보다 정치적 폭력단체라 할 수 있었다. 이후 의회에서의 대립은 소집파 대 반대파에 이어 휘그 대 토리로 이어졌고, 보수당인 토리당에서 '보수주의적'이라는 용어도 1830년에야 비로소 만들어졌다. 이렇게 하여 정당들이 그나마 오늘날과 같은 현대 정당의 모습은 20세기가 되고서야 비로소 갖춰졌다.

이때 토리당은 영국국교주의와 지주계급을 대표했으며 휘그당은 귀족, 토지 소유 계층, 부유한 중산층의 이익을 대변했던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정당제도 역시 고스란히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을 보장하는 체제였을 뿐이다.

선거제도의 개혁 없이 민주주의 없다

민주주의의 성패란 쉽게 말해 대표를 어떻게 선출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나 현재의 선거제도는 진정한 대표의 선출을 가로 막고 민의를 왜곡하는 대표적인 구체제이다. 지금의 선거제도는 여야 양당의 철저한 독점과 그들의 적대적 공존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장치이다. 동시에 국민들의 선택권을 극도로 제한, 박탈하고 다양한 정치세력과 새로운 신진 세력의 원내 진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함으로써 민의의 반영을 철저하게 왜곡시킨다.

그리하여 현행 선거제도에 토대한 정당정치란 기껏 기득권 정객들이 군림하는 붕당정치의 영구적 재생산을 위한 확실한 보장이며, 이는 "무늬만 민주주의"인 봉건적 귀족정치의 현대판 투영일 뿐이다.

오늘날 미국의 쇠락은 정치의 다원성과 민의의 반영을 크게 제약하는 독과점적 양당제도에 큰 요인이 있으며,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이 땅의 정치적 난맥상 역시 거대 정당의 독점만을 보장하는 현 선거제도가 그 주된 요인이다.
완전한 직접민주주의의 시행이 어려운 지금, 최선의 방안은 다양한 소수의 의사(意思)도 원내에 진입할 수 있고, 그리하여 기성 정치권의 독과점을 견제할 수 있는 독일식 정당명부별 비례대표제의 시행이다. 그 길이 촛불 민의를 받들어 참된 민주주의로 가는 최소한의 장치이다.

민의에 배반하는 대표가 소환되는 것, 이것이 민주주의의 기본

권력이란 견제받지 않으면 스스로 무한정 확대 강화하는 자기 논리를 지니고 있다. 미국 건국사를 살펴보면, 초기 지도자들이 가장 집중했던 것은 바로 정부 권력에 대한 견제와 통제 장치의 마련이었다. 그들은 제한되지 않은 권력은 반드시 폭정의 도구로 변질한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이 땅에서는 일찍이 왕정이 무너지고 대의정치로 칭해지는 민주주의가 계승했지만, 그것은 왕정에 가깝거나 사실상 귀족정치에 다름없었다.

이 땅에서 제왕적 대통령제가 여전히 이토록 위세를 떨치고 있는 것은 시민의식과 시민사회의 미숙한 발전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권력자를 나의 대표라는 동등한 관점에서 보지 않고 상위 위계에 군림하는 불가침의 권력자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이 아직 우리 사회에 강인하게 온존하고 있다는 반성도 필요한 시점이다.

이제 우리는 왜곡된 주종관계와 거짓된 위임 논리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내가 나를 대표해야 한다. 마을과 지역부터 주민의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대표를 만들어나가며, 노조처럼 노조 대표를 선출하고 그들이 일을 잘못 수행하게 되면 책임을 지고 퇴진하며 다시 새로운 대표를 선출하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대표를 선출하고, 선출된 대표는 반드시 우리의 통제와 감독을 받으며 그 업무 수행에 책임을 진다.

이것이 곧 민주주의다. 현재 서구 대의제도의 심화되는 위기는 바로 선거민에 대한 대표의 책임을 부정하는 자유위임의 논리로부터 연유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국민소환제는 왜곡된 대의제를 바로잡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첫걸음으로 기능한다. 대통령부터 국회의원 그리고 지자체장과 고위 공직자들은 국민들이 부여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때 당연히 책임을 지고 소환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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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준섭

1970년대말부터 90년대 중반까지 학생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몸담았으며, 1998년 중국 상하이 푸단(復旦)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2004년 국제관계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회도서관 조사관으로 일했다. <변이 국회의원의 탄생>(2019), <광주백서>(2018), <대한민국 민주주의처방전>(2015) , <사마천 사기 56>(2016), <논어>(2018), <도덕경>(2019)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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