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첩첩산골 탄광촌은 과거 매우 어리숙한 곳이었다.
그러나 간혹 정보기관에 비상이 걸리는 첩보나 깜짝 놀랄만한 사건이 터지는 일이 발생하는 곳이 탄광촌이기도 했다.
법보다 주먹이 앞서던 지난 1969년 탄광촌 황지에서 일어난 간첩사건은 지금 시각에서 보면 황당함 그 자체였다.
탄광촌 황지지역 주민들의 식수원이면서 아낙네들의 빨래터이기도 한 황지연못은 삭막한 탄광촌에서 생활의 중심지에 속했다.
그런 황지연못 바로 옆에서 담배와 과자, 음료수 등 가벼운 잡화를 판매하는 구멍가게를 운영해온 최진수(가명. 당시 35세)씨가 ‘북괴고무 찬양죄’로 붙잡혀가 3년간 교도소 생활을 한 사연은 참으로 기가 막히다.
당시 탄광촌 황지에는 주먹을 날리던 못된 깡패들이 많았다. 이돈웅(폭력전과 13범. 나중에 전도사로 전업)씨는 황지지역 광부들과 탄광업주는 물론 영세 상인들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는 파렴치한 주먹장이로 소문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최씨의 구멍가게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며 돈을 갈취해 가는 일이 잦았다.
최씨 가게에 온 이씨는 “갑자기 급한 돈이 필요해서 그런데 돈 좀 꿔달라”고 협박했다.
워낙 유명한 깡패여서 처음 몇 번은 어쩔 수 없이 돈을 줬지만 하루 매상과 수익이 뻔한데 계속 당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벌어야 우리 3식구가 입에 풀칠이라도 하는데 장사가 안 돼 어렵다”
몇 번 거절하는 최씨에게 화가 난 깡패 이씨는 그를 심하게 골탕 먹일 계획을 짰다.
그런 방면에는 이골이 난 그는 며칠 후 구멍가게를 찾아가 최씨의 목게 날이 시퍼렇게 선 과도를 들이댔다.
갑작스런 이씨의 행동에 오금이 저린 최씨는 아무 말도 못했다.
회심의 미소를 띤 이씨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살려주겠지만 말을 듣지 않으면 목을 따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당시 탄광촌은 살인과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이었지만, 치안이 허술해서 밤이 되면 부녀자들은 외출을 꺼릴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잔뜩 겁에 질린 최씨는 “시키는 대로 하겠으니 제발 칼을 치워달라”고 사정했다.
“좋다. 그러면 큰 소리로 김일성 만세를 3번만 외치면 살려 주겠다.”
돈을 달라고 할 줄 알았던 순진한 최씨는 깡패 이씨가 제시한 조건이 자신을 옭아매려는 음흉한 음모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안도하면서 “김일성 만세!”를 3번 연속 외쳤다.
이때 근처를 지나가던 행인이 최씨가 외친 “김일성 만세”라는 함성을 듣게 됐고, 그는 근처 황지지서에 신고를 했다.
그는 신고를 받고 즉각 출동한 경찰에 의해 연행됐다.
경찰에서 최씨는 “깡패가 찾아와 갑자기 칼을 들이대면서 협박하는 바람에 김일성 만세를 외치게 된 것”이라며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구멍가게를 하는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경찰은 문제의 이돈웅을 데려와 대질을 시켰다.
이돈웅은 태연스럽게 말했다.
“이 사람이 생사람을 잡으려 엉뚱한 소리를 하네. 내가 가게를 들어 가는데 김일성 만세를 외치며 손까지 번쩍 들어 올리는 것도 봤다.”
다급해진 최씨는 경찰관에게 “잘못했으니 살려달라”고 용서를 구했지만 이미 사건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후 최씨는 목에 과도를 들이대고 협박을 하는 바람에 아무 생각 없이 소리를 지른 것이라고 계속 항변했지만 목격자와 신고자가 있는 바람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지서에 신고한 주민은 ‘김일성 만세’ 라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고 경찰관에게 진술하였고, 자신에게 김일성 만세를 시킨 깡패 이돈웅은 오히려 현장이 생생한 목격자로 증언하고 있으니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결국 그는 경찰서 조사과정에서 ‘김일성 만세’를 외친 사실을 시인하고 말았다.
그리고 3년이 지난 1972년 역시 황지에서 일어났던 사건.
황지광업소 감독으로 근무하는 김두봉씨(가명)는 광산에서 광부들에게 인간적으로 잘 대해주는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사람 좋은 감독’으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하루는 황지광업소 후산부인 이길진(가명)씨가 일본에 사는 친척에게 편지를 보내야하는데 한문을 모르니 겉봉투 주소를 한문으로 써달라며 찾아왔다.
사람 좋은 김 감독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후산부 이씨가 내민 편지봉투에 한자로 주소를 써 줬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고 말았다.
며칠 뒤 군 수사관이라며 김 감독을 찾아왔다.
“잠깐 조사할 것이 있으니 협조해 달라”
영문도 모르고 군 수사관이 타고 온 군용 지프에 오르자 강릉지구 보안부대로 연행해 갔다.
강릉보안대에서 취조를 받으며 김 감독은 며칠 전 후산부 이씨의 부탁으로 주소를 써준 일본의 친척이 조총련에 몸담고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았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보안대 수사관들은 김 감독에게 “너는 조총련과 내통하는 고정간첩이다.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병신을 만들어 버리든가 죽여서 고기밥이 되도록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일주일동안 밤낮 없는 고문과 폭행, 협박에 시달린 김 감독은 보안대 수사관들이 조작한 서류에 어쩔 수 없이 지장을 찍고 간첩 아닌 간첩이 되고 말았다.
보안사 수사관들에 의해 김 감독은 일본 조총련 간부와 내통한 ‘탄광촌 광부 위장간첩’으로 몰려 5년형을 살아야 했다.
1967년 5월 삼척군 상장면(황지) 함백산 기슭에 위치한 풍전탄광에서 임금인상 문제로 탄광촌 최초의 48시간 파업이 발생했다.
그런데 어떻게 풍전탄광 파업소식이 북한에 알려졌는지 평양방송에서 파업을 시작한 당일 오전 8시 뉴스에 “악랄한 탄광업주의 착취에 시달리던 남조선 강원도 삼척의 풍전탄광 동지들이 노동자의 해방을 부르짖으며 파업을 시작했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령부 등 정보기관에서는 강원도 탄광촌 골짜기 500여 명 규모의 탄광 파업소식이 어떻게 북한에 알려지게 됐는지 경위를 파악하느라 비상이 걸렸다. 이 때문에 애꿎은 형사들과 정보부 강원분실, 보안대 직원들이 이를 조사하느라 호들갑을 떨어야 했다.
지난 1985년 5월 17일 오전 11시 가까운 시간, 강원도 태백시 철암동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 철암항 근처의 속칭 피네골에서 구멍가게인 ‘근호상회’를 하는 이병규(당시 37세)씨의 집에 낯선 남자가 찾아왔다.
당시 이씨는 장성광업소 철암항 선산부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병규 선생댁 맞습니까?”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낯선 손님을 맞은 이씨는 “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고 물었다.
스포츠형 머리를 한 30대의 남자는 “이 선생 친구가 밀수를 하다가 검거됐는데 다방에 가서 조언 좀 부탁합니다.”말하며 동행을 요구했다.
낌새가 이상해 이씨가 머뭇거리자 “집 아래 다방에서 잠깐이면 된다”고 안심시켰다.
짧은 스포츠 머리의 남자를 따라 다방이 있는 곳으로 가는데 길옆에 처음 보는 낯선 검정색 승용차가 보였다.
남자를 따라 승용차 옆을 지나치는데 갑자기 승용차 뒷문이 열리며 남자 두 명이 바깥으로 나와 앞서가던 짧은 머리와 합세해 순식간에 이씨를 승용차 뒷좌석에 밀어 넣었고 양옆으로는 짧은 머리들이 나란히 앉았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소리를 지르거나 반항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또 좁은 골목길에서 순간적으로 발생한 일이기 때문에 인근 주민이나 가족도 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승용차 뒷좌석 중앙에 앉혀진 이씨는 머리를 무릎 아래로 숙이도록 하고 보자기를 머리에 씌웠다.
그리고 곧장 승용차가 출발했다.
황당하면서도 당황해진 이씨는 순식간에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들은 누구이며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것일까? 그래도 죄가 없는데 설마 무슨 일이 있으랴? 그렇지만 내가 이유도 모르게 끌려 가는 것을 주변은 물론, 처자식도 모르는데 앞으로 나는 어찌될까?”
불안한 생각을 하며 2시간을 넘게 구불구불한 비포장 도로를 달려 도착한 곳은 전혀 낯선 곳의 군부대 비슷한 곳 이었다.
승용차에서 내려 건물 지하실로 끌려 내려간 이씨에게 스포츠 머리의 사내는 “입고 온 옷을 모두 벗고 군복으로 갈아 입으라”며 명령조로 말했다.
음습하고 기분 나쁜 곰팡이 냄새가 풍기는 지하실에는 백열등이 눈부시게 빛을 발하며 낯선 이방인을 주눅 들게 만들었다.
군복을 갈아 입으면서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든 이씨를 향해 스포츠 머리들은 “이 새끼, 간첩이야”하며 “빨갱이가 겁도 없이 숨을 쉬고 있는데 얼마나 버티나 두고 보자”고 말하며, 공포감까지 조성했다.
이씨는 그들에게 ‘간첩’과 ‘빨갱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철렁 내려낮으면서 뭔가 일이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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