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행진’ 연출한 한인회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1963년부터 시작된 광부들의 독일행은 당시로서는 '꿈의 직장'에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했다.
특히 독일은 후생복지가 뛰어나고 노동자들을 위한 근로기준법을 비롯한 각종 제도가 철저하게 지켜지는 선진국이었다.
또 탄광노동조합도 임금교섭과 후생복지보다 안전에 최우선을 두고 노사교섭을 펼쳤고 이 때문에 노조 간부들도 매일 갱내에 입갱해 막장의 안전여부를 수시로 점검했다.
당시 독일의 탄광은 가스사고의 위험 때문에 갱내에서는 절대 금연을 원칙으로 했다. 이 때문에 애연가들은 냄새로 흡연을 대신할 수 있는 '코담배'를 소지하고 입갱했다가 휴식시간에 코담배를 꺼낸 흡입하는 것으로 담배 피우는 효과를 대신했다.
또 당시 독일에서는 힘든 일을 기피하는 풍조 때문에 탄광일을 기피하자 외국인 인력을 수입해 광부로 근무시켰는데 터키인이 가장 많았고 한국인, 유고인, 헝가리인 등으로 인종시장을 방불케 했다.
독일의 탄광에서는 누구를 만나든 행운을 빈다는 뜻의 ‘그뤼커 아우프’를 외쳤는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먼저 본 사람이 인사하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
파독광부로 근무하다가 한국인을 망신시킨 사례 하나.
대한석탄공사 화순광업소에서 근무하다 1972년 초 파독광부로 독일에 온 김기덕(28.가명)씨는 과거 몇 차례 절도를 했던 전력이 있었다.
독일에 와서 2년간은 탄만 캐며 얌전하게 지냈지만 끝내 나쁜 손버릇이 재발했다.
독일은 선진국답게 주5일제 근무를 시행하고 있었는데 토요일과 일요일은 항상 연휴였다. 연휴가 나자 김씨는 탄광 근교의 도시로 오랜만에 나들이 시간을 가졌다.
이곳 저곳 구경을 하다 김씨는 6층 건물의 한 백화점을 들어가게 되었다.
6층에 올라가 차례차례 아래층으로 내려온 김씨는 1층 카메라 코너에 발길을 멈췄다. 고향에서 친구와 선배들이 그렇게 탐내던 멋진 독일제 카메라가 그의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메라 1대 가격은 선산부 1개월 월급인 2000마르크(45만 원)에 달하는 것으로 본 김씨는 구입할 엄두를 못 내고 침만 삼켜야 했다.
이런 와중에 김씨는 “옛날 솜씨를 한 번만 발휘하자, 까짓거 우리나라 물건도 아니고 카메라도 외화획득이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윽고 김씨는 물건을 고르는 척하다가 카메라 1대를 훔쳤다.
그러나 부피가 큰 카메라는 판매원의 눈에 들키게 되었고 김씨는 현행 절도범으로 곧장 경찰에 넘겨졌다.
독일어가 서툰 김씨는 손짓 발짓을 다 동원해 사정을 하며 카메라를 훔친 것이 아니라고 항변했으나 아무리 신사적인 독일인들이지만 남의 물건을 훔친 이방인을 용서하지 않았다.
경찰은 딘서라겐지역의 한인회에 연락을 하고 한국에 강제추방을 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당시 파독광부 가운데 술을 마시고 고성방가를 하거나 대로변에서 노상방뇨를 하다가 망신을 당하는 일은 있었지만 절도범으로 경찰에 붙잡힌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국인에 대한 망신도 망신이지만 같은 파독광부 입장에서 김씨의 강제 출국을 그대로 지켜볼 수만은 없는게 한인회의 입장이었다.
이때 김진태 한인회장이 묘안을 짜냈다.
김 회장은 경찰관에게 강한 어조로 말했다.
“아랍에서는 절도범에게 손목을 절단시키는 형벌을 주는데 한국에서는 주민들이 단체로 죄인을 몰고가 강물에 스스로 빠져 죽도록 한다. 그러니 우리 방식대로 저 절도범을 처분할 수 있도록 해달라.”
경찰관에게 승낙을 받은 김 회장은 교민회에 연락해 기숙사에 남은 파독광부 10여 명을 경찰서로 오게 했다.
그런 다음 김 회장은 파독광부 10여 명과 함께 절도범인 김씨를 앞세우고 라인강으로 몰고 갔다. 경찰서에서 시내를 지나 라인강으로 가는 길은 2키로미터 정도였다.
살기등등한 한인회원 10여 명이 절도범 김씨를 강물에 빠져 죽게 하기 위해 라인강으로 행진하자 독일 경찰은 비상이 걸렸다.
한국의 절도범 처벌방식이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한 독일 경찰관은 말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방관하다가는 생사람을 잡을 것 같아 안전부절했다.
독일경찰은 한인회의 행진대열 상공에 경찰헬기를 띄우고 경찰 순찰차 3대를 따라 붙게 했다.
라인강이 가까워오자 다급해진 건 파독광부가 아니라 독일 경찰이었다. 다급해진 경찰간부가 김회장을 붙잡았다.
“우리가 절도범을 용서해 주겠으니 강물에 빠져 죽지 않게 해달라”
한인회가 사정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경찰이 사정하는 처지로 입장이 바뀐 것이다.
그러나 독일인의 사고방식과 습성을 잘 아는 김회장은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절도범은 용서를 못한다”고 단호하게 잘랐다.
그러자 더욱 다급해진 경찰간부는 안절부절하는 모습으로 김회장에게 말했다.
“강제 귀국도 시키지 않을테니 한인회에서 잘 처리하고 죽음의 행진만은 멈춰 달라. 그리고 즉시 한인회로 돌아가도 좋다.”
계획한데로 일이 잘 풀리자 김 회장은 못이기는 척하며 ‘죽음의 행진’을 멈췄다.
그리고 김회장은 절도범 김씨에게 다시는 물건을 훔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사건을 아무 탈 없이 마무리 했다.
절도범으로 붙잡혀 강제 귀국 위기에 놓였다가 한인회 김진태 회장의 재치 있는 기지로 강제귀국과 처벌을 면하게 된 김씨는 그 뒤로는 절대로 남의 물건을 훔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이윽고 1년이 지나 3년 계약기간이 마무리될 기기가 되자 광업소 관리자가 김씨를 불렀다.
“1년 전의 절도죄 때문에 당신에 나라에 귀국하게 되면 강물에 빠져 죽게 하느냐?”
독일인들이 무척이나 순진하다고 생각한 김씨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답변했다.
“그렇다. 지금 귀국하면 죽게 된다. 그러니 2년만 더 근무하도록 해달라. 부탁한다.”
그러자 신사적인 독일관리자는 “알았다”하며 2년간 김씨의 근무를 연장시켜 줬다.
김씨는 아이러니하게도 ‘절도죄’ 때문에 기본 계약기간 3년 외에 2년을 더 근무한 뒤 목돈을 쥐고 귀국할 수 있었다.
그런 김씨가 귀국 10개월 여 만에 다시 독일에서 물건을 훔치다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
파독광부를 마치고 귀국한 김씨는 탄을 캐는 광부 일 외에는 마땅한 기술도 없고 지하 막장에 더 이상 근무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김씨는 독일에서 번 돈으로 고향에 논을 사놓고 원양어선을 탔다.
그런데 원양어선을 승선한 김씨는 대서양에서 조업을 하다 20일간 스페인 바르셀로나 항구에 정박하게 되었다.
다른 원양어선 동료들은 스페인에서 휴가를 보내기로 했지만 김씨는 5년동안 정들었던 독일을 다시 찾고 싶었다.
열차를 타고 서독땅을 찾아가 김씨는 동료들도 만날 겸해서 딘서라게 탄광마을에 다시 ㅊ방문했다. 현장 지리를 잘아는 그는 딘서라겐에 도착하자 과거 일들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그는 과거 백화점에서 카메라를 훔치다가 붙잡힌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과거에는 치밀하지 못해 카메라를 훔치다 들켰지만 이번에는 내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자”
백화점 폐점시간 임박해 손님으로 가장해 화장실에 숨어든 김씨는 백화점 문을 닫은 뒤 카메라 대신 귀금속 코너에 들어가 값이 비싼 보석을 한 보따리 훔쳤다.
이어 모피옷까지 훔친 그는 당시 한국의 허술한 백화점으로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당시 독일 백화점은 CCTV를 설치한 것을 모른 그는 이를 지켜보던 백화점 경비원에게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다.
절도범으로 붙잡힌 그는 독일에서 절도죄로 1년을 복역한 뒤 강제귀국 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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