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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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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성자

[설악 무산 조오현 스님 한글 선시(禪詩)] 이·렇·게·읽·었·다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석가탄신일인 14일 강원 인제 백담사에서 설악 무산 조오현(법명 무산·霧山) 큰스님의 시 ‘아득한 성자’를 한 스님이 바라보고 있다. ⓒ프레시안(전형준)

고붕준 |물리학적인 시간으로 따져 묻는다면 ‘하루’와 ‘오늘’의 길이는 동일하다. 그러나 인간에게 ‘하루’는 숱한 날들 중의 일부분인 반면, 하루살이에게 ‘하루’는 삶의 전체이다.

인간이 일생을 통해 경험하는 모든 것을 하루살이는 단 하루에 경험하는 것이다. 시인은 “뜨는 해도 다 보고/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알을 까고 죽는 하루살이의 삶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살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비교한다.

삶을 다 살았다는 판단에서 알을 까고 죽는 하루살이와 달리 숱한 시간을 살아도 여전히 하루도 산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의 선명한 대조, 그것이 이 시의 인식론을 떠받치고 있음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은 하루살이라는 유한자의 운명에서 인생무상이 아니라 ‘성자’의 형상을 발견한다. 그것은 일출과 일몰이라는 자연의 현상이 우주의 창조와 소멸을 의미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고 했던가.

이 ‘하루’라는 짧은 시간 속에 삼라만상의 생성과 소멸이 들어 있다는 깨달음은 찰나, 즉 하루가 영겁이라는 불교의 가르침과 무관하지 않다.

말하자면 인간의 시간에서 ‘하루’는 현재에 불과하지만, 화엄의 시간에서 ‘하루’는 과거-현재-미래가 내속하고 회통하는 찰나(刹那)의 시간이다.

시인은 하루살이의 죽음에서 그 찰나의 시간을 보고, 거기에 비추어 자신을 성찰한다. 그러므로 5연에서 천년을 사는 주체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

다만, 인간은 그 긴 시간을 살면서도 하루도 살지 못했다는 느낌을 갖지만, 하루살이는 ‘하루’라는 찰나에서 천년 이상의 시간을 살기에 ‘성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루살이의 몫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머리’를 움직이게 하는, 머리와 몸이 결국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시의 미덕은 아닐까.

▲출처 『애지』 「동문서답으로서의 시」 에서 발췌 2007 겨울호 <고봉준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권성훈

김남조 |지용회의 이근배 회장이 외국여행으로 부득이한 위임을 전해 와서 고은, 김윤식, 김재홍 선생 등과 본인이 심사의 서탁에 둘러앉았었다.


수상후보로 자료가 넘어온 시인은 모두 열 사람이었는데 이 중에서 1차 네 분을 취하였고, 토의 진행하여 조오현 시조시인에게 낙점의 일치를 얻게 되었다.


이 분은 시인이자 승려이며 그의 작품 성향은 관조와 달관 쪽에 기울고 있다. 다른 말로 침잠과 일탈이 주조를 이룬다 하겠는바 그것이 위계가 매우 치솟아 있어 압도적인 수가 흔히 있을 것 같다.

근래엔 발표작품이 많고 타 잡지에 접한 그의 특집류와 최근에 출시된 신작시집의 중후한 성과가 그의 수상을 더욱 든든하게 해준다 하겠다.


그의 시공부를 도와준 시의 스승은 없다. 그러나 삼라만상의 그 모든 것이 스승이고 동문임이 틀림없다. ‘산색은 그대로가 법신(法身)이며 물소리는 그대로가 설법’이라는 등의 설파를 그의 작품과 언행에서 읽게 됨이 바로 그 점일 터이다.

수상작인『아득한 성자』에 있어선 하루가 전생(全生)인 하루살이가 ‘뜨는 해와 지는 해를 보았기에 더 이상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짧은 생애의 풍요로운 충족을 읊고 있어 충격적이고 시의 지평 확대를 아니 지적할 수 없다.


칠순의 중간쯤 연령인 이 분이 후줄근한 승복차림으로(도저히 도망칠 출구도 없어서) 거북하고도 수줍음을 타면서 무대에 올라 상을 받을 때 이 광경을 보게 될 우리는 뭔가 참으로 숙연할 것이라고 미리 그 감개가 예상된다.

삶 안에서 지금까지 너무나도 여러 가지를 포기해 오긴 했으되 남은 여생에 있어 불자의 정진과 함께 시 쓰는 일만은 결코 내려놓지 마십사는 한마디를 이 지면의 말미에 적어 오현스님께 당부하고자 한다.

▲출처 『시와시학』, 「침잠과 일탈」, 제19회 정지용문학상 심사평, 2007. 여름 <김남조 시인,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권성훈

조오현 스님은 만해사상실천선양회를 설립 ‘만해대상’과 ‘만해축전’을 만들었다. 1966년 등단한 이후 시조에 불교의 선적 깨달음을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현대시조문학상과 가람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 문학상과 국민훈장 동백장, 조계종 포교대상, DMZ평화상 등을 수상했다.

1959년 출가해 직지사에서 성준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으며 1968년 범어사에서 석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계림사, 해운사, 봉정사, 신흥사 주지 및 제8·11대 중앙종회 의원을 역임, 지난 4월 조계종 최고 품계인 ‘대종사(大宗師)’ 법계(法階)를 받았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종립 기본선원 조실로 원로회의 의원을 맡고 있으며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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