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 최순실 씨가 개입했는지를 놓고 논란이 뜨겁다. 당시 두 회사의 합병은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손해였다. 이는 삼성물산 대주주인 국민연금의 손해이며, 결국 국민 노후 자금의 위기가 된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증. 최순실 씨가 없었다면, 삼성물산에게 불리했던 지난해 합병은 무산됐을까. 최 씨가 없었다면, 국민연금은 합병에 반대했을까.
언론 보도 및 여론의 관심이 최 씨의 전횡에만 맞춰져 있다. 하지만 지난해 합병 전후 상황을 돌아보면, 삼성은 다른 경로를 통해서도 국민연금에 로비를 한 정황이 있었다.
최순실과 관계 없는 '삼성 장학생'은 무죄인가?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 번째, 최순실 씨 비리에만 주목하면, 다른 경로로 삼성과 결탁했던 이들이 면죄부를 얻는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수사가 최 씨와 무관한 삼성 장학생들에겐 면죄부를 주는 계기가 된다면, 위험한 일이다. 최 씨를 거치지 않고 삼성과 결탁했던 이들에겐 이번 수사가 '꼬리 자르기'일 수 있다.
두 번째, 국민연금은 민감한 결정에 앞서 '의결권 행사 전문위원회'를 열도록 돼 있다. 지난해 합병 관련 결정을 앞두고는, 전문위원회가 열리지 않았다. 최 씨의 압력이 있었다는 점이 이 같은 내부 규정을 위반한 책임을 덜어주지는 않는다. 부당한 외압을 견뎌내는 것 역시 연금 관리자의 의무다.
홍완선 전 기금운용본부장의 역할
이와 관련해, 경제개혁연대가 23일 논평을 냈다. 경제개혁연대는 홍완선 전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 본부장(현 한양대학교 특훈교수)의 역할에 주목했다.
국민연금 내부 규정에 따르면, "찬성 또는 반대를 결정하기 곤란한 안건"은 전문위원회에 회부하도록 돼 있다. 그러니까 투자위원회가 자체 결정을 할지, 아니면 전문위원회에 회부할지를 먼저 정해야 한다.
하지만 지난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안건에 대해선 먼저 투자위원회에서 논의해 보고 결론이 나지 않을 경우에만 전문위원회에 회부하기로 했다. 당시 주요 의결권 자문기관들이 대부분 합병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었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역시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에 반대하라"는 보고서를 국민연금에 제출했었다. 전문위원회가 열린다면, 이런 입장을 무시할 수 없다. 투자위원회에서 먼저 논의한다는 결정은 결국 전문위원회 회부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는 지적이 지난해부터 나왔었다.
지난해 합병 당시, 이런 결정을 누가 주도했나. 홍완선 전 기금운용본부장이다. 투자위원회는 당연직인 기금운용본부장 및 8개 부서 실장과 본부장이 지명하는 3인 이내의 팀장 등 총 12인 이내에서 구성된다. 외부전문가가 참가하는 전문위원회와 달리, 투자위원회는 기금운용본부장이 사실상 완전히 장악하는 구조다. 홍 전 본부장에게 로비를 하면, 국민연금 투자위원회를 통째로 움직일 수 있었다.
경제개혁연대는 최순실 씨의 개입 여부보다 홍 전 본부장이 권한 남용을 했는지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주장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이 내부 규정 및 관행을 깨고 중요한 결정을 한 사례를 그냥 넘어가면, 비슷한 일이 또 생길 수 있다. 박근혜 정부가 끝나고, 최순실 씨가 공적 영역에서 사라진 뒤에도, 삼성 등 재벌은 계속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이들 재벌은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 개인에게 로비를 해서 국민연금을 통째로 움직이려 할 수 있다. 이런 시도를 막으려면, 지금 홍 전 본부장의 권한 남용 여부에 대해 제대로 수사해야 한다. 그게 최순실 씨의 개입 여부보다 중요한 문제라는 게 경제개혁연대의 입장이다.
홍완선, 이재용을 따로 만났다
홍 전 본부장은 의결권 행사 결정을 앞두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및 삼성 미래전략실 수뇌부를 따로 만났었다. 지난해 국정 감사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국민연금이 지난해 합병 관련 안건을 전문위원회에 회부하지 않기로 한 방침에 대해 경제개혁연대는 "삼성의 로비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런 '로비'는 다양한 경로로 시도됐다.
최순실 씨를 매개로 삼은 로비 경로에만 주목하는 게 위험한 이유다. 이런 프레임에선 검찰 혹은 특검이 최 씨가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에 대해 압력을 넣은 증거를 찾지 못한다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 정당성을 얻게 된다. 그건 잘못이다. 홍 전 본부장에게 접근했던 이들은 다양했다.
홍 전 본부장은 지난해 이재용 부회장과 만난 자리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나. 이 대목을 캐야 한다.
국민연금 투자위원회의 오류, 삼성 로비 때문인가?
지난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안건 때문에 열린 국민연금 투자위원회는 논의 내용에도 오류가 있었다.
당시 투자위원회는 국민연금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지분을 거의 같은 금액으로 보유하고 있다고 했었다. 따라서 합병으로 인해 삼성물산 지분 가치가 훼손돼도, 제일모직 지분 가치 상승으로 상쇄할 수 있다고 주장했었다. 사실 관계가 틀렸다. 국민연금은 삼성물산 지분을 더 많이 갖고 있었다.
또 당시 투자위원회의 논리대로라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공고 이후에 국민연금은 제일모직 주식을 더 사들여야 했다. 하지만 국민연금의 행보는 반대였다. 삼성물산 주식을 사들였다.
중요한 결정에 앞서 기초적인 사실관계와 논리 전개마저 왜곡한 당사자가 누구인가. 그는 왜 그랬나. 실무자의 착오였나. 아니면, 그 역시 삼성의 로비 때문인가. 역시 검찰, 혹은 특검이 밝혀내야 할 대목이다.
설령 최순실 개입 없었어도, 유죄다
경제개혁연대는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으로 시작된 삼성 특검이 결국 삼성에 면죄부를 주고 끝났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2008년 주로 활동한 삼성 특검이 삼성의 다양한 비리 정황 가운데 일부만 골라서 수사한 뒤 전체에 대해 면죄부를 줬던 걸 가리킨다.
최순실 씨의 개입 여부에만 초점을 맞춘 수사 프레임이 자칫 '최순실이 개입했으니까 유죄, 최순실이 개입하지 않았으니까 무죄'라는 결과로 이어지면 안 된다는 이야기다. "모든 게 최순실 때문"이라는 논리는 위험하다는 것.
설령 최순실 씨가 개입하지 않았어도, 지난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안건에 대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잘못이었다. 그리고 삼성은 이런 결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불법 로비를 한 정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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