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혹은 그나마 다행스럽게, 아니면 참담하게도 박근혜 씨가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형법상 피의자 신분이 됐다.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한 검찰이 온 나라를 끔찍한 혼란으로 몰아넣은 박 씨를 '공범'으로 지목하기에 이른 것은 늦었지만 사필귀정이다. 이렇게 받아들인다면 세상물정 모른다는 소리를 들을 테다. 박 씨를 '공범'으로 지목함으로써 이른 바 '최순실 게이트'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더 정확하게 '박근혜 게이트'로 규정한 검찰의 행위 자체가 권력 향배의 잣대이다. 국민에겐 매우 불행하게도 검찰은 시시비비를 판단하는 기관이 아니라, 권력의 첨병이자 호위무사에 불과하다. 그것도 항상 최고권력에만 빌붙는다. 상처를 입거나 몰락하는 권력에는 하루아침에 낯을 바꾸어 언제든지 이빨을 드러내어 물 수 있다. 검찰이 박근혜를 피의자로 선언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사실상 박근혜의 실각을 뜻한다.
박근혜 씨로서는 검찰의 태도를 보며 잠시 우병우 전 정무수석을 그리워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과거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 사후 돌변한 세상 인심을 떠올렸을 수도 있겠다. 박 씨가, 피의자로 입건되자마자 검찰 수사 거부 입장을 밝힌 것에서 드러나듯 별로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만 조만간 하야하든, 탄핵으로 쫓겨나든, 혹은 헌법재판소의 도움과 특유의 오기를 앞세워 엉망진창으로 임기를 채우든, 대통령으로서 말로는 아버지와 비슷하게 끝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자연인으로야 아버지처럼 비명횡사하지는 않겠지만, 권력자로서 종국은 아버지와 크게 달라지지 않을 전망이다.
나는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고 한 박정희와 그의 딸 박근혜의 가족사에서 권력의 정점에 도달한 인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어떤 신화적인 구성을 상상해 보았다. 단언하건대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아버지이다. 그것이 어떤 이들에겐 감내하기 힘든 사건이었지만, 또 다른 어떤 이들에겐 '거룩한 혈통'으로 간주되어 권좌에 오를 자격으로 통용되었다.
정조가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오르자 자신을 사도세자의 아들로 자리매김하였듯, 박근혜 또한 기나긴 고통의 날을 지나 "아버지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father)" 대통령에 당선되자 명실상부하게 박정희의 딸이 되었다. 정조와 미세하게 엇갈리는 지점은 정조가 사도세자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왕이 되었으나,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이기에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최순실 또한 "아버지의 이름으로" 대통령 박근혜의 '비선'이 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에게 최태민이란 아버지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신화소(神話素)로서 '부친 살해' 또한 공통적이지만 마찬가지로 작동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평생 부채의식을 지녔다. 할아버지인 영조가 아버지 이선(李愃)을 죽인 데는 손자인 자신의 존재가 한몫을 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조는 자신의 존재가 영조의 결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기에, 즉 영조로 하여금 아들을 없애도 왕위를 계승할 대안인 손자가 있다는 인식을 가능케 했기에, 운명적으로 부친 살해를 모면하지 못한다. 그러나 박근혜는 자신의 존재가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되지 않는다. 오히려 (박근혜가 보기에) 억울하게 살해된 부친을, 자신이 대통령이 됨으로써 되살려내는 '부친 부활'의 효녀가 된다. 정조는 불효를 원죄로 이고 살아야 했지만, 박근혜는 (자기 입장에서) 불쌍하게 숨진 아버지 원혼의 해원을 성취한 효행을 자랑할 수 있었다. 광화문에 박정희 동상을 세우네 마네 한 불과 얼마 전까지 그랬다.
그러나 이제 박근혜는 부친 살해의 대열에 동참한다. 정조가 불가항력적 운명에 의해 부친 살해의 업을 지은 반면 박근혜는 작의에 의해 자신이 부활시킨 지 얼마 안 된 아버지를 다시 죽이고 있다. 박정희의 딸로서 대통령이 된 사람이 범죄를 저질러 대통령직에서 퇴진하게 된다면, 그것은 딸인 박근혜의 비극일 뿐 아니라 아버지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사망선고일 수 있다. 나아가 만일 마땅히 퇴진해야 할 상황에서 지금처럼 퇴진하지 않고 거짓말과 변명, 그리고 사술을 동원해 자리보전에 부질없이 힘쓴다면 그것은 딸인 박근혜에게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될뿐더러 아버지 박정희에겐 사망선고를 넘어서 역사적 부관참시가 될 수 있다. 박정희는 자신의 무덤에 침을 뱉으라고 하며 후대의 평가를 기약했지만, 자신의 딸에 의해 무덤 자체가 헐리는 비운을 사후에 맞고 있다. 총에 맞아 사망하고, 세월이 흘러 딸에 의해 무덤이 헐리고 시신이 훼손당하는 암담한 상황에 처한 걸, 그러나 망자라서 알 수 없는 걸 위안으로 삼아야 하나.
찾자면 신화소는 더 발견된다. 그리스 신화 속 인물 오이디푸스에게 주어진 부친 살해와 근친상간의 신탁은 박근혜에게 재현된다.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어머니의 뒤를 이어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수행한 것이나 현재 아버지의 무덤을 파헤치는 모습이나 모두 오이디푸스의 저주와 흡사하다. 그러나 박근혜는 정조와 달랐듯 오이디푸스와도 다르다. 신탁은 동일했지만, 인간으로서 대처는 판이했다. 자신에게 내린 저주를 풀고자 노력했지만 결국 신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제 눈을 파버리고 테베의 왕위를 버린 채 방랑길에 올랐다. 오이디푸스가 영웅적인 인물로 추앙받는 건 불가항력의 운명에서도 가장 처절한 방식의 참회를 택함으로써 인간적 존엄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가 아닌 한국의, 고대가 아닌 현대의 박근혜 씨는 어떠한가?
부친 살해는 박근혜 씨에게 씻을 수 없는 회한이 될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신탁이 아니라 자신의 작의적 비행에 의해 실행되었기에 박 씨의 여생에 남겨질 비통함은 형언하기 힘들어 보인다. 피의자 신분에서 아마도 멀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에 수감자 신분을 거쳐 나중에 대를 이은 대통령이자 부친 살해자로 기억될 박 씨. 박 씨 부녀의 이야기는 숭고함과 존엄이 소거된 현대사의 신화로 확고하게 전승될 터인데, 이때 신화의 주인공은 박정희가 아니라 박근혜가 될 것이다. 그리스신화에서 주인공이 아버지 라이오스가 아니라 아들 오이디푸스이듯이 말이다. 동시에 박 씨 부녀의 신화는 사상 유례가 없는 추악한 기록으로 남겨질 운명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게, 박근혜는 없고 박정희의 딸로만 존재한 박근혜에게 주어진 신탁이었을까. 그로 인해 앞으로의 역사에서 박정희는 사라지고 박근혜만 남게 될 게 박정희에게 주어진 저주였을까.
다만 신탁은 신탁이고, 아직 인간적이고 주체적인 선택의 길은 열려있다. 추락은 불가피하지만 추락의 깊이는 덜 수 있다. 덜 상처 입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박근혜 씨가 스스로 인간으로서 마지막 존엄을 입증하는 일이 아닐까. 박 씨의 '존엄한 퇴진'만이 박 씨의 아버지와 박 씨에게 한 표를 행사한 사람들을 포함한 전체 국민의 존엄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도이다. 그러나 박 씨는 지금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고 한 부친의 유지를 곱씹을 때에, 오히려 국민들에게 침을 뱉고 있다.
(안치용 교수는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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