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는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짧은 소설에서 사람의 욕망에 관해 묻는다. 주인공 바흠은 "나도 저 사람들처럼 땅을 살 수만 있다면 지금보다 한결 형편이 나아질 텐데"라고 믿으며, 더 많은 땅을 가지려고 욕심을 부린다. 하지만 결국 그가 가진 땅은 자신이 묻힌 2미터(m)의 구덩이에 불과했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땅이 늘어나면 더 많이 일해야 하는데, 왜?'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바흠에게 땅을 주려던 바시키르 인들처럼 즐기며 살면 안 되나?
일하지 않고도 살 수 있다면?
케이시 윅스는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제현주 옮김, 동녘 펴냄)에서 우리가 "의무로서의 일, 시스템으로서의 일, 삶의 방식으로서의 일보다는 특정한 일자리, 혹은 일자리 부족에 초점"(14쪽)을 맞추곤 한다고 지적한다. 즉 다들 열심히 일하는데 정작 그 일이 왜, 어떻게, 얼마나 주어지는지에 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마치 일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처럼 우리는 일한다는 것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런 자연스러움을 통해 "오늘날 신자유주의와 포스트신자유주의 체제는 거의 모든 사람이 임금을 벌기 위해 일해야 한다고 주장하며(모두에게 돌아갈 만큼 일이 충분히 많지 않다는 점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탈산업화된 생산양식은 노동자의 손뿐 아니라 머리와 가슴을 필요로 한다."(57쪽) 일은 우리 몸에서 마음으로 깊숙이 침투하고 있고, '먹고사니즘'(경제적으로 이득이라면 다른 것들을 모두 무시해도 좋다는 생각)은 우리를, 식욕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한 좀비처럼 만들고 있다.
우리는 강력한 노동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 삶은 노동윤리의 정서와 언어에 얽매여 있기에 보수든 진보든 더 오래,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주장에 토를 달지 않는다. 외려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이나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은 정말 휴일도 없이 더 오래 열심히 일한다. 그러니 '무노동무임금'은 불변의 기준이고,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아야 한다.
그런데 케이시 윅스는 과감하게도 '노동 거부'라는 개념을 들이대면서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요즘 한국 사회에서도 조금씩 논의되고 있는, 조건 없는 기본소득과 임금 감축 없는 주 30시간 노동이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좋은 이야기라면서 머리는 끄덕이는데, 머릿속에는 '소는 누가 키우노?'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일하지 않는데 왜 돈을 줘? 윅스는 일이 제약하는 정치적인 상상을 위해, 자유를 위해, 삶을 누리기 위해라고 답한다. 기본소득은 실업자나 불완전 고용 상태의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자원을 제공한다.
"무슨 일은 돈을 받고 무슨 일은 받지 못하는지가 점점 더 무작위하게 보일 때, 그리고 풀타임의 평생에 걸친 안정적 일자리 모델을 사회 규범으로 여기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지고 일에 기초한 혜택을 얻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질 때, 수입의 기본수준을 보장하는 것은 소득을 분배하는 훨씬 합리적인 방법을 제공해 준다."(233쪽)
일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면 임금을 받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일의 성격 자체가 바뀐다. 그리고 노동시간이 단축되면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하고 싶은 일에 그 시간을 쓸 수 있다. 이 얼마나 급진적인 주장인가?
그리고 이렇게 삶이 바뀌면 지금 이 시간을 느끼는 우리의 감각도 달라진다. 미래가 아니라 현재가 더 중요해진다. 윅스는 이제 삶을 즐길 때라며 '일에 맞선 삶'을 제안한다. 매혹적인 제안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머뭇거린다. 노동 중심의 사유가 문제인데, 그래도 일을 안 하면 어떻게 하나, 모두가 놀면 누가 재원을 마련하나라며 우리는 거국적인 차원의 걱정을 시작한다. 우리 삶에서 일이 빠져 버린 그 여백을 너무 두려워한다. 하지만 정말 일이 빠지면 삶이 망할까?
산문이 있는 삶
한때 '저녁이 있는 삶'이란 말이 회자되었다. 여가가 있는 삶을 뜻하는 좋은 취지로 사용되었지만 노동과 쉼의 경계가 분명한 근대적인 삶을 뜻하기도 한다. 한때 유행한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카드회사 광고 문구가 의미하는 것처럼 마치 저녁은 열심히 일한 자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처럼 비치기도 한다. 우리는 항상 이렇게 살았을까?
영미권 작가들의 산문을 모은 <천천히, 스미는>(박지홍 옮김, 봄날의책 펴냄)에서 근대적인 삶이 보편화되기 이전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 조지 오웰, 오스카 와일드, 찰스 디킨스 등 유명한 작가들의 짧고 좋은 산문들이 담겨 있는데, 저녁이 있는 삶은 제임스 에이지의 '녹스빌: 1915년 여름'이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저녁 식사를 마친 가족이 밤 시간을 보내는 과정이 잔잔하게 묘사된다(남녀의 분명한 성 역할이 눈에 거슬리긴 하지만). 특별하지도 않고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 느리게 묘사된다. 우리가 싫어서 이런 삶을 떠난 걸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온갖 베스트셀러에 밀려서 시와 산문이 우리 삶에서 사라졌듯이, 우리도 세상에 밀려 일이 아닌 삶을 잊어 간다.
앞서 윅스의 말처럼 일이 삶의 한 방식일 뿐이라면 지나친 노동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단순히 일을 하지 않거나 일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조지 오웰은 '두꺼비에 대한 몇 가지 생각'에서 이렇게 묻는다.
"돌아오는 봄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 노동이 절감된 유토피아에서 행복할 이유가 있을까? 그 사람은 기계 덕택에 생긴 여가 시간에 무얼 할까? 우리가 고심하는 정치 사회 문제들이 정말 해결된다면 삶이 더 복잡해지지 않고 더 단순해지지 않을까 싶다. 첫 앵초꽃을 보고 느끼는 즐거움이 윌리처 주크박스의 노래를 들으며 아이스크림을 먹는 즐거움보다 더 크게 느껴질 것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 사랑했던 나무와 물고기, 나비 그리고 (…) 두꺼비 같은 것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다면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미래가 조금 더 가능해질 것이며, 강철과 콘크리트만 떠받들라고 가르친다면 우리 인류는 남아도는 에너지를 서로 증오하고 지도자를 숭배하는 일에 쏟아붓게 되리라 나는 믿는다."(99쪽)
나도 그렇게 믿는다. 그 첫걸음은 세상에 관한 짧은 기록인 산문을 읽는 것일지도….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