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어 보인다. 누구는 그것을 혁명이라고, 누구는 저항이라고 하며, 혹은 불복종이라고도 한다. 시작 지점에서 끝을 얘기하는 건 무의미하다. 끝의 모양은 끝을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확실히 해야 하고, 할 수도 있는 일은 바로 '시작'이다.
지난 5일 서울 광화문 촛불 집회에는 민의가 분출됐다. 그곳에 모인 20만 혹은 30만 개 촛불의 의미는, 어떠한 왜곡이 불가능할 만큼 자명하다. 한 마디로 부패한 정권을 퇴진시키고 민주주의를 복원해야 한다는 시대정신이다. 그 시대정신이 변화를 이끌고 있다. 그날 집회에 깜짝 등장한 도올 김용옥 한신대학교 석좌교수가 "우리는 혁명을 해야 해"라고 말했는데, 부연하자면 이 혁명의 성격이 어떻게 규정되고 어떻게 흘러갈지를 지금으로서야 짐작할 수 없지만, 바야흐로 혁명이 시작되고 있으며 우리 모두가 그 혁명에 동참하라는 시대적 요구에 직면해 있음은 정언명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명한 시대정신이 자명한 변화를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당장 지금도 시대정신을 거스르는 불쾌한 움직임이 도처에서 목격된다. 최순실 씨와 그 일당의 파렴치는 이미 논외다. 절차를 빼곤 사실상 탄핵당한 대통령인 박근혜 씨와 함께 과도적 권력 분점을 도모하는 야당의 행태는 불쾌를 넘어 추악하다.
박근혜 씨의 임기 중 대통령직 사퇴가 헌정 중단을 의미하지 않고, 반대로 내용상 이미 탄핵당한 박근혜 씨가 대통령직을 유지하는 상황이 헌정 중단임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지적된 바이다. 이 같은 헌정 중단을 해결할 유일한 방책은 박근혜 씨가 아무런 조건 없이 즉각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것 외에는 없다. 현재 대한민국은 주권자인 국민에 의해 대통령이 해임되었으나, 해임된 대통령이 부당하게 대통령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예외 상태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실권된 대통령에게 명시적으로 실권을 선언하고 강제함으로써 이러한 예외 상태의 해소를 모색해야 할 야당이 오히려 실권된 대통령과 모종의 협치를 모색하는 사태는 납득하기 힘들다. 극언하면 예외 상태에서 주권자를 자임하려는 요즘 야당의 모습은 쿠데타적 행태에 가깝다.
부패 정권의 주구 노릇을 한 새누리당의 정진석 원내대표는 최근 '박근혜 이후'에 관하여 자주 언급한다. 대표적으로 "박 대통령이 하야하면 법적으로 지방자치단체장들은 아예 대선에 출마 못한다. 그러면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나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 밖에 출마 못한다"는 발언이나 "(그가 지지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병든 보수의 메시아'는 결코 되지 않을 것"이라는 발언을 들 수 있다.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문·안 외의 다른 야당 대선 후보까지 걱정해주는 '대승적 자세'에서 공교롭게도 우리는 현재를 예외 상태로 받아들이는 정진석 대표의 숨겨진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정 원내대표나 문재인 더민주당 전 대표를 포함한 야당 지도자들의 이심전심한 공통 이해는, 실권된 대통령을 식물 권력으로 남겨둔 채 주권(혹은 통치권)을 의회 권력이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을 회피하여 그들만의 리그를 보호하겠다는 속내다. 분명 반대 상황임을 전제하고 얘기하자면, 사망을 선언했어야 할 백남기 농민에게 반대로 연명치료를 시행한 그의 주치의 백선하 서울대 병원 신경외과 교수가 한 일을 여야 정치인들이, 국회가 하고 있다.
정치학 고전 <정치신학>의 저자 칼 슈미트는 "주권자란 예외 상태를 결정하는 자"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독재 옹호의 논리로 차용되기도 하였지만 이 말은 주권에 관한 심오한 함축을 담고 있다. 주권자가 예외 상태를 결정한다는 말은 여러 모로 해석될 여지를 갖지만, '예외 상태'에 관한 한 작금의 한국 정치상황 만큼 예외적인 상태의 표준 예를 찾기는 어렵지 않을까. (국민에 의해) 대통령이 사실상 탄핵당했으나, 물러나는 대신 국무총리와 비서실장을 지명하고 국회와 권력 행사 방식에 관해 논의하는 기이한 상황이니 말이다.
대통령의 사퇴(혹은 하야)나 탄핵은 헌법적 상황이지 예외적 상태가 아니다. 헌법은 탄핵의 요건을 규정하였고, 사퇴 이후 절차를 적시하였다. 따라서 재삼 강조하거니와 부패 등의 이유로 국민에 의해 실질적으로 탄핵 당한 대통령이 사퇴하기는커녕 공무원을 임명하고 국회와 향후 권력 구조를 논의하는 현재가 헌법적 상황에서 벗어나 있다. 어쩌면 앞서 거론한 쿠데타적 상황이란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절차'상의 미비를 이유로 국민에 의한 실질적인 탄핵에 이의를 제기한다면 우리는 헌법을 들이댈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른바 주권재민으로, 대한민국의 주권자는 국민이다. 전례 없는 예외 상태에 처하여 지금은 국민이 직접 주권을 행사하는 국면이다. 어쩌면 예외 상태를 결정하는 것도 주권자이고, 예외 상태의 해소를 결정하는 것도 주권자이다. 주권자인 국민이 너무나 분명하게 박근혜 씨를 (형식이 아닌 내용으로, 또한 헌법정신에 의거하여) 탄핵하였고, 국민의 뜻을 받아들여 그가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면 예외 상태는 발발하지 않았다. 박 씨에 의한 헌정 중단을 국민은 예외 상태로 간주(혹은 결정)하였고, 헌정 회복을 위해 직접 주권을 행사하러 거리에 나선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지금 국회에 의한 탄핵은 무의미하다. 이미 주권자가 탄핵한 대통령을 주권자로부터 권한을 위임 받은 대리 권력이 다시 탄핵하는 이중 탄핵은 주권자가 직접 나선 마당에는 불필요하지 않은가. 주권자의 명령에 따라 박근혜 씨가 대통령 자리에서 즉각 내려오는 것만이 헌정 중단 기간을 단축하는 유일한 방도이며, 국회는 국민의 대리인 행세는 그만 두고 이제 국민의 일원으로서 함께 하야 명령을 내려야 한다. 만일 박 씨가 명령을 듣지 않는다면 의회 권력이나 다른 어떠한 대리인의 힘을 빌리지 말고 국민이 직접 끌어내려야 한다.
결론을 내자. 혁명이든 저항이든 그 무엇이든, 시작은 박근혜 씨의 조건 없는 즉각적인 사임이다. '박근혜 이후'를 분명 누군가는 준비하고 대비하여야 하겠지만, 정말로 박근혜 씨가 물러나기 전까지 '박근혜 이후'라는 의제는 주권자의 주권 행사 테이블에 올리지 말아야 한다. '박근혜 이후'는 역사가 감당케 하고 지금은 '박근혜 이전'과 '박근혜 자체'에 전념해야 할 때다.
(안치용 씨는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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