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경제다. 사이비 교주 최태민 씨 일가가 저지른 엽기적인 비리가 정치에 이어 경제까지 흔들고 있다.
2일 코스피(종합주가지수)는 전날보다 28.45p(1.42%) 내린 1978.94으로 마감했다. 코스피가 1980선을 밑돈 것은 지난 7월 8일 이후 넉 달 만이다. 이른바 '공포 지수'로 불리는 코스피200 변동성 지수(VKOSPI)는 전 거래일보다 16.63% 급등한 17.25로 장을 마감했다. VKOSPI는 코스피가 급락할 때 급등한다. 그래서 증시의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지표로 쓰인다.
원화 가치도 떨어졌다. 달러/원 환율 역시 넉 달 만에 1150원에 육박했다. 전날보다 9.9원 오른 1149.8원을 기록했다.
최순실 비리, 미국 대선…금융 불안정 키웠다
대부분 국내외 정치 변수 때문이다. 최태민 씨의 딸 최순실 씨가 저지른 비리가 검찰에 의해 사실로 확인됐다. 검찰은 이날 최 씨의 구속영장을 법원에 청구했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이 유력하던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위태로워진 것도 한몫했다. 불확실성에 민감한 외환 시장에선 미국 달러화 선호가 높아졌다.
증권가에 따르면, 권력형 비리 때문에 코스피가 크게 흔들린 건 최근 십 수 년 동안 겪지 못했던 일이다. 한국 증시는 경제 외부 변수에 대해선 면역력이 강한 편이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천안함 사건, 연평도 포격, 김정일 사망 등 굵직한 사건들도 증시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었다. 뉴스가 발표된 직후 일시적으로 주가가 떨어져도, 곧 회복하곤 했다. 그래서 정치 및 안보 변수로 인해 주가가 흔들리면, 주식을 사들이는 이들도 있었다. 주식 가격이 금세 반등해서 수익을 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최순실 게이트'에서도 이런 공식이 통할지는 의문이다. 일단 사태가 불거진 직후부터 주가가 하락세였다. 또 단기간에 마무리될 사안도 아니며, 미래를 예측하기도 어렵다. 거의 모든 국내 대기업이 이 사건에 연루돼 있다는 점도 한 변수다. 최순실 씨가 설립을 주도한 미르·K스포츠 재단에 출연금을 낸 기업이 53곳이다.
최순실 충격, 상처는 곪아가는데 관료들은 손을 놓고 있다
결정적인 문제는 경제 사령탑 부재다. 민감한 정책에 대해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다. 올 상반기 경제 정책 관련 화두는 구조 조정 재원 확보 방안이었다. 지난 총선을 앞두고는 '한국판 양적 완화' 논란도 일었다. 현 정부는 증세처럼 정치적 부담이 큰 방법 대신 한국은행의 발권력에 기대는 쪽을 택했다. 재정 정책보다 통화 정책을 활용한 해법을 선호한 것이다. 이에 대해선 다양한 비판이 있다.
그런데 하반기 들어선, 이런 논란마저 사라졌다. 상처는 계속 곪아 가는데 관료들은 손을 놓고 있다. 자신들이 추진했던 정책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충격 때문이다. 정치 상황이 획기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이 상태는 이어질 전망이다.
삼성증권은 이날 보고서에서 "미국 대선 리스크 고조와 유가 하락으로 아시아 금융시장이 대거 요동쳤지만 상대적으로 원화가치 절하 폭이 큰 것을 보면 대내적인 정국 혼란의 영향도 있어 보인다"라고 밝혔다. 환율 등 경제 지표가 악화된 배경에 국내 정치 변수가 있다는 지적이다.
건설 투자만 늘었다…오래 못 간다
이런 상황에서도 경제가 유지되는 건, 건설 투자 때문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4개 분기 연속 0%대에 머물렀다. 하지만 올해 3분기 건설 투자 증가율은 2분기에 비해 3.9% 늘면서 GDP의 지출 부문에서 가장 높은 증가율을 나타냈다. 정부의 저금리·주택경기 활성화 대책 때문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역시 비슷한 분석을 했다. KDI 자료에 따르면 건설업체가 시공한 건설 실적을 의미하는 건설기성지표는 지난 8월에 지난해 같은 달 대비 23.6% 늘었다. 건설 수주는 지난해 같은 달 대비 무려 54.6% 증가했다. 반면 다른 경제 지표는 제자리걸음, 아니면 하락세다. 특히 제조업의 위축이 심각하다. 이는 한국이 경제 통계를 작성한 이래 처음 겪는 일이다.
건설 투자로 버티는 경제, 얼마나 갈까. 씨티은행은 건설 경기가 주도하는 성장은 미분양 주택이 증가와 함께 곧 한계에 부딪힐 것으로 내다봤다. 다른 경제 연구소도 비슷한 전망이다.
피할 수 없는 구조 조정, 혼란은 필연
이날 발표된 개각에서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기획재정부 장관에 내정된 것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임 내정자는 구조 조정 전문가이며, 건설 투자를 통한 경기 부양에 부정적인 입장이다. 그가 신임 경제 사령탑으로 내정된 건, 정부 역시 현 상황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걸 인정한다는 뜻이다.
경기 부양 없이 구조 조정을 해야 한다. 마취 없는 수술인 셈이다.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올 게다. 하지만 그걸 달래줄 정치 리더십은 기대할 수 없다. 고통스런 혼란이 예상된다. 권력형 비리에서 비롯된 경제적 혼란은 다시 정치 변수가 된다. 한마디로 악순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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