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지면 '퇴진'이라는 말도 모자란다. 지금 벌어지는 일에서 진퇴를 결정할 주체는 당사자인 대통령과 집권층이 아니다. 결단하거나 결심할 쪽은 그들이 아니라 주권자인 국민과 시민이다. 주권자는 '~되어야 한다'거나 '이루어져야 한다'는 식의 수동태로 말하지 않는다. 능동태로, 탄핵하거나 물러나게 하거나 소환하는 것이 마땅하다.
나라의 기본이 초라하게 무너졌으니, 우리 시민건강증진연구소인들 평소처럼 '시민'과 '건강 증진'과 '연구'에 매진하지 못하겠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허무와 냉소가 근거가 없지 않으니, 본업을 회복하기 위해서도 이 사태를 말할 수밖에 없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오래 의심하던 이 정권의 가치 지향과 일하는 방식, 실력이 드러난 것이 큰 의의다. 첫째, 박근혜 정권은 국가 시스템 그리고 국정 운영 시스템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완전하게 무너뜨렸다.
국가 운영과 국정은 시스템이라 할 것도 없다. 자격도 실력도 태도도 되어 있지 않은 자들이 국정을 맡아 어지럽혔으니 놀라움을 넘어 두렵다. 남북 문제, 사드 배치, 외교에도 끼어들었다는 소리가 그냥 농담인 것 같지 않다. 이 정도라도 사회가 돌아가는 것을 안도해야 할까 자부해야 할까.
방송이 보도한 최순실 파일 중에는 '130128고용 복지_업무 보고_참고 자료'라는 것이 있다. 이때(2013년 1월 28일)는 대통령 인수위 시기니 현 정권의 복지와 건강, 의료를 어떻게 할까 하는 기본 방침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정권은 이런 내용을 준비하면서 행정부도 정치권도, 그리고 시민 사회나 전문가도 아닌, 최순실에게 묻고 그와 협의했다. 이게 차마 나라인가?
돌아보면 비슷한 예가 수두룩하다. 불과 다섯 달 전의 스캔들인 대통령의 아프리카 순방과 코리아 에이드도 그중 하나다. 당시 우리는 코리아 에이드를 "권력의 사유화가 빚은 참사"로 규정하고, "국가와 공공 시스템의 작동이 아닌, 개인의 사적 선호와 관심, 그에 기초한 공적 결정이 초래한 사태"라고 해석했다. (☞관련 기사 : 대통령의 아프리카 순방, '코리아 에이드'의 정체) 그러지 않기를 바랐지만, 결국 코리아 에이드는 '국정 농단'으로 드러났다.
둘째, 국정이 무너진 가장 중요한 이유가 '사익' 때문이라는 것이다. 최순실과 그 주변 인물들이 추구하고 실제 실현한 이득은 명확하다. 예산을 어지럽히고 사사롭게 인사를 휘두른 일이 한둘인가. 최소한의 공적 가치와 합리성을 찾을 수 없다.
'선의'를 가졌으나 어쩌다 벌어진 일이 아니다. 대학 입학과 스포츠 경기, 각종 이권, 인사 개입, 청탁은 모두 사사로운 이득을 보려는 것이었다. 동계 올림픽의 이권을 챙기려고 했다는 보도까지 나오는 형편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다음 예는 지엽적인, 그러나 정말 꼼꼼한(!) 한 가지 사건일 뿐이다.
"광고 감독 차은택 씨와 밀접한 관계로 알려진 광고 기획사 '플레이그라운드 커뮤니케이션즈'(플레이그라운드)가 박근혜 대통령의 지난 5월 아프리카 순방을 앞두고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의 홍보 용역을 수의 계약으로 따낸 일이 13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 감사에서 도마 위에 올랐다. 야당은 "계약서 작성 전에 미리 업체를 선정해두고 수의 계약으로 구색만 맞춘 것 아니냐"고 의혹을 제기했다." (☞관련 기사 : 차은택 관련 업체 플레이그라운드>, 계약 전 미리 선정 특혜 의혹)
국가 기구와 정부, 행정까지 '사유화' 했으니, 그들이 금과옥조로 삼는 시장주의나 민영화가 이런 것인가 싶다. 장관과 청와대 수석비서관이 동원되어, (대통령 퇴임 후를 대비한 듯한) 민간 재단을 급조하고 약탈을 돕는 나라. 정치 후진국의 군벌이나 마피아 정치를 보는 듯 비현실적이지만, 박정희 시대와 닮았으니 역사적 현실일 수는 있겠다.
셋째, 또 다른 사익 집단들의 비호와 지원, 유착을 통해 이 정권을 유지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따위 국정을 몰랐을 리 없는 여당, 일부 관료, 재벌, 언론, 사이비 학자들이 짬짜미로 정권을 뒷받침했고 떡고물을 받아 챙겼다.
'사익 네트워크'는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하더라도 촘촘하고 튼튼하다. 최순실 씨의 딸을 중심으로 얼마나 다양한 이해 관계자가 등장하는가. 행정부와 관료, 기업, 대학, 교수, 정치인이 서로 얽혀 도움을 주고받는 것은 익숙하지만, 그 정도가 새삼 놀랍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것은 견제의 정치 시스템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형식적 견제 장치도 작동하지 않으니, 국회와 정당, 사법부, 심지어 형식적 관료제조차 이런 대통령과 정권을 막을 수 없(었)다.
주목할 것은 관료들의 완전한 '노예화'다. 최소한의 관료제적 합리성과 조직 문화도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전혀 '영혼'이 없는 완전한 복종 상태. 사고로 드러난 것을 제외하면, 단 한 명의 자발적 '내부 고발자'도 없었다는 점이 신기할 정도다.
이런 정권과 정부는 우연이기도 필연이기도 하다. 분명 예외성이 있지만, 한국 정치와 민주주의, 그리고 우리의 실력으로 보건대 박근혜 정권이 전근대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장담하지 못하겠다. 지금부터 '제2의 박근혜 정권'을 예방하기 위한 처절한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면, 우리는 선거 제도 개혁이 급하다고 생각한다. 국회의 비례 대표를 획기적으로 늘리고, 이를 통해 다양한 사회 권력을 대표하는 여러 정당이 경쟁해야 한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권력 독점과 전횡이 그만큼이라도 약해지지 않을까.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면, 민주주의의 심화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삶의 모든 국면과 영역에서, 그리고 실천의 모든 층위에서, 민주주의가 깊어지고 강해져야 한다. 문화와 규범, 삶의 양식으로서의 민주주의만이 '괴물'의 돌출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멀고 험한 길이지만, 어쩔 수 없다.
당장은 말 그대로 정치적인 것, 대통령의 직무 정지를 요구한다. 공식적으로는 탄핵 형식을 빌려야 한다면 그 또한 피할 이유가 없다. 여당이 나설 리 만무하니 야당이 앞장서 주기 바란다.
현실 정치에서 가능할 것인가는 그 다음 질문이고, 지금은 시민의 요구에 귀 기울이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지만, 민주주의의 토대를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꼭 그렇게 해야 할 일이다.
우리가 대통령의 직무 정지를 요구하는 이유는 과거를 처벌하자는 말이 아니다. 처벌은 급하지 않으니, 지금 필요한 것은 최소한의 국정을 '정상화'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삶을 회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계획할 수 있도록 하는 정상화, 새로운 정권은 바로 이를 위한 첫 걸음이다.
정치적으로, 또 기술적으로, 지금 정권으로는 국정을 정상 상태로 돌릴 수 없다. 생각해 보라, 누가 무슨 수로 그 일을 할 수 있을까. 그 어떤 말을 믿을 수 있을 것이며 그 어떤 정책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인가. 예산 한 푼을 이야기하는 데도 최 아무개의 그늘이 어른거리는 한, 현상 유지는 불가능하다. 바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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