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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수영(忠淸水營)이 주둔한 서해안 군사요충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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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충청수영(忠淸水營)이 주둔한 서해안 군사요충지였다

2016년 11월 고을학교는 <보령고을>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의 11월 제37강은 지금은 비록 머드축제와 해수욕장으로 명성이 자자하지만, 조선시대에 충청수영(忠淸水營)이 주둔하였던 서해안 군사요충지였으며 보령, 오천(鰲川), 남포(藍浦)의 세 곳에 읍치구역이 잘 보존되어 있는 보령(保寧)고을을 찾아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가을빛이 가득한 보령 들녘. 대표산인 오서산이 우뚝하다. Ⓒ보령시

고을학교 제37강은 2016년 11월 27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광천IC-오천읍치구역(충청수영성/망화문/진휼청/장교청/공해관)-오천향교-보령읍치구역(보령성곽/보령관아문/보령향교)-화암서원-점심식사 겸 뒤풀이-성주사지-남포읍치구역(남포읍성/남포관아문/남포향교)-용암영당-무창포IC-서울의 순입니다.

▲<보령고을> 답사 안내도 Ⓒ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37강 답사지인 <보령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보령, 오천, 남포에 읍치구역 있었다


보령(保寧)은 남북으로 타원형을 이룬 지형입니다. 북쪽으로 홍성(洪城), 태안(泰安)과, 동쪽으로 청양(淸陽), 부여(夫餘)와 남쪽으로 서천(舒川)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114.9㎞의 해안선이 서해와 닿아 있으며 유인도 15개도, 무인도 63개도의 총 78개의 도서(島嶼)가 속해 있습니다.

지형은 금북정맥(錦北正脈)의 끝자락에서 서해와 만나는 곳으로 해안이면서 주변에 높은 산지를 이루는 해변산골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금북정맥의 지맥인 성주산(聖住山)을 중심으로 남으로 주렴산(珠簾山), 동으로 아미산(蛾眉山), 북으로 오서산(烏棲山)이 있고, 서해로 뻗어나간 구릉지와 해변에 접한 평야도 잘 발달되어 있습니다.

물줄기는 오서산서 발원한 대천천(大川川)과 성주산에서 발원한 웅천천(熊川川)이 보령의 중심을 관통하며 서해로 흐르고 있습니다.

보령의 역사는 삼한시대는 마한의 만로국, 삼국시대는 백제의 결기군 신촌현, 신라의 웅진도독부에 속한 13현 중 산곤현, 757년(경덕왕 16) 웅주도독부로 개편되어 통일신라시대 웅주도독부 산하 결성군 신읍현이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995년(성종14) 하남도 웅주(현공주) 보령현, 1018년(현종 9) 양광도 운주(현홍성) 보령현, 조선시대는 1652년(효종 3) 도독부로 승격하여 수군절도사가 부사를 겸하게 하였고, 1655년(효종 6) 보령현으로 강등되었고 1914년 부, 군 통폐합 때 남포군, 오천군, 결성군, 홍산군을 병합하여 보령군으로 개편되었으며, 1963년 대천면을 대천읍으로 승격시키고 1995년 대천시와 보령군을 통합하여 보령시로 개명하였습니다.

보령고을은 보령, 오천, 남포에 읍치구역이 있었습니다.

보령읍성(保寧邑城)은 보령성지(保寧城址)라고도 부르며 지금의 보령중학교 안에 있는 해산루(海山樓)로부터 좌우로 이어진 성벽입니다.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축성되었으며 그 이후 고려 말엽부터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보령읍성을 지키기 위하여 그 외곽에 고남산성(古南山城)을, 바닷가에 아현산성(我峴山城)을 쌓아 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왜구들이 서천포, 남포 방면으로 침입해오자 보령읍성도 적의 손에 들어가 왜구에 의해 성이 크게 파괴되었습니다. 침략이 10여 년이나 계속되자 자연히 성은 허물어지고 고을이 폐허화되자 조정에서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오천(鰲川)에 수군절도사영을 두어 바다로 침범해오는 왜구를 막음으로써 보령읍성은 안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보령읍성은 왜적을 막기 위해 고려 때 축성된 것으로, 다른 읍성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토성이었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1400년(태종 원년) 봉당성을 없애고, 1430년(세종 12) 순찰사 최윤덕(崔潤德), 감사 박안식(朴安臣) 병사 이흥발(李興發)이 현재의 보령성 터를 잡고 서산군수 박눌생(朴訥生), 보령현감 박효성(朴孝成)과 힘을 합해 석성을 쌓았습니다. 1431년(세종 13)에 부임한 현감 정대(鄭帶)가 성 안에 140여 칸의 관아건물을 건립하였고 성의 둘레 630m, 높이 3.5m이며, 성문 3개, 옹성 2개, 우물 3곳 그리고 성 밖 둘레에 만든 물길이 600m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성은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보령의 고을이 대천으로 옮기면서부터 더욱 퇴락하여 지금은 동쪽과 북쪽에 성벽 일부와, 보령읍성의 남문 문루인 해산루(海山樓)가 남아 있는데, 이 누각은 1431년(세종 13)에 현감 박효성이 지은 것으로 건물의 앞면에 걸려 있는 ‘해산루(海山樓)’라는 현판은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친필이라고 합니다.

보령향교(保寧鄕校)는 1723년(경종 3)에 창건하여 1868년(고종 5)에 중수하였고 전학후묘의 배치입니다.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 명륜당, 동재, 서재, 내삼문, 외삼문 등이며 대성전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사성(四聖), 공문십철(孔門十哲), 송조6현(宋朝六賢), 동국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충청수영성은 서해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해 쌓았다. Ⓒ보령시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은 수군절도사 이장생이 쌓은 석성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은 서해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해 1509년(중종 4)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이장생(李長生)이 쌓은 석성(石城)입니다. 길이가 1,650m이고 자라(鱉) 모형의 지형을 이용하여 높은 곳에 치성(稚城) 또는 곡성을 두었고 4대 성문(城門)과 소서문(少西門)을 두었으며, 동헌을 비롯한 관아건물 영보정(永保亭), 관덕정(觀德亭), 대섭루(待燮樓), 능허각(凌虛閣), 고소대(姑蘇臺) 등이 있었으나 허물어졌고, 서문 망화문(望華門)과 건물로는 진휼청(賑恤廳), 장교청(將校廳), 공해관(控海館)이 보존되고 있습니다.

오천항(鰲川港)은 백제 때부터 중국과 교역하던 항구로서 회이포(回伊浦)라 불렸고, 고려시대에는 왜구를 물리치기 위하여 많은 군선(軍船)을 두었으며, 1466년(세조 12) 수영(水營)을 설치, 충청수군의 최고사령부로 서해안을 방어하였습니다.

오천현관아(鰲川縣官衙)는 충청수영청(忠淸水營廳)의 관청 건물이었습니다. <여지도(輿地圖)>의 기록에 따르면 객사(客舍) 82칸, 상서헌(上西軒) 9칸, 내동헌(內東軒) 10칸, 외동헌(外東軒) 10칸, 아사(衙舍) 5칸, 관청고(官廳庫) 10칸, 군사(軍舍) 7칸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장교청(將校廳), 진휼청(賑恤廳), 공해관(拱海館) 등 3동이 남아 있습니다.

장교청(將校廳)은 1833년(순조 33)에 건립된 수영(水營)의 군헌부(軍軒部)들이 논의하던 곳이었고 진휼청(賑恤廳)은 수영에서 빈민을 구제할 목적으로 곡식을 꾸어주고 거두어들이던 곳이었으며 공해관(拱海館)은 수영의 내삼문이었습니다.

오천향교(鰲川鄕校)는 충청수군절도사영(忠淸水軍節都使營)이 폐지되고,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오천군이 신설됨에 따라 1901년(고종 38) 오천군수 이명하(李明夏)가 부지를 마련하고, 후임군수 이승갑(李昇甲)이 사재(私財)와 종재(宗財)를 모아 대성전(大成展) 1동(棟)만 건립하였는데 그 후 유림들이 뜻을 모아 헌관청(獻官廳)과 외삼문을 건립하였고 1992년 명륜당에 해당하는 강윤당(講倫堂)을 건립하였습니다.

남포읍성(藍浦邑城)은 금북정맥(錦北正脈) 서쪽 끝자락의 구릉지에 위치한 남포현에 돌로 쌓은 읍성입니다. 원래는 고려 우왕 때 서해안을 침범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쌓았던 성이었는데, 1390년(공양왕 2) 군대가 머물 수 있는 진영(鎭營)을 설치하였고 1397년(태종 6) 병마사(兵馬使)를 두어 현사(縣事)를 겸하게 하다가 1466년(세종 1) 진(鎭)을 현(縣)으로 고쳤습니다.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있으며 바깥쪽 벽은 돌을 이용하여 직각으로 쌓았고, 안쪽은 흙으로 쌓아올렸으며 동, 서, 남 세 곳에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4m의 높이로 성 바깥에 설치하는 또 하나의 성벽인 옹성(甕城)을 1m 이상의 큰 돌로 둘렀습니다. 성벽이 꺾이는 부분에는 적의 접근을 빨리 관측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튀어나오게 쌓았으며[雉城], 그 양쪽 성벽에 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여(餘)담과 미석(楣石)을 두었습니다.

성 안에는 외삼문인 진서루(鎭西樓), 내삼문인 옥산아문(玉山衙門), 동헌(東軒)이 잘 보존되어 있고, 동서에 80㎝ 높이의 배수시설과 우물이 세 군데 있었다고 하는데 이 읍성은 서해안의 요충지로 왜구를 경계하는 한편, 해상 교통을 보호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하던 곳으로 보입니다.

남포향교(藍浦鄕校)는 1413년(태종 13) 창건하여 1530년(중종 25)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으며 대성전, 명륜당, 외삼문, 내삼문, 동재, 서재 등이 남아 있으며 공간배치는 전학후묘이고 대성전에는 공자와 4성(聖), 5현(賢), 동국18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보령관아문은 보령읍성의 남문 문루건물로 ‘해산루(海山樓)’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보령시

보령에서 태어난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화암서원(華巖書院)은 이지함(李芝函), 이산보(李山甫), 이몽규(李夢奎)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610년(광해군 2) 처음 지었습니다. 1686년(숙종 12) '화암'이라는 현판을 내려 사액서원이 되었고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에 따라 폐쇄된 것을 1920년 이지함의 후손이 다시 지었습니다. 이후 지금의 자리로 옮겼으며 이정암(李庭암), 구계우(具繼禹) 두 분을 추가 배향하여 모두 5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당시 건물로는 사당 1동과 삼문 1동이었으나 후에 축대와 기단을 정비하고, 재실과 삼문을 보수하였으며, 1988년 강륜당(講倫堂)을 세웠고 1997년 외삼문을 솟을 형식으로 개축하여 서원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1998년 이지함의 영정을 제작하여 표준 영정으로 심의 받아 모시고 있습니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6대손으로, 현령 이치(李穉)의 아들이며, 북인의 영수 이산해(李山海)의 숙부였습니다. 1517년(중종 12) 보령에서 태어나 14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이지번(李之蕃)에게서 글을 배웠고, 16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형 지번을 따라 서울로 거처를 옮겼으며 형의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1573년(선조 6) 유일(遺逸)로 천거되었고 1574년 6품직을 제수 받아 포천현감이 되었는데, 이때 임진강의 범람을 미리 알아서 많은 생명을 구제하였고 5년 후에 아산현감 때는 걸인청(乞人廳)을 두어 빈민구호(貧民救護)에 힘썼습니다. 1713년(숙종 39)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과 보령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습니다. 문집으로는 <토정유고(土亭遺稿)>를 남겼고 유명한 <토정비결(土亭秘訣)>도 지었습니다.

학문적 경향은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경사자전(經史子傳)에 통달하였고, 스승의 영향을 받아 의학(醫學), 복술(卜術), 천문(天文), 지리(地理), 음양(陰陽), 술서(術書)에 해박하였으며 풍수지리(風水地理)에 밝아 본인의 묘 터를 생전에 정했다고 합니다. 일생의 대부분을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내어 ‘토정(土亭)’이라는 호가 붙었습니다.

용암영당(龍岩影堂)은 고려 후기의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익제(益濟) 이제현(李齊賢)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지은 사당입니다. 원래는 1740년(영조 16) 양산각(陽角山) 아래 사당을 짓고 삼사당(三思堂)이라 하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으나 보령댐 건설로 1998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으며 그때 사당 앞에 있던 은행나무도 함께 옮겨 심었습니다.

이제현은 성리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백이정(白頤正)의 제자로 1301년(충렬왕 27) 15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1357년(공민왕 6) 좌정승을 끝으로 많은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1334년에 원(元)나라에 가서 원경의 만권당에서 조맹부 등과 고전을 연구하여 그 이름을 떨친 뛰어난 유학자였습니다. 성리학을 수용,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고 또한 고려의 한문학을 발전시켰으며 저서로는 <익재집(益濟集), <역옹패설(櫟翁稗說)> 등이 있습니다.

▲성주사지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탑비로 대학자 최치원이 썼다. Ⓒ보령시
성주사지의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성주사지(聖住寺址)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성주사가 있던 절터로 원래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오는 백제 법왕 때 창건한 오합사(烏合寺)였습니다. 통일신라 문성왕대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朗慧和尙)이 주지가 되어 절을 번창시키니 왕이 성인이 머무는 곳이라는 의미로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당우전각은 소실(燒失)되었고 절터에는 중문 터, 석등, 5층석탑, 금당 터, 동 3층석탑, 중앙 3층석탑, 서 3층석탑, 강당 터가 차례로 자리잡고 있으며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성주사지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址 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탑비입니다. 최치원(崔致遠)이 쓴 사산비문(四山碑文) 중 하나이며 신라 석비 중 가장 큰 작품으로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낭혜화상은 무열왕의 8세손으로 801년(애장왕 2)에 태어나 열세 살 되던 해에 출가하여 821년(헌덕왕 13)에 당나라로 유학 가서 깨달음을 얻었고 845년(문성왕 7) 귀국하여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었으며 888년(진성여왕 2)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렸습니다.


▲성주사지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성주사가 있던 절터다. Ⓒ보령시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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