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사 합수부, 부녀자이어 광부들도 성고문
1980년 5월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이 부녀자들에게 자행한 가혹행위와 성고문 실태를 사북광업소 인근 고한성당 수녀들도 일부나마 확인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위)’결정문에 따르면 1980년 당시 고한성당 수녀였던 손인숙 수녀와 장경순 수녀는 2006년 9월 2일 ‘진실위’ 진술을 통해 합수부 수사관들의 가혹행위를 밝혔다.
고한성당 수녀 일을 보면서 동원보건원 간호사로 근무했던 장경순씨는 정선경찰서에서 풀려난 부녀자들이 심한 성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경찰서에서 석방된 부녀자들은 대부분 병원 치료를 받지 않았고 집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고 진술했다.(이들은 당시 석방되면서 계엄군들에게 각서를 쓰거나 경찰서에서 당한 가혹행위와 성고문 행위를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사태가 수습되고 난 며칠 후부터 경찰들이 밤낮으로 광부들과 부녀자들을 잡아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중에 사택을 돌아봤는데 지장산 사택 같은 경우는 일부 사택구역이 텅 빌 정도였다. 잡혀갔다가 나온 사름들로부터 특히 부녀자들이 지부장 부인이 당한 것과 똑같이 험한 일을 당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그후 (정선경찰서에서)풀려난 사람들이 우리 동원보건원에 치료받으러 온 적은 전혀 없었다. 내가 직접 광부나 부녀자들을 만나지 않았고 손인숙 수녀가 집집마다 다니며 얘기를 들고 그런 내용을 수집했다.”
손인숙 수녀는 2006년 10월 22일 ‘진실위’ 진술을 통해 “무자비한 가혹행위와 성고문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풀려난 사람들에게 전해 들었다. 사북에서 잡혀서 정선까지 가는 길이 ‘지옥길’이라고 했다. 버스에 실려 끌려갔는데 밤에 버스 내부 조명을 끄고 엄청나게 구타하고 군화발로 밟고 그랬다고 했다.
불을 꺼서 누가 누군지 몰랐다고 했다. 나중에 사북지서에서 근처의 사택에 사는 어떤 광부 한 사람이 찾아와 ‘아내가 풀려난 후 좀 이상해졌으니 도와 달라’는 얘기를 듣고 집을 방문했다. (그 아내는)정선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젖가슴을 쥐어 뜯기고 아래의 음모를 쥐어 뜯기는 일을 당했다고 하더라.
그런데 다른 풀려난 여자들은 집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또 그런 이야기를 하고 다니지도 않았다. 내 짐작에 그들은 말은 안하지만 같은 고통을 겪었지 않나 생각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부녀자들에 대한 가혹행위와 성고문 행위는 함께 끌려와 조사를 받았던 광부들도 목격했다.
정선경찰서에 주모자로 끌려와 가혹행위를 당했던 강윤호씨는 “내가 맞다가 바닥에 쓰러지면 조사실 바닥 벽 틈으로 옆 조사실에서 맞는 여자들을 잠깐 볼 수 있었다. 옆 조사실에 남자 형사가 ‘쌍×아 묻는 말에 대답해’라고 욕을 하면서 발로 차고 여자는 양 손을 가슴에 모으고 발발 떨면서 나처럼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머리는 산발해 헝클러져 있는 것으로 보았다”고 진술했다.
또 박노연씨도 정선경찰서에 마련된 합동수사단 임시조사실에서 김분연과 대질 신문 때 김분연의 군복 상의가 벗겨져 젖가슴이 노풀된 상태였다고 진술했다.
“내가 사택 방송을 시켰다고 해서 김분년씨와 대질을 했다. 대질 신문 때 김분연씨의 군복 상의에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군복 상의는 단추가 다 풀려 있었고 젖가슴이 다 보였다”
백마부대원으로 월남전에 파병된 파월용사 출신의 박씨는 사북사건이 마무리 된 뒤 사북광업소 무기고와 탄약고를 지킨 공로를 인정받아 1980년 10월 27일 대한적십자가 총재 표창을 받은 인물이다.
특히 그는 사북사건이 마무리 된 직후 <동아일보>에 ‘동료들에게 뭇매 맞으며 무기고 사수한 광부’로 기사가 실리며 ‘사북사건’의 확산을 막은 일등 공신으로 평가받았다.
그런 특별한 선행을 했지만 그는 합수부의 주모자 대열을 벗어나지 못해 정선경찰서에 연행된 뒤 18일간 불법 구금상태에서 모진 고문과 폭행을 당했다.
고문에 못 이겨 허위 진술한 이웃 부녀자들의 제보로 ‘사북사건’ 주모자로 몰린 그는 원주 1군사령부 헌병대로 넘겨져 군사재판을 받은 뒤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박노연씨가 불법 체포되어 폭행과 고문, 재판을 받은 뒤 석방될 때까지 무려 95일간 ‘사북사건’의 주모자로 둔갑해 ‘죄인’이 됐던 것이다.
한편 정선경찰서에서는 조사과정에서 부녀자들에 이어 남자 광부들에 대한 성고문도 자행된 것으로 ‘진실위’ 조사에서 드러났다.
‘진실위’ 결정문에 따르면 윤병천, 정인교, 박대성 등 1980년 5월 당시 합동수사단 조사를 받던 광부들은 정선경찰서 유치장 간수 정한식 순경이 유치된 광부들에게 성적 가혹행위를 했다고 진술했다.
당시 정한식 순경은 정선경찰서 유치장에 유치된 일부 광부들에게 하의를 벗도록 한 뒤, 나무 회초리로 성기를 때리는 등 성적가혹 행위를 구체적으로 밝혔다.
“당시 정선경찰서 유치장 간수 정한식 순경이 ‘너희들 중 물건이 가장 큰 놈에게 담배를 한 대 주겠다’며 남자들 하의를 모두 벗게 했다. 그런 다음 60센티미터 정도 되는 나무 회초리로 청창 밖으로 나온 (남자)성기를 때리며 ‘이 놈은 왜 이렇게 작아’라는 등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했다.
당시 정한식 순경은 그전에 사북지서에도 근무했기 때문에 안면이 있어서 기억을 했다. 정한식은 유치장 안에 안티프라민을 나누어 주면서 상처에 바르라고 하고 안 바르면 ‘바르라’고 강요도 했다.”(박대성씨 2006년 11월 30일 진술)
“유치장에서는 거꾸로 세워 놓고는 1미터 정도 되는 고무호스, 곡괭이 자루, 각목으로 닥치는 대로 때렸다. 또 유치장 경찰 정한식이가 남자들에게 성기를 내놓게 하고 가느다란 작대기로 성기를 때리고 ‘제일 물건이 큰 놈에게 담배를 한 모금 준다’, ‘이 새끼는 되게 크네’, ‘이 새끼는 되게 작네’하면서 심한 모욕을 주었다.”(윤병천씨 2006년 8월 11일 진술)
“기억 나는 고문 가해자는 당시 정선경찰서 유치장 간수였던 정한식이다. 유치장 밖으로 손으로 내밀게 하고 손바닥을 연탄집게로 때렸다. 정한식이가 ‘어디 정씨냐’고 물으며 자기가 정한식이라고 스스로 밝혀 이름을 알게 되었다.
정한식은 끌려온 아줌마들에게 ‘그 짓을 안하니 근질근질 하지, 내가 대신 해줄까’하는 등 성적 수치심을 줬다. 남자들 성기를 내놓게 하고 수치심을 주었다. 가해자는 정한식 외 170센티미터 정도 키에 머리가 짧은 군인도 있었다.”(정인교씨 2006년 11월 29일)
그러나 ‘진실위’조사를 통해 당시 사북사건 주모자 조사에 지원을 나갔던 경찰관들은 대부분 100% 진실에 가까운 진술을 했지만 합수부 소속 보안부대원들은 변명이나 거짓 진술로 일관했다.
1980년 당시 장성경찰서(현 태백경찰서)수사과 경장으로 근무하던 이용재씨는 2006년 9월 25일 ‘진실위’와의 서면조사를 통해 가혹행위 당사자는 합동수사단 소속 20명 가량의 보안대원이었다고 진술했다.
또 그는 주모자로 알려진 이원갑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보안대원이 이원갑씨의 머리를 내리쳐 피가 흐르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보안대원들이 각목과 고무후스 등의 도구를 이용해 잡혀온 광부와 부녀자들에게 가혹행위를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처음 수사과정에서 이원갑씨가 수되니까 늘 보안대원이 (이원갑씨 주변에)있었다. 이원갑씨가 부인하거나 하면 보안대원이 옆에 빈칸에 데리가 가서 폭행을 가했다. 비명소리가 들렸다. 내가 지켜보는 앞에서 이원갑씨를 보안대원 하나가 나무 각목우로 머리를 내리쳐 이원갑의 정수리가 깨져 피가 많이 흘렀다. 내가 정선읍에서 간호사를 불러 머리를 깍고 머리 상처를 치료토록 했다.
“물고문도 있었다. 팔 다리를 묶고 나무에 꿰어 책상에 걸오 놓고 얼굴에 타월을 덮고 주전자 물을 들이 부었다. 처음 당하는 사람들은 방귀를 뽕뽕 뀌었다. 인간 이하의 폭행을 당했다.
(고문 폭행 장면을)직접 봤다. 당시 끌려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슷한 폭행을 당했다. 주모자였던 이원갑씨 등은 더 가혹하게 폭행을 당했다. 심하게 당했다. 부녀자들의 경우도 많이 맞았다.
(가혹행위를 한 사람은)20명 가량의 보안대원들 이었다. 보안사 소속 군인들이었다. (고문도구는)각목, 고무호스 등을 사용했다. (이덕수 순경 사망으로 경찰들은)흥분한 상태였다. 그렇지만 보안대원들이 워낙 나서서 고문을 하니까 경찰들이 나설 상황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조사실에서 부녀자들이 생리를 하는데 생리대가 없어 그대로 하혈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합동수사단에서 ‘사북지서 무기고 손괴, 사북지서장 구타사건’을 조사하는 1조에 소속되어 피의자 조사를 담당했던 경영주(당시 삼척경찰서 조사계 경장)씨도 생생하게 당시 가혹행위를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김씨는 1980년 5월 조사과정에서 주로 보안대원에 의해 가혹행위가 저질러졌고 그로 인한 실신자가 속출하자 정선군보건소에서 의사, 간호사들이 긴급 배치되어 응급치료를 한 후 계속해서 가혹행위를 했다고도 진술했다.
또 40~50명의 부녀자들에 대한 조사는 보안대원들이 가혹행위를 통해 기선을 제압한 뒤 이뤄졌다고 진술했다. 특히 조사를 작성할 때는 보안대원이 부녀자 옆에 서서 욕설을 하며 진술을 강요했다고 밝혔다.
“폭행은 주로 보안대 요원들에 의해 이뤄졌다. 1군사에서 파견된 보안대 요원이 길이가 약 1미터의 호스를 들고 남녀를 불문하고 전신을 때리고 각목을 두 다리의 오금 사이에 넣고 짓밟았다. 이러한 폭행으로 인해 실신자가 부지기수로 속출했다.
실신하면 큰 바케스로 물을 붓고 또한 정선군보건소에 긴급 배치된 의사와 간호사들이 응급치료를 하게 한 후 계속해 가혹행위를 포함한 수사를 했다. 이중 혐의가 없다고 인정되는 광부들은 밖에 나가 절대 수사내용과 과정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은 뒤 귀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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