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점심시간이면 학생지도부실 앞이 북적였다. 다들 한껏 심통 난 표정으로 교복을 바로 입으며 제 차례를 기다렸다. 퍽, 퍽, 퍽. 보이지 않는 학생지도부실 안에선 매질이 끊이지 않는다. 구태여 즐거운 점심시간을 망치며 친구들이 줄을 선 이유는 맞기 위해서다.
‘애는 맞아야 큰다.’, ‘몽둥이가 약이다.’학생시절 격언마냥 들었던 말이다. 빗자루 대나 효자손 비슷하게 생긴 사랑의 매는 모든 교실에 급훈처럼 걸려있었다. 때리면서 핑계도 조건도 많다. ‘내가 너를 때리기는 하지만, 이게 다 너를 위한거야. 그러니 고마운 줄 알아.’폭력의 이유를 학생들에게 넘기는 것도 모자라 선생의 폭행 동기에 공감하길 강요한다. 사랑해서 때린다니, 사랑해서 떠난다는 삼류 멜로 대사보다 공감하기 어렵다.
사실 교사가 사랑한 학생은 따로 있었다. 지각과 결석을 출석하듯이 하던 학생회장은 연말에 대표로 개근상을 받았다. 엄하기 그지없던 고등학교 담임선생은 자율학습 시간마다 한 친구만 불러 친절하게 개인 상담을 해주었다. 개인 과외를 받을 수 있게 야자를 빼줬다는 뒷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았다. 공공연한 비밀도 못됐다. 그냥 공공연했다. 누구나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다. 부모님만 학교에 온다면.
대학에선 다행히 맞지 않았다. 다만 시도 때도 없이 강의가 휴강돼도, 교수가 강의시간에 망발을 해도 참고 넘어갈 뿐이다. 대학만 가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고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지만, 막상 대학에 들어오면 대학만 나와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회가 기다리고 있다. 가진 게 대학밖에 없는 학생들은 대학에 들어오는 순간 학점을 볼모잡힌다.
학부 전공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대외활동 경험 혹은 수상경력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대회는 하나같이 주중 오후 2시에 한다. 면접은 왜인지 오전 10시다. 수업 한 번 빠지려면 구구절절한 메일과 함께 결석계를 내야 한다. 날이 추운 데 감기 조심하라고 인사를 해야 하나, 말투가 건방지진 않나, 길이가 너무 짧은 건 아닌가. 그래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많다. 형평성을 위해서다. 결석 1회시 감점 1점, 과제 제출기한 어길시 0점. 수업 듣기 전부터 수업계획서가 나를 째려본다. ‘수업계획서에도 적혀있으니 지키지 않으면 네 책임이야! 그 정도 성실함으로 사회 나가서 뭘 하려 그래?’
수강신청도, 출석도, 심지어 과제도 교수가 대신 해주다시피한 ‘그 친구’는 평생 나와 같은 친구들만 봤을지 모른다. 나태하고, 불량하고, 맞아야 하는. 혹은 무능력하고, 남 탓만 하는.
“교권이 무너졌다.” 2010년부터 2013년까지 학생인권조례안이 지방 교육청을 통해 제정되는 동안 논쟁은 거셌다. 안 그래도 무서워지고 있는 학생들을 관리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숙제 5쪽을 안 한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선생의 의견을 따르지 않은 학생들이 교권을 무너뜨렸는가. 대통령의 말처럼 “교육이 공평한 기회 제공의 터전”이 되고 있는가. 답은 고민해볼 여지없이 부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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