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학교(교장 최연. 인문지리기행학자, 서울해설가)의 11월, 제53강은 초기백제시대에 속하는 한성백제의 자취를 더듬어 보고 옛날의 광나루에 놓인 광진교 위에서 한강에 비치는 노을을 바라보며 만추의 정취를 느껴볼까 합니다.
특히 한성백제의 문화유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한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인 이 시기에 미리 한번 둘러보는 것도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서울학교 제53강은 2016년 11월 13일(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서울 잠실 롯데월드 호텔 앞 서쪽 석촌호숫가의 삼전도비 앞에 모입니다. 지하철 2호선, 8호선 잠실역 3번 출구로 나와 약간 직진, 석촌호숫가에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삼전도비-백제고분군-석촌호수길-올림픽공원 정문-한성백제 박물관-몽촌토성-움집터-몽촌 역사관-올림픽공원 북1문-강동구청 앞-점심식사 겸 뒤풀이(하늘빛우렁쌈밥)-풍납토성-광진교-광나루역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1월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백제, 한강을 가장 먼저 차지하다
고대로부터 하천은 인간의 주거발달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물은 식수(食水), 농업용수(農業用水), 교통로(交通路)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집단주거지역은 하천유역에 형성되었으며 그래서 인류문명의 발상지들도 모두 강을 끼고 있습니다.
한강은 한반도의 중심부를 흐르는 하천으로 삼국이 길항하던 시기에 한강유역을 차지하려는 전쟁이 끊이질 않았고 신라의 삼국통일 후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동안에는 한강유역은 별 관심을 받지 못하다가 조선의 도읍이 한양으로 옮겨오면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였습니다.
한강유역을 두고 삼국이 쟁패하기 전에 백제가 제일 먼저 한강유역을 차지하게 됩니다.
서울이 14세기 말부터 19세기까지 조선(朝鮮)의 도읍 한양(漢陽)이었듯이 2세기부터 5세기까지는 한성백제(漢城百濟)의 도읍이었습니다.
서울의 문화유산이 조선시대의 것은 많이 전해지고 있으나 한성백제의 것은 접하기가 어려웠습니다만 최근에 한성백제의 도성인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에서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어 다행히 한성백제의 역사적 향기를 일부분이라도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역사의 전개과정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시기구분 작업은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수도(首都)의 이동에 따라 백제시대를 구분해 보면 기원전 18년에 건국한 이후 475년에 웅진으로 수도를 옮기기까지 한강유역(漢江流域)에 머물렀던 493년간의 한성백제시대(漢城百濟時代), 고구려의 침략으로 개로왕이 죽고 황급히 남하하여 금강유역(錦江流域)의 공산성(公山城)에 머물렀던 63년간의 웅진백제시대(熊津百濟時代) 그리고 백제의 전성기이자 패망을 지켜보아야 했던 백마강유역(白馬江流域)에 정착한 122년간의 사비백제시대(泗沘百濟時代)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부여(夫餘)로부터 떨쳐 나와 10명의 신하와 함께 남하한 온조(溫祖)와 비류(沸流)는 송파구 일대인 한강유역과 인천 문학경기장 근처인 미추홀(彌鄒忽)에 각각 머물렀는데 온조를 도운 10명의 신하를 내세워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다가 미추홀의 비류가 죽고 그의 백성들이 즐겁게 온조에게 왔다고 해서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습니다.
남하한 온조 집단은 당시 경기, 충청, 전라도 지방에 자리 잡은 마한(馬韓) 연맹체 54국 중에 맹주국인 목지국(目支國)으로부터 100리의 땅을 할양받아 나라를 세운 뒤 미추홀의 비류집단과 지역연맹체를 형성하고 그 세력을 키운 뒤 맹주인 목지국을 병합시키고 마한연맹체의 새로운 맹주가 되어 마침내 한성백제의 초기체제를 형성하였습니다.
한성백제의 초기 시기는 5개의 부(部)로 나누어 5부장(部長)을 통해 간접 통치하는 5부체제(五部體制)형식이었고 왕은 왕성(王城)이 있는 직할지만을 통치하였습니다만 고대국가로 틀이 갖추어지자 늘어나는 인구도 수용하고 방어체제도 강화하기 위해 도성을 건립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 진 것이 풍납토성(風納土城)과 몽촌토성(夢村土城)입니다.
풍납토성은 평지토성(平地土城)으로 평상시에 주거하는 도성이고 몽촌토성은 자연 구릉을 이용하여 만든 비상시에 대비한 산성적(山城的) 성격을 지녔습니다.
그래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아울러 부를 때는 한성(漢城), 위례성(慰禮城), 왕성(王城), 대성(大城)이라 하였고 각각으로 부를 때는 위치에 따라 풍납토성을 북성(北城), 몽촌토성을 남성(南城)이라 하여 고구려의 국내성(國內城)과 환도산성(丸都山城)과 마찬가지로 남성과 북성의 이성체제(二城體制)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나아가서 남쪽으로 남한산성(南漢山城), 동쪽으로 이성산성(二聖山城), 북쪽으로 아차산성(峨嵯山城), 서쪽으로 삼성리토성(三成里土城)의 외곽 방어기지를 갖추기도 하였고 한강변에는 홍수 피해를 방지하는 제방의 역할과 한강을 타고 침략해 오는 적군을 방어하기 위하여 사성(蛇城)도 쌓았습니다.
북성(北城)은 풍납토성, 남성(南城)은 몽촌토성
기록에 따르면 초기백제의 중심지에 대한 명칭이 위례성 ->왕성 ->한성의 순으로 변했는데 이것은 세 개의 지명이 뜻하는 의미가 같다는 것입니다.
한성(漢城)은 ‘큰 성(大城)’의 중국식 표기이고 위례성은 한성을 달리 부른 이름일 것입니다.
위례성(慰禮城)의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신뢰할 만한 것은 하나는 위례가 위리와 음이 비슷하여 ‘울타리’ 라는 주장으로 목책을 세워 흙을 쌓아 만든 울타리를 뜻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왕성(王城) 또는 대성(大城)이라는 주장으로 위례는 백제어의 어라(於羅)처럼 왕 또는 크다(大)는 뜻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위례성, 왕성, 한성은 같은 곳을 달리 불렀던 이칭(異稱)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같은 기록에 한성에 북성과 남성의 2개의 성이 있다고 했으니 이것은 지금의 조건에 비추어 볼 때 북성은 풍납토성이고 남성은 몽촌토성이라고 생각되는데 몽촌토성은 왕이 머물렀던 왕성(王城)이고 풍납토성은 백성들의 거주지가 많았던 거민성(居民城)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는데 최근 풍납토성에서 왕궁 유적이 발굴되어 한성백제시대의 왕성은 한성이라 불렸던 풍납토성이라 보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되며 한성이란 명칭은 조선시대에도 도읍의 이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한성백제는 한강변에 2개의 도성을 중심으로 그 남쪽으로는 석촌동, 가락동, 방이동 일대에 당시 지배층의 묘역이, 동북쪽으로는 성내동, 천호동, 암사동 일대에 취락지와 농경지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풍납토성은 전체의 둘레가 3,470m, 높이는 6m 에서 15m에 이르고 성벽의 넓이는 30m 에서 70m에 이르고 성 밖에는 넓은 해자(垓字)가 둘러쳐져 있는 한강 연변의 평지에 축조된 순수한 토성으로 남북으로 길게 타원형을 이루며 동벽 1,500m, 남벽 200m, 북벽 300m 정도이며 서벽은 1925년 을축대홍수로 유실되었습니다만 지금은 새로 제방을 쌓아 서벽이 완전히 남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안에는 왕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의 표현을 빌리면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하지 않은(儉而不陋 華而不侈)” 많은 건물들이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집단취락시설의 주위나 성곽 둘레에 도랑을 파고 물을 가두어 두는 일종의 방어시설인 환호(環濠)가 3겹으로 둘러싸여진 모습으로 발굴되었고 각종 토기류와 꺾쇠, 숫돌 등의 생활유물들도 원형을 유지한 채 발견되었으며 도로의 유구와 석축유구, 생활유구, 수혈 등이 함께 발견되어 왕궁 내에 많은 국가시설물들이 존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환호는 몽촌토성의 해자(垓字)와는 달리 군사적인 방어시설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밀집된 주거지역과 외부와의 구획을 짓는 경계시설로서 상징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이며 또한 성안 전역에 걸쳐 기와, 전돌, 초석 등 고급의 건축자재들이 많이 출토되어 풍납토성 안에 살았던 거주민들은 상당히 높은 계급층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게 합니다.
몽촌토성은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뻗어 내린 구릉지의 지형을 이용해 외성(外城)과 내성(內城)의 이중구조로 축조한 독특한 토성으로 진흙을 쌓아 성벽을 만들고 필요에 따라 경사면을 급하게 깎는 등 인공을 가하기도 하였습니다.
북쪽으로는 목책(木柵)을 세웠으며 그 외곽에 해자를 둘렀는데 해자는 성 밖으로 물길을 내어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역할을 해주는 것으로 현재는 연못으로 가꾸어져 있는데 성벽의 총길이는 성벽 정상부를 기준으로 서북벽 617m, 동북벽 650m, 서남벽 418m, 동남벽 600m로 총 2,285m이고, 동북쪽 외곽에는 외성(外城)이 약 270m의 직선형태로 자리 잡고 있으며 제일 높은 곳의 고도는 42.9m이며 대부분의 높이는 30m 이내입니다.
북측의 외곽경사면과 외성지의 정상부에는 목책(木柵)을 설치하였던 흔적이 나타났고 동측의 외곽 경사면에는 생토를 깎아내어 경사를 급하게 만들고 해자(垓子)를 설치하였던 점으로 보아 북쪽으로부터의 침략에 대비한 기지 구실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히 물건을 저장하는 창고와 같은 역할을 하는 저장혈(貯藏穴)의 유구와 망루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판축성토대지(版築盛土臺地)와 같은 군사시설들이 발굴되어 이곳이 왕성이 아니라 위급 시 대피하는 한성백제의 최후의 보루였던 것 같습니다.
몽촌토성에서 현재까지 밝혀진 한성시대 백제 시설물로는 적심석(積心石)을 갖추고 있는 지상 건물지 1기, 판축성토대지(版築盛土臺地) 1개소, 수혈주거지(竪穴住居址) 9기, 저장혈(貯藏穴) 31기, 저장혈과 유사한 방형유구(方形遺構) 2기, 적심유구(積心遺構) 7기, 지당지(池塘址) 2개소 등이 확인되었고 몽촌토성이 네 곳이 끊겨 있기 때문에 당시 성으로 통하는 문이 4개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곳이 문이 있었던 문지(門址)였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석촌동 고분군은 한성백제 중심 묘역
석촌동 고분군(古墳群)은 석촌동과 가락동에 걸쳐 있으며 한성백제 시기의 중심묘역입니다.
일제강점기의 발굴 보고서에 따르면 지상에서 그 존재를 확인 할 수 있는 분묘가 토축(土築)으로 된 것이 23기 적석(積石)으로 된 것이 66기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대형 돌무지무덤[積石塚] 7기와 함께 널무덤[土壙墓], 독무덤[甕棺墓] 등이 30여 기 정도 남아 있습니다.
고구려의 영향인 돌무지무덤이 석촌동에 산재한다는 것은 백제의 건국 세력이 문화적으로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분군 지역에는 3, 4호분과 같은 대형분 이외에도 소형의 널무덤과 같은 평민이나 일반 관리의 것도 섞여 있고 서로 시기를 달리하면서 중복되게 형성된 것도 있어서 석촌동 일대는 오랫동안 다양한 계급의 사람의 묘지로 쓰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석촌동 고분군에서 제일 거대한 3호분은 긴변 45.5m, 짧은변 43.7m, 높이 4.5m의 규모의 사각형 기단형식의 돌무덤(基壇式積石塚)으로 기단은 3단까지 확인되었으며 그 시기는 3세기 중엽에서 4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여 한성백제를 강력한 고대국가로 건설한 근초고왕(近肖古王)의 무덤으로 비정(比定)되기도 하였습니다.
4호분은 한 변이 23~24m의 정사각형으로 연대는 3호분과 비슷한 시기로 보이나 널무덤과 판축기법을 가미하여 순수 고구려 양식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1호분의 경우 왕릉급의 대형 쌍분임이 확인되었고 그 쌍분 전통은 압록강유역의 환인현 고력묘자촌에 보이는 이음식 돌무지무덤과 연결되고 있어 백제 지배 세력이 고구려와 깊이 관계되어 있다는 증좌이기도 합니다.
이들 고분은 대체로 3세기에서 5세기에 걸친 약 200여 년 동안 만들어졌으며 특히 4세기 약 100년 동안은 한성백제 지배 세력에 의해 돌무지무덤 위주의 고분이 축조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후 공주(公州)로 천도(475년)한 웅진백제 지배 세력의 무덤은 돌무지무덤(積石塚)에서 돌방무덤(石室墓)으로 바뀌게 되는데 웅진백제 시기의 무령왕릉(武零王陵)이 바로 최초의 횡혈식석실묘(橫穴式石室墓)이며 이때부터 왕실의 묘제로 횡혈식석실묘가 정형화되어 삼국시대의 보편적인 왕실의 묘로 자리 잡게 됩니다.
삼전도(三田渡), 조선시대 4대 도선장의 하나
삼전도(三田渡)는 조선시대 한강도, 양화도, 노량도와 더불어 4대 도선장의 하나이며 1439년(세종 21)에 한강에 설치된 최초의 나루터 중 하나로 도성(都城)으로부터 30리 지점인, 상류의 광나루(廣津)와 하류의 중랑포(中浪浦) 사이에 있었으며 왕십리와 뚝섬 사이에 있는 살곶이다리(箭串橋)를 지나, 신천동(新川洞)과 잠실동이 있는 하중도(河中島)를 건너 송파에 이르도록 뱃길이 마련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한강 동부 일대의 교통은 태종 때 설치한 광진(廣津 광나루)에서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 위치가 동쪽으로 치우쳐 있는데다가 태종의 능이 대모산(大母山) 부근에 설치되면서 능행로의 개설이 요구되어 세종 21년 삼전도가 신설되었습니다.
삼전도가 설치되면서 광나루의 기능은 축소되어, 광진 별감은 혁파되고 삼전도승이 광진의 업무까지 주관하였으며 조선 후기에는 인근에 송파진이 개설되어 인마(人馬)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조정에서는 송파진에 별장을 배치하고 수어청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였고 병자호란 때 수항단(受降壇)을 쌓고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한 곳이며, 청나라의 전승비(戰勝碑)이기도 한 삼전도비(三田渡碑)가 이곳에 세워졌었습니다.
당시 삼전도는 도성에서 남한산성을 가는 나루였고, 광주, 이천, 여주로 가는 길목이며, 영남로(嶺南路)를 지나는 상인들이 주로 이용하였던 교통의 요지로서 주로 사람과 우마(牛馬)가 다녔고 세종 때에는 대모산 아래 현릉으로 가기 위한 나루로도 이용되었는데 처음에는 종9품의 도승(渡丞) 한 명을 두어 이를 관리하였으나 뒤에 별장(別將)이 배치되어 어영청(御營廳)이 관할하였습니다.
비신의 앞면과 뒷면에 새겨진 비문은 세 나라의 문자로 씌어 있는데 비신의 앞면 왼쪽에는 몽골문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가 새겨져 있으며 비문은 당시 이조판서와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고 있던 이경석(李景奭)이 짓고, 당대의 명필로 꼽히는 오준(吳竣)이 썼으며, 전액(篆額)의 글씨는 예조참판이었던 여이징(呂爾徵)이 썼습니다.
이 비는 조선의 모일모화사상(侮日慕華思想) 분위기를 우려한 일본에 의해 땅 속에 파묻혔다가 1895년(고종 32) 청일전쟁이 끝나면서 복구되었으나 1956년 국치의 기록이라 하여 문교부에 의해 다시 매몰되었다가 장마로 한강이 침식되면서 몸돌이 드러나자 원래의 위치에서 송파 쪽으로 조금 옮긴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웠으며 지금은 역사 속의 위치와 전혀 관련이 없는 잠실롯데월드호텔 옆에 보호각을 마련하여 보존하고 있습니다.
송파진(松坡津)은 가까이에 있는 큰 도선장인 삼전도를 병자호란 이후 기피하는 경향이 있어 조정에서는 삼전도승(三田渡丞)을 송파진으로 옮겨 별장(別將)으로 하고 수어청(守禦廳)으로 하여 관리하게 하였는데 이때부터 송파진 부근에는 큰 장시(場市)가 서서 객주, 거간을 비롯한 도선주들이 모여들었으며 그에 따라 송파진의 역할도 커져 9척의 진선(津船)으로 통행의 편의를 도모하였으며 송파진 별장은 인근의 광진, 삼전도, 신천진까지 관장하였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차림, 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 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지리기행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가 있으며, 곧 후속편이 나올 예정입니다. 또 서울 역사인문기행의 강의 내용이 될 <서울 이야기>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 번씩, 둘째 주 일요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대략 오전 9시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한 후에 1시간 30분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4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