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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 사북사건 주동자 연행은 ‘광부사냥’처럼 잔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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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계엄군, 사북사건 주동자 연행은 ‘광부사냥’처럼 잔혹했다

[홍춘봉의 광부아리랑] ⑧광부와 부녀자 감금한 정선경찰서…‘아비규환’

광부와 부녀자 감금한 정선경찰서…‘아비규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위)’의 조사결과 1980년 4월 말 설치된 계엄사 합동수사단은 ’사북사건‘의 주모자로 선정된 광부와 부녀자들을 체포, 연행하는 과정에서 무수한 가혹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냈다.

합수단은 1980년 5월 6일 사북읍사무소를 시작으로 이튿날인 7일부터 사북광업소 사택단지를 돌며 거의 1주일간 3인 1개조로 편성된 검거조가 주모자를 밤낮없이 150여 명을 연행했다.

‘진실위’는 이원갑씨 등 광부 10여 명이 1980년 5월 6일 사북읍사무소에서 군인과 경찰에 의해 정선경찰서로 연행된 사실은 국가기록원에 보존된 사북사건 경찰기록, ‘합수단 수사상황’보고문건과 ‘이원갑 진술서’의 서명날인 날짜(1980.5.7.)로 확인됐다.

▲1980년 4월 24일 동아일보 기사는 사북사건에 대해 ‘무법 4일, 공포의 탄광촌’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박노연

또 사북읍사무소에서 이날 광부들이 연행되었다는 사실은 경찰기록과 합동수사단 소속 경찰관들의 진술에서 뒷받침되고 있다.

김성한(당시 정선경찰서 형사계장)씨는 진실위 조사에서 “조사대상자(주모자)의 검거는 군경 합동검거반에 의해 이뤄졌다. 검거조는 군경이 포함된 3인 1조로 구성되었다. 사북지역의 지리에 익숙한 정선경찰서 소속 경찰관이 안내를 맡았다”고 진술했다.

또 김찬수(당시 합동수사단 검거조)경찰관은 “처음에는 주로 야간에 (주모자들을)검거했지만 나중에는 밤낮으로 작전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진실위’ 조사결과에 따르면 합동수사단의 1차 검거작전은 1980년 5월 6일 오후 7시 정선군 고한읍 소재 사북읍사무소에서 진행되었다.

합동수사단은 이날 ‘수습대책위원회’ 전체 회의를 개최한다면서 이원갑, 신경 등 광부 10여 명을 사북읍사무소로 오게 한 뒤, 착검한 총을 든 군인과 경찰을 동원해 전원 회사통근차에 태워 정선경찰서 합동수사단 임시 조사실로 연행했다.

이원갑씨는 “수습대책위원회에서 회의를 한다고 읍소무소에 광부대표들이 참석했다. 당연히 읍장을 비롯한 관련자들이 참석해 후속대책회의를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합수부는 주모자를 손 쉽게 검거하기 위해 만든 함정이었다는 것을 회의 시작과 동시에 알게 되었다. 회의를 시작하는 순간 총검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계엄하의 집회는 불법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광부들만 모두 연행해 갔다.”고 말했다.

이원갑, 천만성은 버스에 태워져 연행되는 도중에 군화발로 목을 짓눌렀다. 이어 군인들은 두 사람에게 버스바닥을 개처럼 기게 하고, 담뱃불로 지지는 등 구타와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진술했다.

이원갑씨는 연행당시 상황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버스에 강제로 연행된 광부들은 모두 버스에 연행한 뒤 바닥에 엎드려 꼼짝 못하게 했다. 계엄군들은 버스가 사북읍사무소를 출발해 10분쯤 지난 뒤 ‘이원갑이 누구야!’하며 물었다. 그래서 ‘내가 이원갑’이라고 말하자 일어서라고 했다.

그러자 군인들은 버스천정에 붙은 손잡이에 수갑을 이용해 양 손을 고정시켰다. 그런 다음 이들은 ‘이새끼 때문에 경찰관이 죽고 100명 이나 다쳤다. 우리가 이놈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 빨갱이 같은 놈은 죽여야 한다’며 통로 양쪽에서 군인들이 군화발로 짓 밟고 총검으로 때리고 했다.”

당시 중앙일보 태백, 정선지역 주재기자 탁경명은 당시 사북읍사무소에서 유일하게 광부들의 연행과정을 취재하던 중, 계엄사 군인들에 의해 폭행당하고 인근 군부대로 연행되어 같은 날 밤 12시까지 군부대 연병장에서 군인 2명이 총을 겨누고 폭행하는 등 불법감금, 폭행당했다고 진술했다

1980년 5월 6일 1차 검거이후 연행된 박노연, 노금옥, 윤병천, 안재, 이명득, 전효덕, 장승남, 이완형, 강윤호 등은 연행과정에서 합동수사단 소속 군인과 경찰들이 군화발로 차고 밟고, 각목으로 전신을 구타하는 등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진술했다.

근로복지공단 태백병원 진폐병동에 입원 요양중인 박노연씨는 1980년 5월 8일 당시 상황을 며칠 전 일처럼 정확하게 기억했다.

“밤 12시까지 하는 을방근무를 마친 뒤 집에 와서 대충 씻고 라면을 끓여 먹었다. 애들은 잠을 자는 시간에 파자마를 입은 상태로 있다가 군인들이 문을 두드리며 들이 닥쳤다. 파자마를 입은 채 끌려 나갔는데 회사 통근버스에 태워졌다. 버스에 오르니 갑방(낮 근무) 퇴근 동료 7, 8명이 먼저 잡혀 와 있었다.

버스에 태워지자 곧장 군인들은 군화발로 짓밟으며 버스 바닥에 머리를 박도록 했다. 버스에 탄 군인들은 모두 20명이 넘는 것 갔았다. 붙잡혀 가면서 무자비 하게 폭행당하고 그들은 우리에게 사람이 아니라 짐승처럼 취급했다. 비인간적인 욕설과 무지비한 폭행이 자행된 것이다.”

▲사북광업소 공터에 방치된 사북광업소 통근버스. ⓒ프레시안(홍춘봉)

특히 강윤호씨는 부인과 함께 견디기 힘든 고초와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했다.

“당시 을방 퇴근을 하고 새벽녘에 자고 있었는데 사복을 입은 사람 세 명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 나를 끌고 갔다. 당시 집사람이 넷째 아이 출산을 앞두고 있었는데 형사들이 문을 갑자기 박차고 들어오자 너무 놀라서 아기를 낳고 말았다.

내가 끌려가면서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무의식적으로)돌아보는데 형사들이 그대로 (나의)팔을 꺽으며 끌고 갔다. 갑자기 출산한 아내의 건강과 핏덩이 아이를 챙겨주지 못하는 상황을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끌려 나가니 마이크로버스가 서 있었고 몇 사람이 먼저 잡혀와 있었다.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해서 누구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끌려가서 도착한 곳은 정선경찰서였다. 나의 아내는 나중에 들은 바로는 갑자기 애기가 쏟아지니까 내가 잡혀가도 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힘든 몸을 이끌고 혼자서 탯줄을 자르고 수습을 했다고 들었다.”

또 운병천씨는 “1980년 5월 8일 오후 7시께 집에 있는데 군복을 입은 사람 둘이 와서 이름을 부르기에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러자 이들은 양쪽 어깨와 팔을 잡고 수갑을 채워더라. 그리고는 집 옆에 세워 놓은 지프차에 태우면서 군화발로 얼굴을 걷어차 이빨이 5개나 깨어지고 피투성이가 되었다.”고 치를 떨었다.

특히 장승남(동원탄좌 광부)씨도 “당시 강원도경 수사관들이 사진명부를 확인한 후 나를 체포, 연행했다. 연행과정에서 정선경찰서 김성한 형사계장이 각목으로 등짝을 인정 사정 없이 무자비하게 내리치고 군화발로 찼다”고 생생하게 증언했다.

‘사북사건’ 조사대상자 검거작전에 참여했던 당시 경찰관, 김성한(정선경찰서 형사계장), 김찬수(정선경창서 형사계 순경), 박장순(춘천경찰서 형사계 순경)씨 등은 연행과정에서 광부들에게 펼친 불법과 탈법 내용을 진술했다.

이들은 피의자들에 대한 영장 제시나 혐의사실 고지가 전혀 없었으며 연행 광부들을 군화발로 밟고 구타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당시 장성경찰서 수사과 조사계에 근무하다가 정선경찰서에서 연행된 광부와 부녀자들을 직접 목격한 이용재 경장은 “정선경찰서에 연행된 광부와 부녀자들은 모두 머리가 터지거나 다리를 절룩거리는 등 연행되는 과정에서 폭행당한 흔적이 뚜렸했다”며 “심지어 일부 부녀자들은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한 상태”라고 증언했다.

‘진실위’는 조사결과 당시 연행된 광부들은 고문을 당한 장소가 정선경찰서에서 강당 건물로 사용하던 임시 조사실이었으며 건물 내부에 합판으로 임시 칸막이를 쳐 놓고 각 칸에서 광부와 부녀자들을 조사하고 가혹행위를 했다는 진술을 공통적으로 기록했다.

이원갑씨는 “구금된 장소는 정선경찰서 유치장이었고 조사를 받던 장소는 유치장 옆 큰 강당 같은 건물에 합판으로 칸을 친 곳에서 한 사람씩 조사를 받았다”고 말했다.

특히 당시 정선경찰서에 연행된 광부들 가운데 일부는 임시 조사실뿐 아니라 정선경찰서 유치장에서도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윤병천씨는 “유치장에서도 경찰과 군인들의 고문과 폭행을 숱하게 보았다”며 “베니어판으로 만든 간이 조사실에서도 옆 자리에서 맞는 비명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다”고 말했다.

또 민기복씨도 “사택에서 연행된 뒤 정선경찰서 유치장에서 잠을 잤다. 낮에도 유치장에 있다가 조사받을 때만 칸막이 된 조사실로 불려갔다. 한 번 가면 40여 분 정도 있었다. 처음에는 1시간 이상 조사를 받았다. 유치장에는 경찰복을 입은 경찰관들이 지켰는데 밤에는 이들 경찰관들이 보복차원인지 유치장 바깥으로 끌어내 주먹과 발, 그리고 휴대용 경찰봉으로 사정없이 온 몸을 때렸다”고 치를 떨며 진술했다.

이어 광부들은 당시 경찰서에서 조사관들이 행한 악랄한 고문과 무자비한 폭행에 대해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강윤호씨는 지난 2006년 8월 1일 진실위 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정선경찰서에 처음 도착하자 볼펜고문을 시작했다. 볼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비틀고 무릎 뒤에 각목을 끼우고 앉혀 허벅지를 짓밟았다. 비명이 나도 모르게 나왔고 난생 처음 당하는 고문으로 참을 수가 없는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각목으로 하도 맞아서 걸음도 못 걸을 정도였다. 또 양 손목과 발목을 묶고 가운데 곡갱이 자루를 가로 질러 책상 사이에 걸어 놓고 고춧가루 탄 물을 코와 입에 번갈아 들이 부었다. 이것이 통닭구이 고문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이어 꿇어 않힌 상태에서 1미터 정도 되는 각목으로 어깨를 두드려 패고 고통에 힘들어 바닥에 쓰러지면 군화발로 얼굴을 짓밟았다. 내가 조사를 하는 경찰관에게 맞아서 바닥에 쓰러지면 조사실 바닥 벽 틈으로 옆 조사실에서 맞는 여자들의 잠깐 볼 수가 있었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작가 조세희씨가 1980년대 이원갑씨를 취재하며 촬영한 이원갑씨 사진. ⓒ이원갑

물론 잠깐 동안의 시간이었지만. 옆 조사실에서 형사가 “쌍×아, 묻는 말에 대답해!”라고 욕을 하면서 발로 차고 여자는 양 손을 가슴에 모으고 발발 떨면서 나처럼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머리는 산발해 헝클어진 처참한 모습이었다. 나도 그런 여자처럼 당했던 것이었다.”

또 비슷한 고문을 당한 최흥선씨는 “고춧가루 탄 물을 큰 주전자에 담아 코로 들이 부었다. 또 무릎 뒤에 각목을 끼우고 꿇어앉힌 자세에서 허벅지로 군화발로 밟았다. 둥근 나무 몽둥이도 온 몸을 수도 없이 맞았다. 맞다가 정신을 잃으면 고춧가루 물을 먹이고 다시 매를 맞고 그런 일이 반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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