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과학, 특히 생명과학의 추세에 약간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은 그 내용을 잘 모르더라도 적어도 대부분 '크리스퍼(CRISPR)'로 불리는 유전자 가위 기술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2012년부터 급속도로 발달하기 시작한 이 분야는 현재 생명과학계를 넘어서 전체 세계 과학계에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화두이다.
과학계의 권위 있는 학술지 <사이언스>는 2013년 그 해 가장 영향력 있는 과학적 성과로 크리스퍼 기술을 선정하였다. 또 2014년 [MIT 테크놀로지리뷰]
<사이언스>는 2015년 또 다시 크리스퍼 기술을 가장 중요한 10대 발견으로 꼽고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 언급하였다. 또 올해 2016년 8월 권위와 대중성을 모두 갖는 일반 과학 잡지 <내셔날 지오그래픽>은 크리스퍼 기술을 'DNA 혁명'으로 언급하며 그 명암에 대한 특집호를 내기도 했다.
많은 과학자들은 크리스퍼 기술의 발견자들이 이미 노벨상 0순위를 예약하고 있으며, 앞으로 당분간은 이를 뛰어넘을 만한 비약적 발견이 나오기 어려울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도대체 크리스퍼 기술이 무엇이며 어떤 가능성이 있기에 혁명이란 단어까지 사용되면서 그 가능성과 위험성을 논하고 있는 것일까. 앞으로 몇 번에 걸쳐서는 크리스퍼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해 보고자 한다.
이 연재를 계속 읽어 온 독자들은 이제는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유전 정보 전체를 이르는 유전체 혹은 게놈이라는 단어에 익숙할 것이다.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 각각에는 DNA 형태로 유전체 정보가 담겨 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 결과 사람의 유전체 DNA는 약 30억 개의 염기쌍으로 구성되고 2만5000개 정도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질병 중 유전체 내의 유전 정보인 유전자가 잘못되어 발생하는 질환을 유전병이라 부른다. 이런 경우 질환은 유전 정보를 따라 자손 세대에서도 계속 나타날 수 있다. 혈우병이나 낭포성섬유증 등 인간에게 치명적인 질환 중에는 약 2만5000개 유전자 중 단 하나의 유전자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발생하는 유전병의 경우가 적어도 수천 개라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1980년대 이후 DNA를 인간의 의도대로 임의로 조작할 수 있는 기술인 DNA 재조합 기술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부터 과학자들은 질병을 유발하는 잘못된 유전자를 고치고자 하는 '유전자 치료(gene therapy)'를 꿈꾸게 되었다. 그러나 2012년 이후 크리스퍼 기술이 개발되기 전까지 우리는 30억 개의 DNA 염기쌍 중 의도하는 특정 유전 정보만을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수정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고, 유전자 치료의 상용화는 계속 먼 미래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2013년부터 유전체 내의 특정 유전자 염기 서열을 인식해 자르는 '유전자 가위'를 포함해 유전체 DNA 정보를 의도적으로 자르고 붙이고 고치는 유전체 교정(genome editing) 기술인 크리스퍼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하였다.
이 기술은 자신의 몸에 침입한 바이러스의 DNA를 절단해 자신의 유전체 내에 저장해 가지고 있다가 다음에 다시 같은 유전 정보를 갖는 바이러스가 침입하면 저장된 정보로부터 침입한 DNA 염기 서열을 인식해 잘라 버려 무력화하는 세균의 면역 반응 시스템에서 유래되었다.
크리스퍼 유전자는 1987년 세균의 유전체를 연구하던 일본 과학자가 최초로 발견했다. 그 당시에는 이 유전자가 세균에서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로부터 7년 후인 1994년, 염기 서열 정밀 분석 결과 다양한 세균들이 모두 크리스퍼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며, 크리스퍼 유전자 내에 바이러스의 염기 서열이 존재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그 기능은 규명하지 못한 채, 반복적으로 DNA 회문 구조를 만들 수 있는 염기 서열이 나타난다는 것에서 착안하여 그 영문 머리글자를 따서 지금 이 기술의 이름으로 알려진 크리스퍼(Clustered Regularly Interspaced Short Palindromic Repeats, 간헐적으로 반복되는 회문 구조 염기 서열 집합체)로 명명했을 뿐이었다.
크리스퍼의 기능은 2007년 덴마크의 요구르트 회사 DANISCO의 연구원에 의해 최초로 규명되었다. 요구르트 발효를 책임지는 유산균은 바이러스 감염에 취약한데, 특정 유산균이 바이러스에 내성을 가진 것처럼 행동하는 현상을 발견한 것이다. 바이러스에 내성을 갖는 것처럼 보이는 유산균의 게놈을 분석해 본 결과, 크리스퍼 유전자들이 활성화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으며 유산균을 공격하는 바이러스인 박테리오파지의 유전자 염기 서열이 세균의 크리스퍼 유전자 사이에 존재하는 것도 발견하였다.
이전에는 고등 생명체에 있는 적응 면역 반응이 세균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과학계가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이 발견으로 그 동안 고등 생명체에만 존재한다고 믿어져 왔던 적응 면역이 박테리아에도 존재한다는 사실과, 세균의 크리스퍼 유전자가 고등 동물의 적응 면역과 비슷해 보이는 기능 수행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이후 2012년 두 여성 과학자 버클리 대학교의 제니퍼 다우드나와 스웨덴 우메어 대학교의 엠마뉴엘 카펜디어는 크리스퍼의 작동 메커니즘을 상세히 규명한 논문을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세균은 침입한 바이러스인 박테리오파지의 염기 서열을 절단하여 크리스퍼 유전자 사이에 저장하며, 박테리오파지가 다시 침입하면 그에 대한 반응으로 크리스퍼 유전자 사이의 파지 염기 서열을 RNA로 전사하고 이 RNA가 DNA를 절단할 수 있는 Cas9 단백질과 결합하여 잘라내고자 하는 염기 서열로 Cas9 단백질을 유도한 후 침입한 파지 DNA를 절단한다는 것이다.
이 연구 과정에서 다우드나와 카펜디어는 박테리오파지의 염기 서열은 21bp 길이로 잘려 크리스퍼 유전자 내에 보관되었다가 사용되는데, 박테리오파지의 염기 서열이 아닌 21bp 길이의 임의의 염기 서열을 크리스퍼 유전자 사이에 삽입해도 이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여 DNA를 절단하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발견으로 크리스퍼는 기존의 효율성과 특이성이 떨어져 유전체에 사용하기 어려웠던 유전자 가위들을 대치할 수 있는 새로운 유전자 가위로서 효용성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불과 몇 년 전까지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던 크리스퍼를 일약 과학계의 핵심 이슈로 부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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