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학교(교장 이철승, 백두대간전문가)의 10월 백두대간종주 2구간은 <벽소령 구간>입니다. 백두대간학교는 예정한 대로 지난 9월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했으며, 참가자 전원이 <천왕봉 구간>을 완주했습니다.
백두산 장군봉에서 지리산 천왕봉까지 이어진 산줄기 ‘백두대간’. 총 길이 1,625km의 백두대간은 단순한 산줄기가 아닙니다. 이 땅 모든 산줄기와 강줄기의 시원입니다. 또한 한반도 허파이자 생태계의 보고입니다. 이 땅에 기대어 살고 있는 모든 생명의 근간입니다. 백두대간 줄기 따라 물이 흐르고, 마을이 생겨 사람들이 깃들어 살았습니다. 공동체가 형성되고 문화가 생성되었습니다. 백두대간은 우리의 삶이며 우리의 문화의 결정체입니다.
생명의 근간인 백두대간을 찾아가는 백두대간 종주는 우리의 근원을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우리의 삶과 문화에 대한 이해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인문학의 보따리를 찾아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입니다.
지난 6년간 60강에 걸쳐 백두대간 아름다운 산하를 걸었던 백두대간학교는 백두대간의 결정체인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했습니다. 총 길이 1,625km의 백두대간 중 우리가 걸을 수 있는 남측 구간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강원도 고성 향로봉까지 701km입니다. 이중 비법정탐방로 79.9km를 제외하면 도상거리 621.1km입니다. 접속구간을 포함하면 실제 백두대간 종주거리는 약 1,000km에 이릅니다.
지난 9월부터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삶과 문화를 찾아 떠나는 여정입니다. 마음 한 켠 간직해왔던 꿈을 찾아 떠나는 희망의 발걸음입니다. 백두대간 종주는 힘든 여정이지만 도반들과 함께라면 거뜬하게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혼자 걸으면 나의 길이 되지만, 함께 걸으면 모두의 희망이 됩니다.” 모두의 희망인 ‘백두대간 종주’ 힘차게 출발합니다!
[산행지 안내]
백두대간학교 제62강 10월 산행은 백두대간 종주 두 번째 산행입니다. 산행일은 10월 15일(토) <백구대간 지리산권역 벽소령 구간>입니다.
백두대간 종주 두 번째 산행도 지리산 구간입니다. 가을의 절정으로 달리고 있는 지리산으로 들어갑니다. 선홍빛 단풍이 은빛 폭포수와 자아내는 환상 속으로 들어갑니다. 빠알간 단풍이 투명한 계곡을 두둥실 유영하는 백무동에서 지리산 구십구곡(九十九谷) 중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한신계곡과 나란히 오릅니다. 사철 푸르른 구상나무와 억새 흐드러진 세석고원에서 백두대간 마루금으로 올라섭니다. 영신봉을 지나 칠선봉으로 이어진 주능선에 펼쳐진 치명적인 가을의 아름다움은 가히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덕평봉을 지나 선비샘 시원한 약수로 갈증을 달래고 달빛 아름다운 벽소령에서 가을에게 편지를 띠웁니다. 가을이 한창인 벽소령의 빨간 우체통에 그리움을 실어 보냅니다.
[구간소개]
-산행월일 : 2016년 10월 15일(토)
-산행출발 : 2016년 10월 14일(금) 오후 11시
-산행코스 : 백무동-가내소폭포-세석고원-영신봉-칠선봉-벽소령-음정마을
-산행거리 : 약 19.5km(도상거리)
-소요시간 : 약 12시간
-난 이 도 : 상하(★★☆)
이철승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0월 산행지 설명을 들어봅니다.
백두대간 종주 남측 구간 거리는 도상 약 701km입니다. 실종주 거리는 1,000km가 넘습니다. 백두대간 종주자의 꿈은 전 구간을 계속 이어 진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종주는 구간을 나누어서 종주를 이어갑니다. 백두대간 종주 실거리가 1,000km가 되는 이유는 바로 이 접속구간 때문입니다. 백두대간학교 두 번째 종주구간인 <벽소령 구간>도 어프로치구간이 무척 깁니다. 백무동에서 세석고원까지, 그리고 벽소령에서 음정마을까지가 어프로치구간입니다.
산행의 출발은 백무동입니다. 예전에는 천왕봉에 기도를 올리는 무당들이 많았다는 백무(白巫)동은 늘 하얀 안개가 감싸고 있어 백무(白霧)동이라고도 합니다. 그 후 무관이었던 전주이씨가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백무(白武)동이로고 합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반딧불이들의 유영이 시작됩니다. 백두대간 종주를 꿈꾸며 어머니의 산으로 들어가는 백두대간학교 도반들입니다. 길게 늘어진 반딧불이들은 백두대간을 종주하다보면 종종 마주치게 됩니다. 다들 백두대간 종주를 꿈꾸며 걷는 트레커들입니다.
콰아알콸 흐르는 물소리와 함께 어머니의 품속으로 첫 발을 디딥니다. 아름드리 느티나무를 지나 장터목으로 이어지는 갈림길에서 직진하여 한신계곡을 향합니다. 지리산 구십구곡 중 하나인 한신계곡은 풍부한 수량과 많은 폭포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첫나들이폭포, 가내소폭포, 오층폭포, 한신폭포가 차례로 맞아줍니다. 폭포수와 따라 어둠 속을 유영하다 보면 나무들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서서히 미명이 밝아오고 한신폭포를 지나 가파른 경사가 이어집니다. 나무뿌리와 나무 둥치를 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올라서면 세석고원입니다.
영진과 호야의 슬픈 사랑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세석고원은 촛대봉과 영신봉의 호위 아래 가을이 한창입니다. 청록의 구상나무와 어우러진 철쭉의 단풍은 처연한 아름다움을 선사합니다. 구상나무의 푸르름과 철쭉잎의 빨간 단풍은 영진과 호야의 슬픔을 담고 있는 듯 애절함이 흐릅니다. 바람에 하늘거리는 하얀 억새꽃도 흰 구절초도 왠지 쓸쓸합니다.
세석대피소에서 도반들과 삼삼오오 모여 아침식사를 나눕니다. 알싸한 아침 공기와 향긋한 가을햇살을 반찬 삼아 오순도순 이야기 나누는 시간입니다. 지리산 시인의 시 한 수 더해지면 금상첨화입니다.
단풍의 이유
-이원규
이 가을에 한 번이라도
타오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하다
내내 가슴이 시퍼런 이는 불쌍하다
단풍잎들 일제히
입을 앙다문 채 사색이 되지만
단 한 번이라도
타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너는 붉나무로
나는 단풍으로
온몸으로 달아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사랑도 그와 같아서
무작정 불을 지르고 볼 일이다
폭설이 내려 온몸이 얼고
얼다가 축축이 젖을 때까지
합장의 뼈마디에 번쩍 혼불이 일 때까지
지리산은 이곳 세석고원에서 또 하나의 산줄기를 뿌려 놓습니다. <산경표(山徑表)>에서 낙남정간이라고 표기한 낙남정맥입니다. 세석고원 위 영신봉에서 출발해 김해 고암나루에서 여맥을 다하는 낙남정맥입니다. 지리산 남부능선을 따라 이어진 낙남정맥과 첩첩이 쌓인 산들의 중첩은 그리움을 떠올리게 합니다. 낙남정맥 분기점을 지나 마루금을 따라 걷는 길은 구절초와 쑥부쟁이의 길입니다. 하얀 구절초와 연보라의 쑥부쟁이가 바람에 한들한들 가을을 이야기합니다. 가을의 이야기를 들으며 백두대간을 노닙니다.
수직의 바위 절벽, 한 그루의 소나무가 아찔한 아름다움을 선사합니다. 멀리 반야봉으로 이어진 지리산의 주능선을 배경 삼은 노송은 의연합니다. 꼿꼿한 선비의 기개를 느끼게 합니다.
깎아지른 절벽길을 내려서면 계단이 보입니다. 내려서는 계단길의 길이가 장난이 아닙니다. 내심 내리막 계단임에 안심하며 나무계단을 내려옵니다. 능선 오른쪽으로는 작은새골, 큰새골, 한신계곡, 한신지곡이 아스라하고, 왼쪽으로는 삼신능선 아래 큰세개골, 작은세개골이 흐르다 합수하여 대성골로 흐릅니다. 골골마다 새겨진 아픔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지리산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습니다.
가을 고산(高山)에는 진보라 용담(龍膽)꽃이 꽃봉우리를 겹겹으로 세우고 있습니다. 누가 용의 쓸개를 보았는지 모르지만 용의 쓸개를 닮은 꽃이라고 합니다. 용담과 사초(莎草)가 하늘거리는 마루금은 칠선봉을 지나 덕평봉으로 이어집니다. 덕평봉 아래 늙은 아버지의 소원을 풀어주는 아들들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선비샘이 졸졸졸 시원한 생명수를 쏟아냅니다. 산행의 갈증은 선비샘 약수 한 모금으로 씻은 듯이 해소됩니다. 효자들의 정성이 담겨서인지 단방에 마음이 후련해집니다.
덕평봉을 내려서면 오공능선이 오른쪽으로 이어집니다. 백무동 입구의 오공산까지 이어진 능선입니다. 광대골과 백무동계곡을 거느리고 있는 능선입니다. 넓은 공터가 나오고 작은 임도가 이어집니다. 산죽과 나란히 걷는 길입니다.
구벽소령에서 벽소령까지의 마루금은 옛 군사도로였던 임도를 따라 늘어져 있습니다. 암갈색의 대피소가 보이면 푸른 달빛이 아름다운 벽소령입니다. 벽소령에서의 달맞이는 지리산10경 중 하나입니다. 실제로 벽소령에서의 달맞이는 청아하고 고결한 느낌이 들게 합니다. 하지만 낮에는 벽소명월을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벽소령의 청아한 정취는 자연스럽게 피부에 와 닿습니다.
벽소령대피소 입구에는 빨간 우체통이 있습니다. 파아란 가을하늘에 편지를 씁니다. 구절초 하얀 꽃잎에 연서를 띠웁니다. 노랗게 물든 단풍에 그리움을 전합니다. 범나비의 하늘거리는 날갯짓에 가을을 실어 보냅니다. 그리움을 띠워 빨간 우체통에 넣습니다. 산 아래 그리운 이들에게 지리산의 가을을 보냅니다. 백두대간의 가을도 함께 동봉합니다.
그리움을 반찬삼아 도반들과 점심식사를 나누고 벽소령과 작별합니다. 오늘의 백두대간은 벽소령에서 내려섭니다. 오른쪽 음정마을로 발길을 옮깁니다. 단풍의 숲속으로 들어갑니다. 너덜길 내리막길입니다. 단풍의 틈, 언뜻언뜻 보이는 파란 하늘 사이로 내려서는 길입니다. 너른 임도가 보입니다. 이제부터는 계속 넓은 임도를 따라 걷는 한산한 길입니다. 길가의 쑥부쟁이와 나란히 걸으며 음정마을로 향합니다. 알록달록 지붕들이 보이면 음정마을입니다. 음정마을주차장 백두대간 벽소령탑 앞에서 산을 나옵니다.
함양 마천골로 이동해서 토종지리산 흑돼지 삼겹살과 막걸리로 지리산 가을을 떠나보냅니다. 함께한 도반들과 마음 나누며, 다음 종주를 기약하며 술잔 기울입니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가을을 떠나보냅니다.
[산행계획]
여유 있는 산행을 위해 일찍 출발합니다. 모든 산행은 전문산악가이드와 동행하며 '안전제일'로 진행합니다. 공인 등산가이드이신 이철승 교장선생님과 엄재용선생님 외 전문가이드 선생님이 선두와 후미 그리고 중간에서 함께 하며 평안하고 안전한 산행을 진행합니다.
<버스운행>
출발 10분 전에 도착하여 버스에 탑승하세요. 버스 앞에 <백두대간학교> 표지가 붙어 있습니다.
10월 14일(금) 오후 11시
23:00 덕수궁 대한문앞 출발(지하철 1,2호선 시청역 2번 출구)
23:30 사당역 공영주차장앞 출발(지하철 2,4호선 1번 출구)
23:40 양재역 서초구청 폭포앞 출발(지하철 3호선 12번 출구)
23:55 경부고속도로 죽전(하행) 버스승차장
10월 15일(토)
00:05 경부고속도로 신갈(하행) 버스승차장
<산행일정>
03:20 백무동주차장 도착/산행 준비 & 스트레칭
03:30 백무동주차장 출발 – 산행 시작
03:40 장터목 갈림길
04:50 가내소폭포
07:00 세석고원 - 대피소에서 아침식사
08:00 영신봉 하단 낙남정맥 갈림길
08:50 칠선봉
09:40 선비샘
11:20 벽소령 - 대피소에서 점심식사
13:20 연하천 갈림길
15:30 음정마을주차장 - 산행 마감/스트레칭 - 버스 이동
마천흑돼지촌(경남 함양군 마천면) -지리산 흑돼지 삼겹살과 막걸리로 뒤풀이
17:00 마천 출발
20:30 서울 도착(예정)
*상기 시간 일정은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산행준비물]
등산복, 장갑, 등산모, 방풍재킷, 우의, 스틱, 물통,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 그리고 도시락 2개(아침, 점심)를 준비하세요.
[2016년 11월 백두대간 종주 3구간 산행 안내]
-산 행 지 : 백두대간 중화지구권역 금산 구간
-산행일시 : 2016년 11월 19일(토) - 무박 산행
-출발일시 : 2016년 11월 18일(금) 오후 11시
-산행코스 : 큰재-국수봉-용문산-작점고개-금산-추풍령
-산행거리 : 약 18.7km
-소요시간 : 약 10시간
-난 이 도 : 중중(★☆)
*예정된 <지리산 노고단 구간>은 산불방지기간 입산금지로 중화지구 용문산 구간으로 변경합니다.
*상기 일정은 현지의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백두대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지리산(智異山)] 1967년 12월 27일 우리나라 첫 국립공원으로 지정.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한다.
‘지리산’이란 지명에 대해 현재 남아있는 역사물로 가장 오래된 것은 통일신라시대(887년) 최치원 선생의 쌍계사 <진감선사 비문>에 등장하는 ‘智異山’이다. 다만,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에 통일신라 흥덕왕조 828년 “당에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사신 대렴이 차나무 씨앗을 가지고 오니, 왕이 지리산(地理山)에 심게 하였다”가 최초인데 <삼국사기>의 기타 기사에도 ‘地理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에는 오늘날과 같이 ‘智異山’으로 표기되어있다. 고려시대 이후 지리산은 또 다른 이름인 ‘두류산(頭流山)’으로 개인문집이나 유람기 등에 등장한다. 또한 조선시대 영남학파들에 의해 ‘두류산’이라는 이름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호칭이 있는데 신선사상의 발로이자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 산세와 풍모의 미학적 장중함을 드러내는 덕산(德山), 민중적 변혁의식의 장소성이 반영된 불복산(不伏山)과 반역산(反逆山) 등도 지리산의 또 다른 별칭이다.
지리산 권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마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한의 도성이 지리산 달궁으로 피난했다는 설이 전해지며, 산청에 있는 구형왕릉은 신라왕국을 피해 6세기경에 지리산 자락에서 최후를 맞이한 가야국의 전설을 잘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리산 자락 골골이 숨어들어선 전통마을의 역사적 기원이나 형성 동기를 보면 많은 경우가 조선시대의 전란을 피해 입지하고 있다.
지리산의 험난한 역사는 삼한과 가야 및 삼국시대에는 국경의 접변지대로 싸움터의 무대였고, 고려 때는 왜구의 침입과 민란의 현장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대변되는 침략의 밀물을 겪어야 했다. 근대엔 동학민중운동과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에서 피로 얼룩진 전쟁터였다.
구례의 석주관, 고려 말 이성계가 섬멸한 남원의 황산대첩비지, 여원치와 피아골 등은 왜적을 막던 지리산의 역사적 현장이며, 특히 석주관에는 정유재란 때 순절한 의사의 위패를 모신 칠의단과 승병 및 의병을 모신 비석이 당시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다. 더욱이 지리산은 현대사에 접어들어 1948년 10월 여순사건에서 시작해 1955년까지 계속된 좌우 대립의 치열한 격전으로 수만 명의 목숨이 스러진 곳이다.
지리산은 험난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피난과 보신지의 터전이기도 했다. 이규경(1788~?)은 <청학동 변증설>에서 “우리나라의 형승은 험조한데, 산이 서리고 물이 감돌아 양의 창자 같은 곳이 아님이 없고, 그리하여 사이사이에 동천(洞天)과 복지(福地)가 많다”고 했으니 바로 골짝마다 삶터를 일굴 수 있는 지리산의 지형지세를 염두에 두고 일컬은 평인 것이다. 조선 중기 실학자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서도 지리산의 주거환경 조건을 말하기를 “지리산은 흙이 두텁고 기름져서 온 산이 모두 사람 살기에 알맞다. 산 안에 백리나 되는 긴 골짜기가 있어 바깥쪽은 좁으나 안은 넓어서 가끔 사람이 발견되지 못한 곳도 있다”고 적고 있다. 이런 표현들은 모두 피난지와 은거지로 적합한 지리산의 자연지형적 조건을 잘 나타낸 것이다. 또한 지리산의 온화한 기후와 맑고 충분한 수원, 농경에 필요한 토양 조건과 생태적인 풍요로움은 이곳이 한라산 혹은 변산, 금강산과 함께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으로 여겨진 배경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외부와 차단된 깊은 골짜기와 뛰어난 자연경관은 <정감록>의 십승지나 청학동 전설을 비롯한 이상향 관념이 생겨난 조건이 됐다.
지리산의 지리적 입지는 국가적인 요충지로서의 중요성과 아울러 국토의 남쪽 변방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바다에 인접해 외국의 선진 정보를 수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새로이 유입된 문화의 발상지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지리산 권역에서 불교문화의 역사적, 지리적 전개 양상을 보더라도 그렇다. 통일신라의 국찰이자 화엄십찰의 하나인 구례 화엄사의 입지는 국가적 요충지로서의 지리적 위상을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신라 말에 새로이 중국에서 유입된 선종의 구산선문 중에 실상산문의 실상사, 동리산문의 태안사 등 2개 산문 역시 지리산 권역에 태동하였던 것이다.
국토의 남쪽에 크게 둥지를 틀고 있는 지리산의 입지적 무게는 중심지에 대한 변방지역의 독립성과 근거지를 확보하는 장소성을 띤다. 따라서 지리산은 지배층의 견지에서는 반역지의 속성이 있었지만, 민중의 입장에서는 변혁의 근거지요 산실이기도 했다. 구산선문의 2개 산문이 지리산에서 일어난 통일신라 말 불교의 변혁과정도 그랬고, 동학을 위시한 근대의 민중운동도 그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다. 지리산의 호칭이 불복산, 반역산이라는 것도 이성계가 조선 창업의 뜻을 품고 명산을 순례하며 기도할 때 유독 지리산만 응하지 않았다고 하여 생겨난 이름으로, 지리산의 변혁적 장소성에 대한 지배계층의 의식을 잘 드러내어 주는 단면이다.
지리산 권역에서 태동된 판소리의 동편제는 서편제와는 대조적으로 지리산 산세의 웅혼함을 닮아서 메아리쳐 이루어진 음률이다. 그리고 남명 조식(1501~1572)의 장중한 사상적 무게와 그가 일상에서 견지한 공경과 의로움은 61세 이후로 덕산 자락에 터를 정해 산천제에 거처하고 스스로를 방장산인으로 여기면서 지리산과 한 몸이 된 결과이기도 했다. 남명의 문하에서 의병대장인 곽재우를 비롯, 조종도·정인홍·김효원·최영경 등 수많은 인물이 지리산의 봉우리처럼 배출됐고, 남명의 사상은 1862년의 진주민란, 동학혁명 등의 위정척사운동과 3월 독립운동, 그리고 형평사운동 등의 정신적 원동력이 되었다.
많은 생물종의 다양성을 갖추고 있는 지리산의 생태적 조건은 고대적인 신화와 의례에서 모성적 장소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천신의 딸인 성모 마고가 지리산에 하강해 딸 여덟 명을 낳아서 팔도에 보내 민속을 다스리게 했다는 전설뿐만 아니라, 김종직(1431~1492)의 <유두류록>에 의하면 석가여래의 어머니 마야 부인을 산신령으로 모셨다는 언급도 나온다. 신라는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 성모를 지리산의 산신으로 남악사에 봉안했고, 고려 때는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지리산의 산신으로 성모사에 봉사한 사실도 어머니 산으로서의 지리산의 역사적 상징 과정을 잘 표현해 준다.
-지리산 이름의 뜻
1. 신라 5악(岳) 중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智者]으로 달라진다’ 하여 ‘智異山’이라 하였다.
2. 조선조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찬탈하려고 명산에 기도를 드리러 다닐 때였다. 백두산과 금강산 신령은 쾌히 승낙하였는데 지리산 신령은 승낙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혜(智慧)가 다른[異] 신선이 사는 산이라 하여 지리산(智異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3. 백두산이 흘러와 된 산이라 하여 백두산(白頭山)의 '두(頭)' 흐를 '류(流)',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고, 남해에 이르기 전에 멈추었다 하여 머물 '류(留)' 두류산(頭留山)이라고도 한다. 이를 순우리말로 지리산의 산세가 두루뭉실하여서 '두루', '두리'를 한자로 차자하여 두류(頭流)가 되었다고도 한다.
4. 사명당 유정(惟(政)은 우리나라 명산을 이렇게 비교하여 말하였다. 금강산은 수이부장(秀而不壯)이요, 지리산은 장이불수(壯而不秀)요, 묘향산은 역수역장(亦秀亦壯)이라 하여 높이 1,909m의 산세가 기묘하고 향기를 풍긴다.
-지리산10경(智異山十景)
제 1경: 천왕일출(天王日出) - 천왕봉 일출
제 2경: 직전단풍(稷田丹楓) - 피아골 단풍
제 3경: 노고운해(老姑雲海) - 노고단 구름바다
제 4경: 반야낙조(般若落照) - 반야봉 일몰
제 5경: 벽소명월(碧宵明月) - 벽소령 밝은 달
제 6경: 세석척촉(細石躑躅) - 세석고원 철쭉
제 7경: 불일현폭(佛日懸瀑) - 불일폭포 낙수
제 8경: 연하선경(烟霞仙境) - 연하봉 선경
제 9경: 칠선계곡(七仙溪谷) - 칠선계곡 아름다운 풍광
제10경: 섬진청류(蟾津淸流) - 섬진강 맑은 물결
[세석고원] 1074m. 경남 산청의 거림계곡, 함양의 백무동, 하동의 청학동 등 여러 지역과 연결되는 지리산의 중심지인 세석고원(細石高原. 1400~1703m)은 약 30만평에 달하는 드넓은 면적과 남향으로 15도 경사를 이루며 완만하게 펼쳐진 지형이다. 이로 인해 남녘의 개마고원으로 불릴 정도로 지리산에서 가장 특이하고 인상적인 지형을 보이는 곳이다.
이곳에 자생하는 구상나무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의 지리산, 한라산, 덕유산 등 높은 산에서만 자라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세석고원에는 200여 종의 키 작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고 한다. 또 세석의 철쭉은 ‘지리산10경’의 하나로 ‘세석척촉’으로 유명하다.
오래전에는 작은 돌밖에 없는 토양지대라 해서 ‘잔돌고원’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 표현으로 바꾸어 세석평전이라고도 했는데 ‘평전(平田)’이 일본식 표기라는 의견이 있어 일반적으로 세석고원으로 불리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이현상의 남부군 주둔지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이곳에서는 남부군의 군중대회와 연극공연 등이 열렸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토벌대에 포위되어 몰살을 당했던 곳으로, 핏빛 철쭉이 피어나는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영신봉] 1651.9m. <산경표>에서는 낙남정맥을 ‘낙남정간’이라 하는데, 정맥의 시작되는 곳이 영신봉이다. 지리산을 지나 300~800m의 산들로 이어지는 낙남정맥의 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낙동강이 되고, 영신봉에서 옥산에 이르는 구간의 남쪽은 서쪽의 섬진강으로 물을 보낸다. 그러나 낙남정맥이 동쪽으로 방향을 정한 뒤로는 남쪽의 바닷가로 물이 흐른다. 마산의 무학산, 김해의 익산을 지나 낙동강 하구를 지키는 분성산(360m)을 지나 고암나루에서 그 여맥을 다하는 낙남정맥은 내륙과 남부 해안지방의 경계로 작용한다.
[낙남정맥] 지리산 영신봉(靈神峰. 1651m)에서 낙동강 남쪽을 가로지르며 김해 분성산(奮城山. 360m)까지 약 299km에 이르는 산줄기. 한반도 13정맥의 하나로, 영신봉에서 동남쪽으로 옥녀산(玉女山)·천금산(千金山)·무량산(無量山)·불모산(佛母山) 등으로 이어져 분성산에 이른다. 이 산줄기의 남쪽에는 대체로 경남 남서의 해안지방, 즉 하동·사천·삼천포·고성·마산·창원·김해가 위치한다.
[칠선봉] 1576m
북쪽으로 백무동계곡과 남쪽으로 대성동계곡이 조망되는 위치다. 봉우리 자체가 암릉으로 형성되어 있다. 천왕봉과 제석봉이 가까운 거리로 보이고 날씨가 좋을 때는 연하봉과의 사이에 있는 장터목산장까지 보인다. 일곱 개의 바위가 오밀조밀 모여서 정상을 이룬다고 해서 칠선봉이다.
[덕평봉] 1651m. 정상부가 ‘각지지 않고 평평한 것이 덕스러워 보인다’고 붙여진 덕평봉은 옛날 덕평마을이 자리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덕평마을의 원래 이름은 영신마을이었다. 덕평마을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일부의 주장은 선비샘 아래편의 상덕평 분지라고 하고, 또 다른 주장은 영신사에서 가까운 음양수 샘 부근이라고 한다.
화개동천의 의신마을에서 덕평봉(德坪峰) 선비샘으로 곧장 오르는 산길이 있다. 선비샘 직등 루트인 이 산길을 편의상 덕평봉 코스라고 부른다.
이 등산로는 가파른 부분과 평탄한 길이 번갈아 이어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부드러운 흙길로 이어져 있어 딱딱한 바위를 찾아보기 어렵다. 산행하는데 이상적이며 시종 서정적인 오솔길이 나타난다. 키 큰 나무들의 터널을 통과하는가 하면, 사람의 허리 정도의 산죽(山竹)밭을 지나기도 하고 억새풀밭을 거쳐 가기도 한다.
[선비샘] 의신마을에서 7km의 직등 루트를 올라 만나는 선비샘은 지리산 종주산행 코스에서 귀중한 식수를 제공해주는 곳이다.
선비샘에는 한 노인의 전설이 전해온다. 옛날 상덕평 마을에서 평생 동안 가난하고 천대받으며 살아온 한 노인이 사후에라도 사람대접 한번 받아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이 노인의 아들들은 선비샘 위에 무덤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샘에서 물을 뜰 때면 반드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도록 하여 결과적으로 이 노인의 무덤에 절을 하는 격이 되게끔 하였다는 것이다.
선비샘은 몇 해 전까지 무릎을 꿇고 물을 떠야 했다. 현재는 이 샘물을 파이프로 연결하여 선 채로 받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벽소령] 지리산 허리춤에 위치한 벽소령은 화개재나 장터목과 함께 지리산의 남북을 넘나드는 고개 중의 한 곳이다. 벽소령의 달밤은 여러 문장가들에 의해 시와 소설이 되었고, 한국전쟁 중 빨치산도 벽소령을 넘을 때 달빛 때문에 고향을 그리며 울었다고 한다. 밝다 못해 푸른 빛이 도는 지리산 달밤의 운치를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푸른 밤’이란 뜻의 벽소령(碧푸를벽宵밤소)은 언제부터 ‘벽소령’이라 불렸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전해오는 고서 및 고지도에 표기되어진 것을 보면 대개 1700년대로 추정한다. ‘벽소’라는 단어는 1751년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나온 듯하다.
조선시대의 <유산기>에서 벽소령을 최초로 언급한 사람은 진주 선비 하익범이다. 1807년 중산리-천왕봉-벽소령-칠불코스로 산행을 한 그는 “망암(칠선봉)을 따라 벽소령 냉천(선비샘) 역참까지 70리였는데 여기서부터 비로소 길이 아래로 꺾였다”고 <유두류록>에 기록 했다.
당시 양쪽 산자락의 고갯길이 시작되는 지점인 의신쪽의 삼정리와 마천쪽의 양정마을에는 주막까지 있어 지나는 길손들이 요기와 함께 숙박까지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군사정권시절(1972년) 작전도로가 생겼다. 한편 고개 밑의 의신마을 사람들은 벽소령을 ‘뱁실령’이라 부르고, 벽소령 샘을 ‘뱁실샘’이라 부른다. 500년 전의 기록물에 보이는 벽소령의 옛이름 ‘초료조재’ 즉 ‘뱁새재’가, 어원의 근거지인 옛날 의신사가 있었던 의신쪽 사람들이 부르는 ‘뱁실령’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보아진다. (자료출처 : 백두대간학교, 네이버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백과 등)
백두대간학교 이철승 교장선생님은 산행 경력 30년의 저명한 M.T.디자이너이며 국가공인 숲길체험지도사(산림청), 응급처치법 강사(대한적십자)입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배낭 하나 메고 지리산을 제집 드나들듯 들락거렸습니다. 산으로 들어가면 입 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며 얼굴이 환해집니다. 천상 산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연이어 정맥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등산학교를 졸업하고 백두대간 가이드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반산악회 가이드, 기업체 가이드, 목적산악회 가이드 등으로 활약하며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가이드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인문학습원 백두대간학교 개교부터 가이드로 동분서주했습니다.
백두대간 교양강좌, 트레킹학교 등의 실무를 도맡아 진행했고, 아이들과 뚜르드몽블랑(TMB), 몽블랑 일주 트레킹을 다녀왔으며, 흥덕고등학교 백두대간 종주대 <백두대간 하늘길를 걷다>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아이들과 백두대간 숲길을 거닐며 바람과 햇살, 구름, 안개, 곤충과 나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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