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유교가 비판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권력과 연계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학은 '학문과 정치 사이'를 왕래하는 학문이다. 공자는 "벼슬하면서 여유가 있으면 공부를 하고, 공부를 하여 성취가 있으면 벼슬을 하라"(<논어> '자하' 편)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나라에 도가 있으면'이라는 전제가 붙어 있긴 하다. 국가와 백성을 위해 온 몸을 바쳐 봉사하는 벼슬살이에는 도가 있고, 나라꼴은 안중에도 없이 오직 자기 이익만 챙기는 군주를 성심으로 받드는 벼슬살이에는 도가 없다. 여하튼 문(文)과 무(武)와 예(藝)에 성취한 지식인들은 그걸 제왕가에 팔며 여러 가지 벼슬을 살았다.
지식인들의 암투
가장 센 권력을 지닌 군주를 보좌하며 작은 권력을 부리던 벼슬아치들이 모두 유생들이었다는 이유 때문에 오늘날 유교는 버려야 할 유산이 되었다. 그런데 유학에선 벼슬보다 공부가 먼저다. 공부가 되어야 벼슬을 하는 것이다. 물론 제대로 공부를 한 사람이 벼슬을 하는 경우도 많지만 공부가 제대로 안 된 사람이 벼슬을 했을 때 문제가 크다. 과거 시험도 유학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진실한 유학은 시험 합격이 아니라 공부를 통한 자기 성취에 뜻이 있다. 시험 잘 보는 사람이 권력을 장악하고 공부가 된 사람 위에 군림하며 학문을 권력의 수하에 두려고 한 것이야말로 유교가 실패한 원인 중 하나이다.
이런 논쟁은 매우 오래되었다. 제나라 선비 안촉(顔斶)은 왕이 호출하자 '당신이 오라'고 당당히 맞섰다. 학문을 중요시해서 공부하는 사람을 부른 것이라면 당연히 찾아와 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만 옳다고 우기는 군주 밑에서 벼슬살이하기를 거절했다. 사실 공부는 수양을 통해 자기 완성을 해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공부하는 사람은 권력이나 돈벌이가 없더라도 그다지 괴롭지 않다. 있는 사람이 부럽지도 않다. 오히려 공부는 시험을 잘 보는 것이 아니라 뼈를 깎는 수양의 과정이기 때문에 어렵고 힘들다. 그래서 제나라의 어떤 선생은 낮에 짚신을 삼아 시장터에 팔고 거기서 생긴 수입으로 공부하려고 온 학생들에게 돈을 주어가면서 가르쳤다. 힘든 공부를 하니까. 스물이 넘은 성인들이 부모님께 '빌린' 많은 돈을 내고 맘에 들지 않는 수업 시간을 내내 참으며 직장 구하기에 매진하는 세상은 잘못되었다. 성악설의 주창자로 알려진 순자(荀子)의 고민은 이것이었다.
제나라는 공부가 된 사람들을 많이 모아 아카데미를 열었다. 수도 임치(臨淄)성 직문 밖이어서 직하학궁(稷下學宮)이라 불렀다. 학장급은 장차관 벼슬을 주었는데 순자는 총장격인 제주(祭酒)를 세 번이나 역임하였다. 달변에 뛰어난 재지와 술 실력을 지닌 순우곤 같은 학자도 있었으며 몇 푼 안 되는 공부로 동료를 해코지하고 장차관 벼슬을 탐하는 사이비 학자도 있었다. 순자는 엄격한 학문을 주문하였다. 많은 학자들을 비판하면서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말고 진실한 공부를 하고 '청출어람'의 후학을 기르라고 충고했다. 그러다 모함을 당해 쫓겨났으며 초나라 춘신군에 의해 오늘날 산동성에 있는 란링(蘭陵) 현령으로 발탁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또 모함을 당했다. 지식인의 암투는 언제나 지식 자체 때문이 아니라 벼슬과 관련이 있다.
순자는 많이 슬퍼하지 않았다. 학문의 본령은 자기 완성이고 사명은 좋은 제자를 기르는 데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또한 선배 유학자들처럼 유세를 다녔으나 목적이 벼슬에 있지 않았다. 그 나라 풍상을 보고 왕도정치가 더 낫다는 것을 알리는 정도였다. 공자가 "나를 써주는 왕이 있다면 나는 3년 안에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논어> '자로' 편)고 말하고, 맹자가 "천하를 다스리려면 오늘날 나 말고 누가 있겠는가!"(<맹자> '공손추하')라고 큰 소리 친 것에 비하면 순자는 어디서고 '나'를 내세우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말할 따름이었다.
"듣지 않음은 듣는 것만 못하고, 듣는 것은 보는 것만 못하며, 보는 것은 아는 것만 못하고, 아는 것은 실천하는 것만 못하다. 공부는 그것을 실천에 옮겼을 때 그친다." (<순자> '유효' 편)
예의 바른 세상을 위하여
순자가 강조한 실천적 지식은 예였다. "공부는 경전을 외우는 데서 시작하여 예를 읽는 데서 끝난다. 그 뜻은 선비가 되는 데서 시작하여 성인이 되는 데서 끝난다."(<순자> '권학' 편) 공부는 자기 완성을 통해 성인이 되는 것이 목적이다. 순자는 공자를 닮고 싶었다. 공자는 사색보다 책 읽는 것이 더 좋은 공부라고 말했는데, 순자도 종일 사색을 해봤지만 책을 읽느니만 못하더라고 한다. 책을 읽는 것은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바라보는 일이다. 시험공부 잘해서 높은 벼슬을 하는 따위가 아니다.
사람들이 권력을 얻어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것을 보면 확실히 인간 본성은 악하다. 예의는 이렇게 악한 본성을 눌러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는 가장 위대한 인간의 창조이다. 사람에겐 텅 비고 순일하며 고요한 맑디맑은 마음(心)이 있다. 이 마음 때문에 사람은 높은 인문학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 그리하여 지식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고 마침내 깨달은 사람이 성인이다. 성인은 예의를 만들어 삼라만상이 제 자리를 찾도록 했다. 지식의 성취를 인간의 완성이라고 본 점에서 순자는 중국 휴머니즘의 최고봉에 다다른 사람이다. 그는 어떤 분야든지 뛰어난 성취를 이루고 예의를 실천하는 사람이면 성인이라고 한다. 특히 정치가 그렇다. 정치가는 역사를 관통하여 면면히 흐르고 있는 예의의 대원칙을 이 땅에 구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지적인 성취를 이룬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하고 정치를 하는 사람은 지적인 성취를 이루어야 한다.
순자의 제자들 가운데 공부가 안 된 사람으로 벼슬과 권력만 추구한 진시황 때의 재상 이사 같은 인물도 있어 물을 흐리기는 했다. 그러나 한비자 등 대부분은 여러 방면의 지식에 뛰어난 성취를 이뤘고 순자의 학문은 그 후 천 년 간 중국 지식 엘리트 사회를 만드는 주류였다. 그러다 성리학의 등장으로 순자는 순식간에 나쁜 사람으로 전락하였다. 성악설을 주장했으니 순자도 악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그동안 인기가 없었던 성선설을 주장한 맹자가 살아났다. 주희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새로 '4서'로 펴냈고 그 후 천 년 동안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시험 과목을 좌지우지했다. 지식인들 암투의 또 다른 모습은 공부가 된 사람이든 아니든 '이단'을 만들고 죽기 살기로 공격하는 것이다. 순자는 이단이 되었고 비난을 받았으나 참된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암암리에 <순자>를 많이 읽었다.
공부가 안 된 사람이 벼슬살이를 하고 직장을 구하기 위한 시험 공부만 존재하는 반지성주의 세상에 대한 대안으로 순자가 부활하고 있다. 현대 중국에서 순자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지성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앙을 받는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순자의 정치 사상을 '예치(禮治)와 법치(法治)의 통합'이라며 인류 문명의 대안으로 얘기하기도 한다. 순자의 고향이라고 주장하는 네 지역에선 경쟁적으로 순자고등학교를 만들고 순자대학을 만들고 순자문화원을 만들었다. 나는 그 지역들을 돌아보면서, 순자를 연구하는 수 백 명의 중국학자들과 학술회의를 하면서, 한단(邯鄲)에서 순자에 대해 강연을 하면서 매번 '경험 지식'을 강조한 순자의 학문적 성취에 감동했다. 다음 주 순자의 무덤이 있는 란링에서 열리는 국제회의에 가서는 순자 <왕제>편의 다음 얘기에 주목해볼 생각이다.
"군주는 배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배를 뒤집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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