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에든버러
다음 날 우린 아침 버스를 타고 반 시간 정도 이동해 영국 왕실 유람선 ‘브리타니아호(Royal Yacht Britannia)’에 승선했다.
브리타니아? 어제 맨체스터에서 묵은 호텔도 ‘브리타니아호텔’이었는데 같은 이름이었다. 기웃기웃 배 내부를 살폈다. 내부에는 한국어 오디오 안내가 있어 이해하기 좋았다.
이 배는 여왕의 공식 해외 순방, 그리고 찰스와 다이애나의 신혼여행 때 이용되었다고 한다. 우린 선상에 올라 대서양을 바라봤다. ‘야호! 자전거 집시에게도 이렇게 호사한 시간이 주어지는구나!’
오후에는 ‘코끼리 집(The Elephant House)’으로 발길을 돌렸다. 코끼리가 사는 집이 아니라 코끼리 그림과 조각들을 온통 벽에 붙이고 걸어 놓은 집이었다.
에든버러 시내 한가운데 있는 이 코끼리 집은 관광객이 가장 많이 붐비는 카페였다. ‘이 카페의 커피 맛은 어떨까?’ 자전거 집시의 커피 맛 검증이 시작됐다.
줄 서고 한참을 기다려 카페라떼 한 잔, 아메리카노 한 잔, 피자 1/2을 주문했다. 맛본 결과는 커피 맛 50점, 피자 맛 20점. 이것도 후한 점수다.
자전거 집시가 그동안 유럽 5개국 순방하며 다양한 커피 맛을 경험해 봐서 수준이 꽤 높아졌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이 카페에 이렇게 많이 올까? 그 이유는 바로 베스트셀러《해리포터》 시리즈의 탄생지이기 때문이다. 작가 ‘조앤 K. 롤링(Joan K. Rowling)’은 미혼모 시절 외롭고 힘든 시간을 이곳 에든버러에서 보냈다.
남편이 없어 정부 지원금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고, 어린 딸을 혼자 양육하면서 우울증까지 시달리며 살아야 했던 무명 시절에 잠든 딸을 옆에 두고 이곳에서 몇 시간씩 글을 썼다고 한다.
서쪽 창으로 에든버러 성(Edinburgh Castle)이 보이고, 천장이 높아 밝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공간이었다. 작가 롤링은 《해리포터》 수입으로 영국에서 여왕을 제치고 최고의 여성 갑부가 되었다.
카페를 나오니 비가 오락가락했다. 몸이 무거워 자꾸 눕고 싶어졌다. 석 달 가까이 강행군을 하고 나니 분명 긴장이 풀린 탓일 게다.
칼튼 힐(Calton Hill)에 올랐다. 나폴레옹전쟁에서 전사한 병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미완성 석조 기둥 앞에서 별 의미 없는 사진을 한 장 찍은 뒤, 언덕을 내려와 국립박물관과 자일스 성당(St. Giles' Cathedral)에 들렀다.
이어 에든버러 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랜 세월 잉글랜드와 전투를 하면서 점령당하고 다시 탈환하는 수난의 역사를 간직한 곳인데, 이곳 사람들은 ‘스코틀랜드의 심장’이라고 부른단다. 들어가 보니 온통 말 타고, 창으로 찌르고, 불 지르고, 피 흘리는 회화 작품이다.
화려한 복장을 하고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영웅들과 처참하게 쓰러져 신음하는 병사들의 대조적인 장면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에든버러 독립의 역사. 전쟁의 역사. 피의 역사. 이를 정당화하고, 영웅시하고, 찬미하는 스토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린 스코틀랜드산 위스키를 시음했다. 위스키 맛이 확실히 달랐다. 마신 다음 입 속에 단맛과 향이 오래 남아 있었다. 시음 몇 잔 더 했더니 낮술에 취했다.
에든버러의 휴일. 시내 전체가 관광객으로 넘치고, 한 집 건너 기념품 가게는 어느 곳이나 만원이었다. 커다란 원형 철사에 주렁주렁 매달린 기념품 열쇠고리는 가게에 들어오는 사람마다 한 바퀴씩 홱 돌리고 지나갔다.
한 칸 쌓아 놓은 스코틀랜드산 체크무늬 목도리를 누군가가 들어와 통째로 꺼내 계산대로 가져갔다. 말소리를 들어 보니 중국인 같았다.
2층 버스와 트램이 쉴 새 없이 오가고, 투어 버스 옥상엔 비 맞으며 노부부들이 앉아 있었다. 머리 빠지면 어쩌려고……. 여러 나라에서 모여서 그런지 통행에 우측 좌측 구분이 없고, 연신 부딪혔다.
몸에 맞지 않는 헐거운 옷차림을 하고 바짓가랑이를 질질 끌고 다니는 젊은이들, 털옷 입은 남성과 민소매 차림에 머리카락이 빗물에 쓸려 모가지를 길게 덮은 여성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어떤 청년은 목덜미에 시퍼런 문신을 하고, 어떤 여성은 입술에 링 세 개를 꿰고 주둥이를 삐죽 내밀었다.
조각상 앞에 노랑머리의 아리따운 여성은 꺼내 든 담배를 잠시 만지작거리다가 순식간에 불을 붙이고는 왼발을 돌담에 들어 올린 채 파란 눈 지그시 하늘 향해 초점을 흐렸다.
검은 회색의 중세 건물들이 도시를 장악하고 있는 에든버러의 휴일은 그렇게 질척거렸다.
추니가 감기 몸살로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프다며 미리 처방받아 온 감기 몸살 약을 먹었다.
사실 감기 몸살은 걱정이 아니었다. 여행 오기 직전 추니가 척추협착증으로 석 달간 병원 치료를 받으면서 이번 여행을 갈까 말까 중대 기로를 맞았었다. 그때 참 난감했다.
하지만 결국 두 달분 약을 처방받아 이번 여행을 감행했다. 도중에 허리 통증이 심해지면 포기하기로 했는데 다행히도, 그리고 참 신기하게도 한 번도 약을 복용하지 않았다.
양손으로 핸들을 잡느라 허리를 앞으로 구부리니까 상체의 무게를 완화시켜 주는 효과가 있었나 보다.
그냥 오래 서 있으면 허리가 아픈데 자전거 안장에만 올라앉으면 허리가 시원하단다. 매일 5~10시간씩 자전거를 탔다. 아름다운 풍광에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즐거웠던 걸까?
아니면 해 저물어 잘 곳 찾느라 아플 틈이 없었던 걸까? 하여간 여정 내내 허리 아프단 소리를 들어 보지 못했다. 정말 감사하다.
스코틀랜드 독립 투표가 끝났는데도 아직 곳곳에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뒷얘기인 즉, 하루는 독립에 찬성하는 시가행진을 하고, 다음 날은 독립에 반대하는 시가행진을 했는데, 시위에 참가한 오토바이, 자전거, 걷는 이들로 시내 거리가 꽉 찼었단다. ‘스코틀랜드의 민족 자존심을 되찾자’, ‘사회경제의 안정을 유지하자’, 양쪽 모두 자신들의 의견을 토해 내면서도 큰 불상사는 없었다고 한다.
상대방이 왜 저런 의견을 갖고 있는지, 나의 의견과 다른 점은 뭔지, 혹시 내가 간과하고 있는 건 없는지 귀 기울이는 학습이 잘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이번에 우리 의견이 관철되지 않으면 모든 게 끝장이라는 생각으로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이겨야 한다는 행동은 찾아볼 수 없었단다.
물론 치열하게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비방과 모략이 없었을까마는 그런 것들은 상식적인 보통 시민들의 의식에 감응을 주지 못해 곧 녹아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는 사회, 가진 자들이 배려하는 사회, 결과에 쿨하게 승복할 줄 아는 사회가 부럽다.
에든버러는 오늘도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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