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북 ‘광부 소탕작전’ 공수부대 출동 비화
계엄사는 경찰의 시위진압이 실패하고 많은 경찰병력이 사상했다는 사실과 광부들이 광업소 사무실과 간부사택에 불을 지르고 광업소 간부들을 폭행한다는 보고를 받고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했다.
‘진실위’는 육군본부에서 발행한 ‘계엄사’ 자료를 통해 1980년 4월 공수부대 출동을 긴급 지시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확인했다.
《1980월 4월 22일 오후 11시 11특전여단(11공수) 61대대(장교 40명 사병 249명)가 사북사건 진압을 위해 원주로 부대 배속시켰다.(육작명 10-80호)
또 이튿날인 23일 오후 3시 34분께 계엄사 요청에 의해 공군 제10 전투비행단 132대대 소속 RF-5A기 2대가 정찰 및 사진 촬영의 목적으로 정선군 사북일대 상공을 비행했다.
사북지역 상황이 심각해지자 계엄사는 이어 23일 오후4시, 1군사령부는 사태수습 대책회의를 개최하고 한계령에서 훈련중이던 11특전여단 62대대(장교 40명 사병 290명)를 추가 배속명령을 내렸다.
계엄사는 이들 공수부대의 사북지역 수송을 위해 수송용헬기(UH-1H) 20대(총 140명 탑승), 가스살포차 2대, 장갑차 10대, 군인수송용 객차 15량을 출동 대기 시켰다.
계엄사가 공수부대 수송용헬기로 대기시킨 UH-1H기는 월남전에서 미군과 한국군이 밀림지역 전투에 가장 많이 이용한 헬기다.
당시 계엄군은 공수부대를 사북에 침투시키면 헬기를 이용해 공중에서 침투시키고 열차로 이동한 공수부대원들은 지상에 동시 투입할 작전계획을 세웠다.
이어 계엄사는 23일 오후 7시 10분께 육군본부에서 11공수 62대대의 사태진압을 위한 부대 이동과 배속지시 명령을 내렸다.
사북광업소 현장에 대한 병력투입 시점은 1980년 4월 25일 동틀무렵인 오전 5시였다. 광부들이 깊은 잠에 빠진 시간에 기습적으로 침투해 작전을 진행시킬 방침이었다.》
당시 ‘사북사건’의 진압을 위해 원주에서 출동을 대기했던 공수부대는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광주사건) 현장 진압에 나섰던 11공수특전여단 61대대와 62대대였다.
11공수특전여단은 당시 강원 화천군 간동면 오음리에 주둔하고 있었다.
공수부대는 북한의 ‘124군’ 등 게릴라 부대에 대응하기 위해 게릴라 전을 주임무로 탄생된 대한민국 최정예부대다.
‘광주사건’에서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이 광주 시민들에 의해 목격되고 숱한 피해를 내도록 하면서 공수부대 투입이 적절했는지 숱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만약 당시 공수부대원들이 헬기와 열차로 사북에 침투해 광부들을 진압했다면 1만에 육박하는 광부와 그 가족들이 거주했던 사북 지장산 사택단지 일대는 피바다로 물들고도 남았다.
공수부대 출동에 대비해 수천 명의 광부들이 광업소 예비군연대에 보관된 소총과 탄약, 수천 상자의 다이너마이트로 무장하고 전투가 펼쳤다면 최소 수천명 이상이 사망했을 것으로 분석했다.
그렇게 되었다면 ‘광주의 비극’은 발생되지 않고 사북 ‘광부의 비극’으로 역사의 흐름이 바뀔 수도 있었다.
1995년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역사바로세우기’ 명분을 내세워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사법처리 하기 위해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이 나서 수 많은 관련자와 증인을 조사했다.
그 가운데는 당시 ‘광주사건’ 현장에 출동해 공수부대를 지휘했던 11공수 61대대장 안부웅 중령의 진술은 시위대인 광주시민과 공수부대원들의 살벌했던 현장의 생생함이 그대로 묻어 났다.
안부웅 61대대장은 1995년 2월 13일 국방부 검찰부 고등검찰관실에서 진행된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특전여단의 주요임무는 유사시 적 후방지역에 투입되어 게릴라전 및 저항세력을 규합하여 테러행위 등을 하는 것이다. 평시에는 충전작전 및 대침투작전, 기타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평시에는 비정규전을 위주로 하는 훈련으로 적 후방지역에서 습격, 매복, 교란 행위 등을 하는 훈련을 한다. 모든 작전은 팀단위(중대급 또는 지대급)로 훈련을 하도록 되어 있다. 특전사 부대들은 연초에는 외부로 나가 하는 훈련을 안하기 때문에 주로 충정작전 훈련, 태권도 연마, 주특기 훈련 등을 한다.
충정훈련은 주로 폭동진압이나 대 테러행위 등의 임무를 말한다. 특히 충정훈련은 진압봉으로 대형을 갖춰 데모군중을 분리시켜 해산시키는 훈련을 말한다.“
한편 이원갑씨와 사북광업소 광부들은 일반 군인들이 아닌 공수부대가 자신들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다는 정보에 철저한 대비를 준비해야 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훈련된 특수부대이자 최정예 공수부대원들이 출동한다는 사실을 듣고 광부들은 긴장을 하며 즉각 대응에 나섰다.
그래서 공수부대와 맞서기 위해서는 광부들도 예비군연대 무기고와 광업소 화약고에 보관된 다이너마이트로 무장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당시 사북광업소는 4000명이 넘는 광부들이 근무했다. ‘진실위’ 조사결과 사북광업소 예비군연대로 편성된 직장예비군 무기고에는 칼빈소총 890정, M1소총 472정이 보관돼 있었다. 또 실탄도 10만 발이 넘었고, 채탄용 다이너마이트는 무려 60톤에 달했다. 1977년 11월 11일 발생한 전북 이리역 폭발사고 당시 화차에 보관된 화약은 30톤 이었다.
1980년 4월 22일 사북광업소 무기고를 지킨 박노연씨의 회고.
“나는 1969년 백마부대원으로 월남전에 참전했다. 약 23개월간 월남전 근무를 마치고 귀국했다. 사북사건이 발생한 뒤 이원갑씨로부터 무기고를 지키라는 지시를 받고 동료 20명 가량과 함께 무기고를 접수했다.
밤이 되면서 날씨가 추워지자 무기고 앞에 장작불을 피워 놓고 경계근무를 섰다. 외부인의 접근을 차단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협상이 종료된 뒤 동아일보 기자가 와서 무기고를 지킨 광부로 인터뷰를 해 4얼 26일자 신문에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월남전 참전 후유증인 고엽제 피해로 고통받고 있지만 보상은 쥐꼬리 수준에 불과하다.
현재는 진폐증으로 근로복지공단 태백병원 진폐병동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이원갑씨의 진술.
“당시 상황이 매우 급박했다. 공수부대가 출동하면 수많은 광부와 부녀자들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할 것이 우려되었다. 죽기 살기로 대응해야 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 무장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우선 무기고와 화약고를 접수한 뒤 공수부대가 출동하기 전에 무장을 시킬 필요를 느꼈고, 광부들도 이에 공감했다.
동료들 가운데 공수부대 출신과 월남전 참전용사 등을 선발해 무기고와 화약고 경비를 맡기고 공수부대 침투에 대비했다.
광부들이 무기고와 화약고를 장악한 사실을 알게 된 김성배 도지사는 심각해졌다. 당시 광부들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경찰이 광부들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파악했기 때문에 예비군 무기고와 화약고 점거 내용이 즉각 보고됐다.
그래서 김성배 도지사는 경찰과 계엄사에 공수부대 출동을 말렸다. 공수부대가 진압을 위해 사북에 출동하면 대규모 전투가 펼쳐지고 어마어마한 살육전이 펼쳐질 것으로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24일 오전 일찍부터 협상이 열렸고, 도지사 주도로 마련된 합의안에 광부들의 요구조건을 대폭 수용하게 된 것이다. 24일 협상이 타결되면서 25일 새벽에 예정된 공수부대 진압작전은 중지된 것이다.
만약 공수부대가 사북에 진압을 위해 투입되었다면 사북은 피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무장한 광부들은 당시 30대가 대부분이었다.
11공수가 출동해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펼쳤다면 수천명 이상의 사상자가 날 수 밖에 없었다. 광주는 대도시였지만 사북은 강원도 산골구석이다. 만약 사북에서 유혈사태가 발생했다면 광주유혈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진실위 소속으로 사북사건의 핵심을 조사했던 임채도 조사관(현 인권의학연구소 사무국장)의 진술.
“1980년 4월 사북사건 당시 공수부대 출동설에 대해 관련자료 확인과 관련자 진술을 통해 상당 부분 사실인 것을 확인했다. 특히 이러한 사실은 당시 계엄사령부가 미국 국무부에 보낸 전문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1980년 5.18과 관련된 문서와 함께 사북사건의 공수부대 진압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사북광업소 광부들의 평균 나이는 30대 중반이었고 상당수는 현역으로 군을 마치고 예비군 훈련을 받고 있는 사실상 정예군이었다.
공수부대가 출동했다면 사북광업소 예비군연대 무기고에 보관된 소총과 실탄으로 무장하고 공수부대 출동에 대비했을 것이다. 특히 사북광업소에는 이리역 폭발사고보다 많은 다이너마이트가 화약고에 보관된 상태였다.
하루만 협상타결이 늦었다면 공수부대 진압작전이 펼쳐졌고 최악의 유혈사태가 사북에서 발생할 뻔 했다. 만약 사북에서 공수부대와 사북광업소 광부들간의 전투가 벌어졌다면 광주의 비극은 발생되지 않고 엄청난 비극이 탄광촌 골짜기에서 벌어졌을 것이다. 정말 조사를 하면서 등에 식은 땀을 흘렸다.”
한편 사북사건이 4월 24일 오전 협상이 타결됨에 따라 출동대기 했던 11특전여단 61, 62대대는 5일 후인 29일 오후 8시 원주 1군사령부 부대배속이 해제되고 화천부대로 원대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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