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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김대중·노무현이 만든 '기울어진 운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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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구·김대중·노무현이 만든 '기울어진 운동장'

[이충렬의 정권+교체] 中의 '국공 합작'…한국엔 '국민 합작'이 필요하다

우리 현대사를 다시 한번 되씹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김욱 교수가 최근 김대중센터에서 한 강연이 계기가 되었다. 이 강연에서 김욱 교수는 더민주와 국민의 당이 연대할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은 더민주의 대선후보가 친노와 결별하고 '지역주의 양비론'과 '호남불가론'을 부정하면서 반영남패권주의를 표방할 경우라고 주장했다. '호남의 가치와 몫'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부정하는 친노세력은 결코 호남과 연대의 대상이 돼서는 안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새삼 김욱 교수의 주장에 대해 따질 생각은 없다. 단지 영남(구체적으로는 부산경남지역을 일컫는 PK지역)민주화세력과 호남민주화세력의 뿌리깊은 갈등구조의 기원과 역사를 되짚어볼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노무현·문재인이 상징하는 PK민주화세력과 김대중을 정신적 지도자로 하는 호남민주화세력은 지난 10여년째 골육상쟁을 벌이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더민주가 호남에서 단 3석을 얻는 대참패를 하면서 문재인과 친노에 대한 호남의 비토 정서가 극적으로 표출되었다.

어떻게 하다가 영남과 호남의 민주화세력이 이렇게 빙탄불상용의 관계가 되어 버렸을까? 1980년대만 하더라도 호남과 영남의 민주연대야말로 6월항쟁을 승리로 이끈 최대의 동력이었다. 이 연대는 민주화라는 가치를 매개로 한 가장 강력한 지역연합이었다.

뭉치면 이기고, 흩어지면 패배한다는 말은 항상 맞는 말이다. 그런데 왜 공동의 적을 마주하고도 서로를 먼저 죽여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힐까? 분열하는 상대야말로 가장 상대하기 쉬운 법이고 그로인해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이 만들어지는 것인데....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말은 범야권에게는 넘을 수 없는 장벽처럼 다가오는 말이다. 우리 사회의 총체적 역량을 비교할 때 범여권에 비해 범야권이 불리한 조건에 처해있다는 뜻이다.

<손자병법> 모공편(謀攻篇)에 이런 말이 있다.

자신과 적을 다 잘 알고 싸우면 백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아니하고, 자신은 알되 적을 모르고 싸우면 승패의 확률은 반반이고, 자신도 모르고 상대도 모르면서 싸우면 백전백패한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의 중요성을 손자는 위와 같이 표현했다. 상대편의 본질을 폭로하고 분노와 증오심을 키우는 것도 홍보전의 한 방편이기는 하다. 그러나 자신의 약점과 빈틈을 환히 드러내놓고 공격만 해대서야 이길 수 있겠는가?

성공한 역사로부터 벤치마킹을 하고 실패한 역사에서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리하여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 우리의 책임은 없는가?

현대사 100년을 거치면서 범야권은 김구-김대중-노무현을 정통성을 잇는 지도자로 생각하고 있고, 범여권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을 그들의 지도자라 생각한다.

'기울어진 운동장'과 관련하여 김구-김대중-노무현의 책임은 없을까? .

① 1948년 5월 10일 역사상 최초의 총선거를 앞두고 김구는 47년 12월 22일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총선불참을 선언하였다.

② 1987년 6월항쟁의 승리 후 김대중은 4자필승론을 내세우며 분당하여 대통령후보에 출마하였다.

③ 2003년 노무현은 집권하자마자 대북송금 특검에 서명하고 연말에 그를 지지하는 세력은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여 열린우리당을 창당하였다.

우리 정치의 운동장이 일방적으로 기울어지는 데 큰 영향을 끼친 3대 사건이라 할 만하다. 100년 후의 시각에서 보면 ①번이 가장 큰 요인이고 ②번이 그 다음으로 큰 영향을 미쳤고, ③번은 ②번의 파생사건으로 분류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2017년의 관점에서 보면 ③번이 ①번과 ②번을 압도하여 현재의 정치에 절대적인 규정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 세 가지 대사건이 우리 정치에 끼친 결과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①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앞두고 실시한 5.10 총선거에 김구와 그의 세력이 불참한 것은 이후 한국 정치에 가공할 후과를 남겼다.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세력이 정치판에서 사실상 완전히 단절되는 재앙이 초래되었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은 친일세력이 완전히 장악하여 반공의 캐치프레이즈를 앞세워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극우사회가 되어 버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김구세력이 총선에 참여했다면 제1당이 되었으리라고 많은 연구자들이 말하고 있다. 그랬다면 김구와 이승만을 축으로 한국정치가 짜여지면서 친일파에 대한 견제가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김구의 오판은 신생 대한민국의 항로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빗나가게 만들었다.

② 4자필승론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김대중은 단일화를 거부하고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을 만들어 대통령에 출마하였다. 그는 3등으로 낙선했고 전두환과 더불어 12.12 쿠데타를 주도했던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허용하여 군부정권을 5년 더 연장하게 되었다.

87년 야권분열 또한 한국역사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엇나가게 만들었다. 민주화운동을 강고하게 뒷받침했던 호남과 PK의 지역연합이 완전히 해체되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의 32년 집권기간에 뿌리내린 재벌중심의 기득권체제는 난공불락의 주류로 자리잡게 되었다.

분열의 후과로 민주세력은 단독 집권이 불가능해지고 군부세력의 일부와 손잡아야만 정권에 접근할 수 있었다. 3당합당과 DJP연합을 통한 집권이 그것이다. 앙시앙레짐(구체제)이라 할 기득권 시스템을 혁파하는 본질적 개혁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③ 2003년 노무현 세력의 열린우리당 창당은 87년이후 분열되었던 호남과 영남민주화세력의 재통합에 대한 기대를 무산시키고 오히려 양진영의 불신과 적대감을 구조화시키는 패착으로 판명났다.

열린우리당의 창당을 영남패권주의만으로 보기는 어렵다. 창당주체는 천정배·신기남·정동영 등의 호남신진세력과 유시민으로 대표되는 노무현 대통령 직계세력의 연합이었다. 이들은 주저하는 노무현을 새정치와 전국정당화라는 명분으로 설득하였고, 일단 동참하기로 결정한 노무현 대통령은 창당을 강력 지지하였다.

그런데 영남패권주의로 볼 수 있는 단서가 분명히 존재한다. 2004년 총선이 열린우리당의 대승으로 끝나자마자 노무현 대통령의 오른팔이던 이광재 의원과 386 의원들이 모여 의정연구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이들은 한나라당에서 영입해온 김혁규 경남도지사를 국무총리로 강력히 밀었다. 그 이유는 그를 노무현 대통령의 후계자로 옹립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서 가치관과 정체성을 묻지 않는 막무가내 영남후보론의 단초를 볼 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열린우리당은 호남의 지지를 점차 잃어버리게 되고 마침내 천정배와 정동영은 창당이 잘못되었음을 고백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과 결별하게 된다. 이후 호남과 친노의 대립은 야권의 최대 아킬레스 건이 되었다. 마침내 지난 총선에서 더민주와 국민의당으로 분리되었다.

지금 여기서 새삼스럽게 책임과 잘잘못을 따지고 싶은 것이 아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어떻게 다시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인가가 이 글의 주제이다. 김구와 김대중 시대에 있었던 일은 이제 역사의 영역으로 넘어가 있다. 그러나 호남과 영남민주화세력의 분열은 현재 진행형인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해결의 방향을 결정할 여지를 아직도 갖고 있다. 만약 ③번을 잘 해결해낸다면 ①과 ②로 인한 부정적 유산마저 다시 역전시킬 계기를 만들 수도 있다. 역사에서의 대역전극이라고나 할까.

현대 중국 정치사의 두 사건을 예로 들어 단서로 삼고자 한다. 첫 번째 사례는 1936년 서안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모택동의 중국공산당과 장개석의 국민당, 그들의 '국공합작'이다.

당시 북벌을 통하여 중국통일을 꿈꾸던 장개석은 중국대륙에 침략해오던 일본보다 공산당 토벌을 우선시 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지식인과 민중들은 외적의 침입 앞에서 민족 단결을 통해 항일전을 해야 한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내 만주군벌 출신의 장학량이 서안을 방문한 장개석을 연금하여 자신의 목숨을 댓가로 '국공합작'이라는 역사를 만들어 내었다. 장개석과 모택동은 10여년이 넘는 내전을 통해 서로를 살육하는 증오의 관계였다. 그러나 외적의 침입 앞에서 이들은 결국 손을 맞잡는 결단을 내렸다.

두 번째 사례는 등소평이다. 흑묘백묘론을 앞세운 개혁개방노선으로의 대전환이다. 오늘날 중국은 미국과 더불어 세계 패권을 다투는 지위로 올라섰다. 정치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지도이념으로 하는 중국공산당은 독재국가이면서도,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시장경제로 완전히 탈바꿈을 하게 됐다. 중국공산당은 어떻게 이런 모순적인 상황을 절묘하게 끌고갈 수 있을까? 만약 내부의 권력투쟁 논리에만 매달렸다면 그들은 자파 세력의 헤게모니를 위한 이념투쟁을 앞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주의 초급단계 100년론'이라는 실용적 이론을 만들어, 이런 모순적인 상황을 중국식으로 해결하였다.

PK민주화세력은 87년의 분열 이후 자신들이 겪어온 비참한 기억에 사로잡혀 있다. 호남민주화세력은 2003년 이후 노무현과 문재인에 대한 배신감에 사로잡혀 있다. 역지사지의 입장이 되어 서로를 이해하고 싶은 생각조차 없다. 누구의 책임을 묻고 단죄하는 방식으로 이 갈등이 해결되겠는가? 국민이 가장 바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큰 틀에서 힘을 합치는 모습, 자파의 헤게모니를 추구하기 보다 윈윈하는 상생의 자세를 보여주는 모습이 중요하다.

역사에서 비약을 이루기 위해서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잘라 해결해버리는 방식처럼 발상의 전환이 중요할 때가 많다. 과거의 증오와 원한에서 떨쳐일어나 새로운 역사를 만든 사례가 많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중국의 사례 하나 더. 1978년 중국과 일본은 2차대전을 공식적으로 매듭짓고 관계정상화를 위한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댜오위다오(일본명 센가쿠열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이 첨예하게 부딪혔다. 이때 등소평이 일본 대표단에게 한 말이다.

"영유권 주장이 지금 해결될 가능성은 없다. 그렇다면 서로의 주장을 현 상태로 그대로 봉인해두자. 그러다보면 백년 후 쯤 우리 후손들이 더 지혜로운 해결책을 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차이는 그대로 두고 당장 필요한 협력을 해나가자."

내년 대선에서 해묵은 분열을, 정권교체에 하등 도움이 안되는 야권의 분열과 이전투구를 멋지게 극복할 리더십이 출현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다음 주에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이 만든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글이 이어질 예정입니다.필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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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렬

『박정희 김대중 김일성의 한반도 삼국지』(2015년, 레디앙) 저자. 1957년 출생. 유신시절 민주주의 운동에 평생 헌신할 것을 맹세, 민주화운동·노동운동·정당활동에 참여하고, 김대중·노무현정부에서 미관말직을 지냈다. 2012년 대선이후 당대에 대한 기대를 접고 강화도에 귀촌, 언젠가 이 땅에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역사가 꽃피는 날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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