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한 권 사 주세요.'
여러 번 연습했지만 도저히 입에서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등줄기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연신 이마를 쓸었다. 9월이지만 날은 여전히 더웠다. 아니, 그보다는 내가 처한 '상황'이 더위를 불러온 듯했다.
지난 9일, 나는 홍대입구역 8번 출구 앞에서 잡지를 팔았다. '불타는 금요일'이었고 원치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거미줄에 묶인 나방처럼,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잡지를 팔아야만 했다. 모든 문제의 시작은 술이었다.
누가 이를 마다할 수 있을까
내가 왜 잡지를 팔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판 잡지부터 소개해야 할 듯싶다. 내가 판 잡지는 <꿀잠>. 이 잡지는 한국 사회의 비정규직 이야기를 다룬 잡지다. 10개 언론사 20명 기자들과 사진작가들이 '비정규직'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잡지를 만들었다. 여기에는 나를 포함해 <프레시안> 최하얀 기자도 작업에 동참했다.
100쪽이 넘는 분량, 한국 사회 비정규 노동의 현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잡지를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했다.
기획안이 확정된 후 기자들은 휴가를 내고 취재를 다녔다. 멀리 지방에 내려가 취재원을 만났고, 40도가 넘는 광화문 천막 농성장에서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1박2일을 보내기도 했다. 사진가들도 취재기자를 따라 사진을 찍었다. 주중에는 자기들의 언론사 기사를 쓰고, 휴일에는 <꿀잠> 잡지 기사를 썼다. 그렇게 약 두 달간 작업기간 끝에 지난 5일 <꿀잠>이라는 잡지가 발행됐다.
기자들이 무일푼으로, 휴일까지 반납하며 매달린 이유는 이 잡지의 판매 수익금이 비정규노동자의 집 건립기금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비정규노동자의 집, 즉 '꿀잠'이라는 공간은 비정규직노동자들이 농성하다 지칠 때 찾아와서 따뜻한 밥 먹고 편히 잘 수 있는, 서울 도심에 짓는 집을 말한다. 일종의 비정규노동자들의 쉼터라고 볼 수 있다. 서울역, 용산역, 영등포역 근처 중에서 하나를 선정해 단독주택을 구입할 예정이다
이 집은 아직 기획 단계에 있다. 오는 12월까지 집을 구해 2017년 초 문을 열 예정이다. 문규현 신부와 백기완 선생이 이 집을 짓기 위해 총대를 멨다.
비정규노동자의 집 '꿀잠' 목표 건립기금은 10억. 여러 사람들이 십시일반 모아 이중 5억5000만 원을 이미 모았다. 거기에 건축설계사가 재능기부로 리모델링을 하고, 건설노동자들이 힘을 보내 집을 고칠 예정이다. 노동자들이 먹을 음식은 농민단체가 손수 지은 쌀과 야채로 만들어진다.
그런 집을 짓는데 기자들이 재능기부에 나선 것이다. 누가 이를 마다할 수 있을까.
"내가 왜 잡지를 팔아?"
그런 잡지를 최종 마감하고 기자들끼리 모여 술을 한잔 했다. 좋은 일을 했다는 포만감이었을까. 그날 마신 술로 나는 필름이 끊겼다. 어떻게 집에 들어갔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네 발로 기어 들어온 기억만 날 뿐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날 함께 자리한 기자에게 연락이 왔다. 내가 길거리에서 자기와 함께 책을 팔기로 했단다. 그것도 무려 300부.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아니, 뭔 소리야? 내가 왜 잡지를 팔아?"
항변했으나 돌아온 건 약 1분짜리 동영상이었다.
"선대식 <오마이뉴스> 기자가 잡지 100부를 길거리에서 팔겠다고 제안했는데, 제가 선 기자와 함께 잡지를 팔겠습니다. 그거 어렵습니까? 선 기자가 100부 팔겠다고 했는데, 그거 받고 200부 더!!!"
꼬부라진 혀로 손가락 3개를 흔드는 술주정뱅이가 영상에 찍혀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그건 내 모습이었다. 부정하려 해도 할 수 없는 실체적 증거가 내 눈앞에 존재했다. 도살장 끌려가는 짐승마냥 내가 길거리로 끌려 나온 이유다.
언론은 비정규직 이슈에서 자유로울까
물론, 의지도 없이 억지로 끌려나온 것은 아니었다. 기자를 업으로 하는 나로서는 마음 속 부채가 존재했다.
언제부터인가 비정규직 노동자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노동 유연화의 끝자락에 있는 다단계 하청 구조 속 노동자, 사장으로 위장된 개인사업 노동자, 이곳저곳 하청 업체를 돌아다니며 일하는 물량팀 노동자…. 이들 비정규직의 숫자는 매년 늘어만 갔다. 그렇게 전체 노동자의 40%를 비정규직이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꾸로 비정규직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일하는 지는 점점 사람들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어느 순간부터 비정규직의 삶과 그들의 목소리에 대해서 사실상 외면하게 됐다. 새로울 게 없는 진부한 이슈가 되어버렸다. 대중이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뒷전으로 미뤄둔다. 이것이 고착화되면서 비정규직의 목소리는 특정 집단 내부 안에서의 목소리로만 맴돌게 됐다.
비정규직에 무관심한 대중을 탓해야 할까. 그건 아닐 게다. 무언가 변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본질을 아는 게 첫 번째. 그런 점에서 언론은 비정규직 이슈를 대중에게 알려내는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를 반문하게 된다.
진부하다는 이유로 책임을 방기한 게 아닐까. 언론에 있으면서 늘 생각하게 되는 자문이다. 내가 이번 <꿀잠> 프로젝트에 참여, 아니 길거리에서 <꿀잠>을 팔게 된 이유다. 조금이나마 책임을 방기한 것에 관한 면죄부를 받고 싶었나보다. 부디 이 잡지가 많이 팔리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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