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차 아셈(ASEM)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중국 베이징을 방문하고 있는 이 대통령은 현지 시간으로 24일 저녁에 열린 제1차 본회의에서 "기존의 금융체제가 세계화와 정보혁명, 국제경제 환경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위기에 대한 조기경보와 건전한 감독체제, 사후 신속한 대처가 가능하도록 IMF 및 세계은행의 역할과 기능 강화에 대한 의견이 모아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완전히 새로운 기구 만들자"던 MB, 일주일 만에…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현재의 IMF 체제의 관리감독 기능과 조기경보시스템 등을 강화해 위기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자는 것. 하지만 이는 최근 이 대통령 자신의 발언과 배치되는 것이다.
불과 일주일 전인 지난 18일 이뤄진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와의 인터뷰에서 이 대통령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등 현 금융체제를 대개혁 하거나 완전히 새로운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시장과 언론은 이를 두고 현재 국제 금융시장의 '달러 패권주의'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출발한 '신(新)브래튼우즈 체제 건설론'과 맞물려 해석했다.
청와대 측이 추후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 등이 강조하고 있는 '신(新)브래튼우즈 체제'에 동참의사를 밝힌 발언은 아니었다"고 해명하긴 했지만, <르 피가로> 신문은 이 대통령의 발언을 '동참 선언'이라고 보도하면서 혼선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달 중순에도 이 대통령은 "이 시점에 사전·사후를 규제하고 대책을 세울 수 있는 새로운 국제기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이날 나온 대통령의 메시지는 결국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IMF체제의 강화'로 귀결됐다. "IMF와 세계은행을 대개혁하거나, 완전히 새로운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던 불과 일주일 전의 역설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미국 눈치보기?
그 배경을 곱씹어보게 된다. 일국의 대통령이 국제 외교무대에서 자신의 발언을 이유없이 뒤집는다는 것은 상식에도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선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 이 같은 '모드전환'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의 선진국들이 주도하고 있는 '신(新)브래튼우즈 체제 건설론'은 물론 아시아 국가들이 별도의 국제기구 설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상황도 미국의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대목이다.
이날 한중일 3국과 동남아국가연합(ASEAN) 정상들은 800억 달러 규모의 아시아 공동펀드를 내년 상반기까지 출범시키기로 했다. 한국 정부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곧 국제금융시장에서 미국의 영향력 축소를 의미한다.
그 어떤 정권보다 '한미동맹 복원'을 강조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으로서는 여러모로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그러나 당장 눈 앞에 놓인 위기를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나아가 가시화되고 있는 아시아권 공조의 흐름에서 한국의 발언력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아예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향후 '새로운 국제질서'에 대한 논의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더라도 당분간은 IMF와 세계은행의 주도적인 역할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계산도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밝힌 기존의 입장을 완전히 뒤집는 이 대통령의 행태에 대해선 비판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정책적 혼선'은 결국 시장의 신뢰를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국제 외교무대에서의 혼선이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 진다.
세계는 '규제확충' 총력…MB는 '규제철폐' 꼿꼿
시선을 국내로 돌려 봐도 마찬가지다. 미국발 금융위기와 맞물린 국제 금융질서에 대한 이명박 대통령의 대외 메시지와, 국내용 메시지는 각각 다른 방향을 걷고 있는 중이다.
이번 사태와 함께 전 세계는 금융시장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 나가는 것을 골자로 한 각종 대책을 앞다퉈 내놓고 있다. 금융자본과 투기세력에게 날개를 달아 준 미국 정부의 '묻지마 규제완화' 정책이 이번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판단에서다. 이 대통령도 이 같은 국제적 흐름에 대해 동조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적어도 국내 금융시장에 대해선 규제 완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선진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규제완화와 금융자유화 정책은 새 정부 출범 이후 'MB경제'의 일관된 방향이었다. 금산분리 완화 방침도 여전하다.
과거의 말과 오늘의 말이 순식간에 충돌하고, 내·외부의 메시지가 제각각 따로 놀고 있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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