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업사태 발생 못 막은 ‘무능함’ 고백
탄광노조는 과거 철도노조와 함께 강성노조의 대명사로 알려졌다.
그러나 상당수 탄광노조 대표자들은 조합원들 앞에서는 큰 소리를 쳤지만, 정작 회사 대표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고분고분 하는 일이 많았다.
탄광촌 대형 ‘분규사태’로 1980년 4월 사북에서 발생한 이른바 ‘사북노동항쟁’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당시 서슬퍼런 신군부의 계엄하에서 진행된 ‘사북사건’의 본질에는 저임금과 비인간적인 노동통제, 지부장 선거를 둘러싼 암투와 회사의 비호, 노동3권 제한 등이 주원인으로 지적됐다.
이후 1987년 이른바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6.29선언’이후 민주화 바람을 타고 번진 노사분규는 탄광촌도 예외가 없었다.
당시 정선군 고한읍의 삼척탄좌, 삼척군 도계읍의 경동탄광, 한보탄광, 장성광업소를 비롯해 전국 수백 곳의 탄광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1987년 7월 무더위가 절정에 달하던 25일 부터 28일까지 나흘간 태백 한성광업소에서 발생한 소요사태도 가두진출과 시가지 투석전 등이 시사하듯 인근 탄광에 비해 다소 거친 편이었다.
당시 <강원일보>는 한성광업소 분규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태백시 화전동 한성광업소의 광부와 부녀자 200여 명은 현재 200%인 상여금을 400%로 인상하고 만근일(월간 출근일수)을 27~28일에서 25일로 낮추며, 사택수당 5000원 지급과 노조위원장 직선제 등을 요구하며 27일 오후 현재까지 사흘째 농성중이다.
광업소 안에서 농성을 벌이던 광원과 부녀자들은 400여 명으로 불어나면서 거리로 진출, 화전3거리에서 투석 등으로 경찰저지선을 뚫고 오후 8시께 태백역 4거리에 도착, 연좌농성을 벌였다.
태백역 4거리~황지3거리를 오가며 지나가던 차량에 돌을 던지고 태백역사의 유리창을 깨는 등 과격한 행동을 보였다.
이들은 25일 새벽 방송국으로 가자며 시청쪽으로 향하다 황지파출소 앞 도로에서 경찰의 저지를 받자 돌을 던지며 격렬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최루탄을 쏘자 흩어졌다. 경찰은 한성광업소 농성광원 중 20여 명을 연행, 조사중이다.]
한성광업소는 28일 상여금 통상임금의 320% 지급과 사택수당 지급 등에 합의하면서 농성을 풀고 29일부터 정상조업에 들어갔다.
탄광이 정상조업에 들어가자 한성광업소 노조위원장은 광업소 사주인 회장과 사장에게 ‘사죄편지’를 발송했다.
‘회장님 전상서’로 시작하는 노조대표의 사죄편지는 당시 탄광노조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기에 전문을 그대로 옮겼다.
“회장님! 무어라 펜을 들어 사죄의 말씀을 올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은혜하는 회장님, 뜻하지 않았던 고통과 심려를 끼쳐드린데 대하여 무어라 사죄를 드릴지 소생은 송구한 마음 가눌길이 없습니다.
찌는듯한 무더운 여름날씨에 그간 회장님의 옥체금안하시고 사장님을 비롯한 본사 임원 여러분의 만수영화를 비옵니다. 지난 7월 25일부터 28일까지 무리한 요구와 부당한 종업원들의 분규는 저희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의 음모를 미리 알고 노조와 회사가 협력하여 그들의 요구조건을 사전에 공고양지하여 예방책을 폈습니다만 일부 불량한 자들의 소행으로 근로자분규는 최악을 이루어 태백사회에 물의를 일으키어 대단히 죄송스럽고 회사의 손해를 끼쳐드린데 대하여 무슨 말을 회장님께 드려야 할지 용원하여 주옵소서.
앞으로는 절대 이러한 불미스러운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명심하겠으며 평화적으로 사전에 잘 진정되어지기를 하나님께 기원하옵고 노조 책임자로서 협조할 것을 다짐하겠습니다.
종업원들의 일시적인 행동을 양찰하여 주시고 회장님의 옥체보중하심을 하나님께 기원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죄송합니다.
1987년 8월 3일
한성광업소 노조위원장 이경우 배상
노조위원장이 회사 사장과 회장에게 보낸 사죄편지는 자신들을 고용해준 사업주의 은공을 발로 차버린 ‘배은망덕’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아울러 ‘사죄편지’를 받은 이 한성광업소 회장은 노조가 더 열심히 노력해 불미스러운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라는 ‘질책성’ 편지를 보냈다.
다음은 회장의 편지 전문.
“이경우 위원장
어려운 시기에 종업원들의 권익보호와 증산을 위하여 노력하는 위원장과 노조간부 및 대의원들의 충정에 사의를 표합니다.
지난 7월 25일부터 28일까지의 종업원들의 소요와 분규사태는 최고경영자로서 사회와 태백시민에게 불안과 생업에 지장을 준 점에 대하여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비온 후의 땅이 굳어지듯 앞으로는 절대 불미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명심하고 맡은 직무에 충실하기를 바랍니다.
1987.8.7.
회장 이석구”
한성광업소는 수갱(탄광 엘리베이터)을 갖출 정도로 국내 굴지의 민영탄광이었지만 광부들에 대한 대우는 사실상 인간 이하였던 것이 당시 광업소 자료에서 나타났다.
광업소측은 사택수리를 위해 광업소에서 버려지는 수준의 토막목재를 들고 나가다가 적발된 광부에게 각서와 시말서를 요구했다.
또 작업도중에 사소한 부주의로 광차가 탈선하거나 작업에 차질을 빚는 일까지 시말서를 제출토록 해 징계와 해고의 수단으로 악용했다.
당시 탄광에는 갱내와 사무실을 연결하는 여자 전화교환원이 근무하고 있었다.
전화연결이 거의 없는 한가한 야간시간에 여자 교환원들은 책을 보거나 뜨게질 하는 일이 잦았지만 이를 불성실한 근무로 지적해 각서를 받는 일도 다반사로 일어났다.
1984년 4월 17일 여자교환원 3명이 광업소장에게 제출한 각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각서
직종;교환
성명; 이혜란
본인은 한성광업소 교환으로 재작중인자로 교환 근무 중 근무에 충실할 것이며, 근무중 근무태만(독서, 뜨개질)으로 인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시에는 회사 사칙에 의하여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음을 각서합니다.
1984. 4. 17.
각서인 이혜란
한성광업소장 귀하]
당시 한성광업소에 근무했던 이서한씨는 “1980년대 한성광업소는 관리자들에게 눈도 마주치기 힘들 정도로 고압적이고 마치 하인 부리듯 대했다”며 “회사에서 사택을 고쳐주지 않아 사택수리를 위해 판자라도 들고 나가면 각서를 쓰거나 징계를 줄 정도”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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