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으으읍. 방을 나가기 전 차가운 에어컨 바람을 볼에 가득 넣는다. 후텁지근한 공기를 되도록 늦게 들이 마시기 위해서다.
푸후우우. 그래봤자 1분을 못갈 테지만.
햇볕이 쨍하다. 땀 난 기색도 없이 옷부터 젖는다. 나오기 전 열심히 발랐던 자외선 차단제가 효과를 보이기도 전에 닦여 나간다. '여름 휴가 한번 제대로 못 갔는데…' 거뭇해진 팔다리를 보니 괜히 억울하다. 몇 년 전 여행을 위해 산 선글라스를 꺼냈다. 팔다린 지키지 못했지만 얼굴만은 지키리다.
새까만 선글라스를 쓰고 왼쪽 어깨에 숄더백 멘다. 테이크아웃 음료까지 있었으면 아름다웠겠지만 오른손엔 한국어 시험 필기자료가 반으로 접혀있다. 불과 오분 전의 나는 걸어가면서 공부하길 바랐을 테다. 나름의 혜안이었을지 모른다. 종이뭉텅이는 무더위에 부채로 제격이다.
학교에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탄다.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틈에 자리에 앉았다. 운이 좋다. 구겨진 필기자료를 가방에 넣고 멍하니 고개를 든다. 세상이 뿌옇다.
'아, 선글라스 쓰고 있었지.'
벗을까 생각했지만 관둔다. 곧 내려야 하니까.
오랜만에 사람 구경을 한다. 사람들은 내 눈이 향하는 곳을 보지 못한다. 7살 정도 돼 보이는 남자 아이가 전화하느라 정신없는 엄마의 커피를 몰래 홀짝홀짝 마신다. 아이 옆에는 20대가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이어폰을 끼고 있는 걸 보니 음악을 듣거나 동영상을 보고 있을지 모른다. 그 옆에 사람도, 옆에 사람도, 또 그 옆에 사람도 모두 핸드폰을 보고 있다.
문 옆 기둥에 기대 서있는 사람은 좀 다르다. 40대 남성의 시선은 핸드폰이 아닌 반대편에 서있는 여성의 다리에 꽂혀있다. 낯선 광경은 아니지만 불쾌하긴 매한가지. 평소라면 흘깃 보고 모른 체 했겠지만 오늘은 주의 깊게 관찰해본다. 위, 아래. 여성이 시선을 느끼고 몸을 움직이면 남성의 눈동자가 끈질기게 따라간다. 자세를 바꾸고 자리를 옮겨도 남성의 시선은 여성의 몸에 고정되어있다. 여성이 내리고 나서야 불편한 상황이 정리 됐다. 다른 먹이를 찾는 남성과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나도 피하지 않고 응시한다. 선글라스를 방패삼아.
먼저 움찔한 내가 노약자석으로 고개를 돌린다. 할아버지가 벽 쪽으로 몸을 기대고 다리 한쪽을 의자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중얼중얼. 무슨 소린지 알아듣긴 힘들었지만 앉아있는 사람들을 차례차례 혼내고 있음은 분명했다. "요즘 애들은…", "치마가 저렇게 짧으니까…", "싸가지가 없이…", "사치가 심해서…" 할아버지가 혼내는 대상에 아까 그 남성은 없다. 건장한 남학생들도 없다. 할아버지도 무섭겠지, 나처럼. 혼나기 전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내린다. 열심히 뛰어야 버스를 잡을 수 있다. 가방을 고쳐 메고 문 앞에 섰다. 지하철 문에 반사된 내 모습 옆에는 웬 아저씨가 내 가슴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도대체 왜, 보는 걸까.' 의아하지만 익숙하게 가방을 가슴 쪽으로 당기고 몸을 살짝 비틀었다. 선글라스를 쓴 채 그대로 쳐다본다. 아저씨는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원래 거기를 보고 있었는데 내 가슴이 나타났다는 듯. '그래도 얼굴을 본 게 어디야.' 문이 열리고 아무 일 없단 듯이 뛴다.
밖으로 나왔다. 오랜만의 사람구경에 핸드폰을 보던 것보다 눈이 더 아프다. 알면서도 외면하였던, 혹은 익숙해져 느끼지 못했던 일상을 보았던 탓일까.
아니다. 선글라스 때문이다. 까만 선글라스를 오래 쓰고 있으면 우울하다. 파랗게 맑았던 하늘이, 고인 구정물마냥 회색빛으로 바뀐다. 곧 비라도 올 것처럼. 그래도 어쩌나 내 피부는 내가 지켜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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