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위기, 산속에 갇히다
영국 횡단 첫날. 호텔을 나오자마자 엔진이 가열도 되기 전에 도버 성(Dover Castle)을 넘느라 숨이 찼다. 영국은 차량이 좌측통행이라서 헷갈렸다.
우린 도버에서 캔터베리(Canterbury)로 향했다. GPS를 켜고 지방도로와 농촌 길을 번갈아 달리기 시작했다.
위트필드(Whitfield)를 지나다가 정원에서 일하는 청년에게 길을 물었는데 자세한 설명과 함께 물통에 물을 가득 채워 주었다.
좁은 마을 길을 들르고, 구릉지 벌판을 달리고,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거진 숲길을 지났다. 시골길 양옆은 농경지를 들여다볼 수 없도록 대부분 조경수로 차단되어 있었다.
자전거 이정표는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표시는 되어 있었는데 인근 도시로 이어지는 안내는 별로 없었다.
구글 지도를 보면서 50km를 달려 캔터베리에 도착했다. 그런데 성공회대학 졸업식이 있는 날이라 그런지 친지들이 많이 와 호텔도 캠핑장도 모두 예약이 끝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10마일 떨어진 북해 해안 위트스터블(Whitstable)로 발길을 돌렸다.
북해 해안으로 가는 길은 노면이 울퉁불퉁 비포장 길인 데다 작은 산을 몇 개나 넘어야 했다. 해가 저물어 그곳에 도착했는데, 사정은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캠핑장도 없었고, 하나 있는 콘티넨탈호텔마저 빈방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호텔 프런트에 부탁해 가까운 곳에 다른 호텔이나 민박이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
호텔 직원이 열심히 컴퓨터 자판을 두들겨 대는 동안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추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시간이 너무 지나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하고 걱정이 돼서 전화를 한 것이었다.
결국 위트스터블에서는 잘 곳을 찾지 못하고, 멀리 떨어진 캠핑장 두 군데를 소개받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헬멧에 헤드라이트를 달고 한 시간을 달려 밤 열 시가 넘어서야 캠핑장 정문 앞에 도착했다. “도와 드릴까요?”
캠핑장 안으로 막 들어가려고 하는데 어떤 젊은이가 다가와 말을 걸어 깜짝 놀랐다. 얼핏 가로등에 비친 모습이 험상궂게 생겼다.
추리닝 바지에 모자를 눌러쓰고 있어 불량스럽게 보였다. 이 밤중에 난데없이 나타나 도와주겠다니……. 도대체 이 사람은 어디서부터 우리를 추적해 온 걸까?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뇨, 됐어요. 우린 여기서 캠핑할 거예요.” 우린 냉담하게 거절했다. “그곳 캠핑장은 운영 안 합니다.” 가까이 가 보니 문이 닫혀 있었다.
“그럼 저 길 건너 캠핑장으로 갈 겁니다.” 문제없다는 듯이 그를 따돌렸다. “제가 도와드리죠.” “아, 됐네요. 됐다니까요.” 됐다는데도 불구하고 젊은이는 계속 끈질기게 따라왔다.
반시간 정도 달려 두 번째 캠핑장에 도착했다. “여보세요, 누구 계신가요?” 인기척을 하며 캠핑장 관리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곧 난감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곳은 캠핑카만 장기 임대하는 곳이라서 텐트를 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를 어쩌지…….’ 캠핑장 두 개가 모두 꽝! 우린 어떤 대책도 없이 서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자 질질 뒤따라오던 젊은이가 여기저기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전화 내용을 대충 짐작해 보니 한국에서 온 부부 자전거 여행객이 텐트를 치려고 한다는 얘기인 것 같았다.
한참 동안 몇 군데를 시도하더니 결국 “OK” 소리가 들려왔다. “스마트폰 좀 줘 보시겠어요? 캠핑장 위치를 알려드릴게요.” 험상궂은 젊은이는 구글 지도에 캠핑장 주소를 입력시켰다.
“여기서 한 시간 반 정도 더 가야 하는 곳인데 괜찮으시겠어요?” “네, 괜찮아요. 갈 수 있어요. 고맙습니다.”
“지금은 너무 늦어 관리인이 퇴근했으니 도착해서 아무 데나 텐트 치고, 내일 아침에 체크아웃할 때 사용료를 계산하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땡큐.” 우린 몇 번이고 감사를 표했다. 잠시나마 그의 성의를 의심했던 게 정말로 미안했다. 우린 그가 가르쳐 준 캠핑장을 찾아 길을 나섰다.
뚝 떨어진 기온 때문에 방풍 재킷을 겹쳐 입어도 한기가 느껴졌다. 어깨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순간순간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래도 가야 한다.
갓길마저 없는 가파른 고갯길을 낑낑대며 오르기 시작했다. 고요한 밤이라서 그런지 뒤에서 달려오는 차량의 굉음이 두려움을 더해 주고 있었다.
오가는 이도 없는, 사방이 캄캄한 깊은 산길로 접어들었다. 타이어는 아스팔트 가장자리에서 사금파리를 밟으며 예민하게 짜그락거렸다.
한 시간 정도 지나 산 중턱에서 넓은 회전 로터리를 만났다. 내비게이션을 켜고 세 번째 길로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방향 표시가 이상하게 움직였다.
현재 위치를 가리키는 ‘커서’가 항상 0.5초 정도 뒤늦게 움직이는 바람에 달리고 있는 방향이 제때 표시되질 않았다.
밤에 회전 로터리를 돌 때는 이정표가 보이지 않아 ‘커서’의 움직임을 동시에 보며 진입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우린 갓길 풀숲에 멈춰 섰다. 야간 산속이라 춥고, 머리가 쭈뼛쭈뼛 솟아올랐다. 마침 로터리에 들어서는 대형 트럭이 있어 손을 흔들어 도움을 청했는데, 그냥 지나쳐 버렸다.
시간은 자꾸만 가고, 지나는 이는 없고……. 점점 두려움이 깊어지고 있었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지금은 그저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나타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때와 사람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거야.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 애태운다고 해서 일찍 다가오지는 않겠지. 인연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거야.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소중한 인연은 그냥 스쳐 지나가 버릴지도 몰라.’
한참 후, 멀리서 깜박이는 불빛 하나가 점점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우린 불빛이 미처 가까이 오기도 전에 태극기를 꺼내 크게 흔들기 시작했다.
“여기요, 여기! 여기 좀 보세요!” 목청 높여 소리를 질러 댔으나 그 차도 역시 우리를 쌩 지나쳤다. 하지만 잠시 후, 그 차는 로터리를 한 바퀴 돌더니 다시 우리 앞에 섰다.
오! 경찰이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우린 대한민국에서 왔고, 호텔이 꽉 차서 인근 캠핑장을 찾는 중인데 내비게이션도 안 되고…….
“자, 걱정 마세요. 우리가 앞서 갈 테니 천천히 따라오세요.” “네에. 땡큐, 땡큐.” 우리는 경찰차를 앞세워 캠핑장으로 향했다. 알고 보니 우리가 서 있던 곳은 가려던 곳과 정반대 방향이었다.
“경찰관님, 정말 고맙습니다.” 한밤중 캠핑장엔 찬물이 나왔다. 우린 조용히 텐트를 쳤다. 그런데 갑자기 옆 캠핑카 할머니가 문을 펄쩍 열더니 뭐라 뭐라 소리를 지르신다.
“뭐라고요? 네에, 할머니. 밤늦게 미안합니다.” 영국식 영어는 잘 못 알아듣겠다.
침낭 속에 각자 누에고치처럼 들어가 번갈아 뒤척였다. 피곤한데 잠은 잘 오지 않았다. 첫 캠핑장에서 험상궂은 젊은이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어디로 갔을까?
또 캄캄한 산속 회전 로터리에서 경찰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누구와 인연이 닿았을까? 밤은 깊어지는데 정신은 점점 더 맑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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