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프랑스
9월 14일 아침. 르크호뚜와 캠핑장은 바닷가라서 그런지 좀처럼 짙은 안개가 걷히질 않았다. 오늘은 지방도를 타고 칼레(Calais) 방향으로 향한다.
인터넷에는 ‘유로벨로4’ 자전거 전용도로가 프랑스 서해안을 따라 칼레까지 연결되어 있는데 현지에서는 그 노선을 아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국도이든 지방도이든 간에 ‘갈 수 있다는 것일 뿐’으로 해석하자니 속임을 당한 느낌이다. 우린 D940번 지방도를 따라 고속 차량들과 함께 달렸다.
잠시 갓길에서 휴대폰 배터리를 교환하는데 한 젊은 부부가 저만치서 자전거를 타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지도를 얼른 꺼내 펴 들고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여기 잠깐요” 우리 지금 칼레로 가는 중인데요, 혹시 아는 정보 있어요?” “칼레요? 저희도 칼레 가는 중이에요.
조금 더 가면 베흑끄(Berck)시가 나오는데 거기서 D303번을 따라가다가 D127번 지방도로 갈아타려고 해요. “아하, 그 길 좋아요?” “네. 시간은 좀 더 걸리지만 농촌이라서 경치도 좋고 차량이 적어요.
여기 큰 지도가 있는데 혹시 원하시면 드릴게요. 한 부 더 있거든요.” “네, 네. 정말 감사합니다. 그 지도 꼭 필요했거든요.” 우린 청실홍실을 한 개씩 선물했다.
“이거 한국의 전통 기념품인데 소중한 인연, 행복한 가정을 상징하죠.” “와우, 예뻐요, 감사해요.” 그들은 청실홍실을 받자마자 자전거 핸들에 질끈 동여매고 앞서 떠났다.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D127번 지방도를 달렸다. 말 그대로 시골길이었고, 지나는 차량이 별로 없는 고요하고 한적한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앗! 펑크. 여섯 번째다.’ 앞바퀴 세 번, 뒷바퀴 세 번, 모두 내 자전거다. 추니한테 ‘엄중 경고’까지 받고도 또 펑크를 냈다. 추니도 이젠 포기했는지 같이 펑크를 때웠다.
펑크 난 장소 바로 옆에 예쁜 레스토랑 겸 숙박을 하는 ‘카페호텔’이 보였다.
‘카페호텔’ 저기서 묵을까?
에라, 내친김에 조금만 더 가자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데브흐(Desvres)까지 내달렸다. 가파른 계곡에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데브흐에는 캠핑장이 없어 시내 뒤편 산속 호텔을 찾아갔다.
호텔 로비에 들어섰다. 그런데 눈에 보인 것은 「Room NO」라는 안내 문구였다. “이곳에 다른 호텔은 없나요?” “여긴 호텔이 하나뿐입니다.” 벌써 7시, 날은 어두워지고 막막했다.
‘시내 공원 한구석에 텐트를 칠까? 아니면 그냥 아무 집에나 들어가 하룻밤 재워 달라고 부탁해 볼까? 앞마당에 텐트 칠 테니 양해해 달라고 하면 어떨까?’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가파른 시내 도로를 다시 내려왔다. “이곳에 어디 게스트하우스나 카페호텔 있나요?” 로또 가게 주인에게 물었다.
“여기서 서쪽으로 30km 정도 더 가면 호텔이 있어요.” 지금 상황으로 거기까지 더 가기는 어려웠다. “혹시 캠핑장은요?” “음… 텐트는 갖고 있나요?”
“예, 텐트는 갖고 다녀요.” “그럼 10km 떨어진 싸메(samer) 부락에 한번 가 보세요. 캠핑장이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도 운영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 길을 택하는 방법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캠핑장을 찾아가느라 서둘러 시내를 빠져나오는데 길가에 젊은 친구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가 인근에 잘 만한 곳이 있는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온 사방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아마도 카페호텔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조마조마하며 기다렸다. 하지만 삼십 분 넘게 수소문한 결과는 ‘NO’였다.
“아이고, 그렇지 않아도 늦었는데 시간만 더 소비했구려.” 부랴부랴 캠핑장으로 가는 길에 휴대폰 배터리가 간당간당했다. GPS가 끊겨 산중에 갇힐까봐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다행히 내리막길이 더 많아 목적지까지 간신히 도착했다.
싸메 캠핑장 안쪽에는 캠핑카 몇 대가 있었는데 캠핑을 하러 온 게 아니고 숙박 시설로 임대해 주려고 갖다 놓은 것 같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고, 관리인도 없는 걸 보니 운영하지 않는 캠핑장이었다.
우리는 헤드라이트를 머리에 썼다. 바로 옆 공동묘지엔 말라비틀어진 꽃들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샤워장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왔다.
미지근한 물이었는데, 샤워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고 겨우 땀만 닦았다. 화장실은 계단 아래 있었는데 내려가 보니 문이 잠겨 있었다. 소변은 대충 볼 수 있는데 내일 아침이 걱정됐다.
밤이 되니 춥다. 부서진 빵을 텐트 안에서 헤드라이트를 쓴 채 먹었다. 샤워장에서 휴대폰 배터리를 충전하느라 밤새 잠을 설쳤다.
다음 날 아침, 싸메 캠핑장에서 고양이 세수를 하고, 한적한 농촌 길을 따라 달리다 보니 곧 기분이 상쾌해졌다. 노랗게 말라비틀어진 옥수수가 아직 밭에 남아 있는 걸 보니 사료로 쓸 모양이었다. 찐 옥수수의 고소한 향이 뇌리에 스쳤다.
긴느(Guines) 부락을 경유해 D127번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달렸다. 비좁은 농촌 고갯길을 오르고 있을 때 차들은 반원을 그리며 비켜 가기도 하고, 어떤 차는 속도를 줄이고 조용히 뒤따라오다가 우리가 앞으로 가라고 손짓하면 얼른 앞질러 달렸다.
비켜 가기 좁은 고갯길에서는 저만치 아래에서 멈춰 있다가 우리가 고갯마루에 다 올라서면 그제야 부웅 시동을 걸고 고개를 오른다. 아마도 뒤에 가까이 다가와 대기하고 있으면 부담을 느낄까봐 배려하는 것 같았다.
대부분의 차들이 그랬다. 뒤에서 빵빵거리는 차는 아직 본 적이 없다. 하기야 우리 화물 자전거를 보면 ‘포스’가 느껴지겠지. 더구나 대한민국 국기를 달고 유럽 횡단을 하고 있지 않은가!
오후 들어 고갯마루에 오르니 넓은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칼레였다. 페리를 타고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간다고 생각하니 새로운 여행을 하는 것 같아 설렜다.
‘그런데 배는 어디서 타고, 티켓팅은 어떻게 하지? 예약 안 해도 되나? 자전거 짐은 따로 실어야 하나?’
프랑스 횡단의 종착지 칼레에 도착해서 관광안내센터를 찾아가니 하필 휴무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시청 민원실을 찾아가 도버해협을 건너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
직원은 페리를 타려면 하루 전에 예약해야 하는데, 인터넷 예매도 할 수 있지만 매표소가 가까운 항구에 있으니 직접 가서 구매하는 게 좋다고 했다.
6시 퇴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서둘러 매표소로 향했는데 항구가 복잡해 찾느라 엄청 힘들었다. 페리 운임은 1인당 자전거 포함해 16.80유로, 합계 33.60유로, 오만 사백 원이었다.
9월 15일. 프랑스에서의 마지막 밤은 이비스호텔에서 보냈다. 지난 8월 31일 프랑스 동부 티옹빌로 들어와 18일 동안 횡단했다. 오스트리아 빈을 출발한 지 딱 두 달째다.
돌아보니 많은 일들이 있었다. 길을 잘못 들어 고속도로를 주행했던 일, 해 저문 외딴 산골에서 잘 곳을 찾지 못해 난감했던 일, 신혼부부 침실에서 하룻밤을 보냈던 일……. 아마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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