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한 바퀴
오후 1시. 파리역에 내렸다. 허리에 총을 찬 경찰들이 금방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자세를 하고 역내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동유럽 집시들이 몰려와 소매치기 같은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있어서일까? ‘우리도 집시인데……. 자전거 집시! 흠 잡히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파리 센(Seine) 강을 따라 노트르담 사원과 개선문, 샹젤리제 거리를 거쳐 에펠탑까지 시적시적 달렸다. 콜라도 한 병 사 마시고, 여행 온 한국인들과 얘기도 나누고, 사진도 같이 찍고, 기념품 가게도 들락거렸다.
오늘 밤 묵을 곳은 에펠탑 옆에 사는 친구네 집이다. ‘와! 부럽다. 파리 한가운데에 살다니!’ 모처럼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어 좋았다.
김치, 깻잎, 삼겹살, 상추, 고추장을 염치 불고하고 많이 먹었다. 친구는 부담 없이 이곳에 며칠 묵다 가라고 말했지만 이틀간만 더 묵기로 했다.
자전거는 거실에 잘 모셔 놓고 파리 시내 관광에 나섰다. 거미줄 같은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루브르 박물관에 도착했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진귀한 유물들을 전시해 놓았는데, ‘수박 겉 핥기’ 식으로 스쳐 지나갔다.
교과서나 미디어를 통해 이미 다 보아서인지, 아니면 관심이 없는 건지 관람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전시물 아래 쓰인 글을 들여다봐도 해석이 잘 안 됐다.
저녁 식사는 프랑스 정통 요리를 먹으러 갔다. 거위 간, 달팽이, 등심&양고기, 샐러드, 와인, 그리고 디저트로 아이스크림과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이튿날, 베르사유 궁전에 진입했다. 이 궁전은 루이 14세가 지은 별장이라는데, 사냥터, 침실, 집무실, 연회장이 호화찬란했다. 우린 야외 오픈카를 타고 대정원을 한 바퀴 돌았다.
오후에는 폐쇄된 기차역을 리모델링했다는 오르세 박물관에서 눈에 익은 그림들을 구경했다. 미술에 대해 잘 모르지만 작품 앞에 서서 자세히 보니 뭔가 느낌이 온다. 작품 속 눈빛이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았다.
9월 11일. 파리 외곽으로 나오는 도로는 교통이 혼잡하고 자전거 길이 마땅치 않아 아미앵(Amiens)까지 기차로 이동하기로 했다. 파리 북부역에 도착해 표를 끊느라 대기 번호표를 받았는데, 한 시간 반을 넘게 기다렸다.
우리나라 같으면 가만 안 놔뒀을 텐데……. 다행히 충분한 시간을 두고 기차역에 도착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밤차를 탈 뻔했다.
오후 5시, 아미앵에 도착했다. 관광안내센터를 찾아가 이곳에 하루저녁 머물면서 꼭 가 볼 만한 곳이 있는지 물었더니 ‘아미앵 대성당’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난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서 성당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는데, 이번 여행에서 만큼은 성당에 꼭 들렀다. 왜냐하면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관광안내센터가 거의 제일 높은 성당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미앵 대성당은 첫 느낌부터가 확 달랐다. 지은 지 천 년이 다 돼 가는 프랑스 최대 성당임에도 소박한 맛이 있었고, 뾰족한 첨탑은 자극적이지 않아 보였다.
날이 어두워지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 성당 앞 광장을 가득 메웠다. 곧 서서히 은은한 조명이 밝혀지기 시작하더니 웬일일까? 낮에 보았던 회색빛 성당이 온통 총천연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크고 작은 조각상들이 제각각 빛을 발하면서 빨강 파랑 노랑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프랑스 특유의 간드러진 찬송을 들으며 우린 저절로 두 손이 포개졌고, 한 시간 동안 몽롱했다. 프랑스 아미앵 성당의 대서사극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9월 12일. 아미앵을 떠나 솜(Somme) 강 물길 따라 아브빌(Abbeville)로 향했다. 솜 강은 프랑스 북부 지역에서 발원해 서쪽 영국해협으로 흐르는 강이다.
바다가 가까워지면서 솜 강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크고 작은 연못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낚시꾼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앗! 다섯 번째 펑크다.’ 공사 중인 도로를 덜컹거리며 지나다가 타이어가 찢기면서 튜브도 함께 찢어졌다. 구멍이 크게 생겨 자전거가 금방 폭삭 주저앉았다.
‘왜 내 자전거만 펑크가 나는 거야!’ 추니한테 자전거 좀 제대로 타라고 또 ‘엄중 경고’를 받았다.
오후 6시. 아브빌에 도착해 거리 표시 없는 캠핑장 표지판을 보고 가다 보니 7km 정도를 달렸다. 그곳 외딴 캠핑장엔 여섯 대의 캠핑카가 이미 와 있었다.
먹을거리가 떨어졌는데 편의점이나 식당도 없었다. 입장료는 12유로, 만 팔천 원이었다. 샤워를 하고 나니 몸이 착 가라앉아 레스토랑을 찾아 나설 의욕이 생기지 않아 그냥 자기로 했다.
한밤중에 잠을 깼는데 다시 잠이 들지 않는다. 오리들이 밤새 꽥꽥거린다. 저놈들은 밤늦게 발정이 났나 보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정신이 말똥말똥해진다. 추니를 깨워 볼까?
9월 13일. 아브빌에서 솜 강 제방 길을 따라 20km를 일직선으로 달렸다. “에구, 지루하다. 길이 좀 꼬불꼬불해야 달리는 맛이 나지.”
어제까지만 해도 비포장 길, 자갈길, 숲길을 그리도 원망해 놓고서……. 사람 마음이 참 변덕스럽다.
오전 11시. 솜 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 프랑스 서쪽 해안 르크호뚜와(Le Crotoy)에 도착했다. 때마침 세찬 바람과 함께 밀물이 거세게 들어왔다. 항구를 가득 메웠던 요트들은 닻을 올려 하나둘씩 먼 바다로 떠났다.
저녁 식사는 추니가 좋아하는 해산물로 주문했다. 추니는 고향이 서산 갯마을이라서 그런지 해물을 좋아한다. 그런데 요즘 매일 빵과 우유만 먹고 있으니……. 쯧쯧.
‘그나저나 대서양 해물 맛은 어떨까?’ 살짝 데친 작은 새우가 한 대접 나왔다. 식초 넣은 새콤한 간장을 곁들여 아삭아삭 씹었다.
가재는 망치로 두들기다가 너무 세게 내리치는 바람에 박살이 나서 속살에 박힌 껍질을 골라내느라 음식 맛이 제맛이 아니었다.
굴은 찝찔한 바닷물이 든 채였고, 소라는 긴 바늘로 콕 찔러 살살 돌려 가득 찬 살집을 조심조심 꺼냈다.
그리고 술은 소주 대신 로컬 맥주로 한 잔씩 마셨다. 모두 20유로, 3만 원이다. 둘이 실컷 먹고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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