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업체 넥슨의 별명은 '돈슨'이다. 돈과 넥슨의 합성어인데, 우연히 생긴 말이 아니다. 1994년 창업한 넥슨의 역사를 가로지르는 키워드에 가깝다.
'부분 유료화' 모델, 최초 성공 사례
넥슨의 혁신성은 기술이 아니라 비즈니스 모델에서 발휘됐다. 실제로 넥슨 창업자 김정주 NXC 회장은 개발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그 역시 공학 전공자이지만, 기술 개발보다는 전략이나 협상에 더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대기업 취업 대신 창업을 택한 게 그래서라는 말도 있다. 반면, 넥슨과 분쟁을 겪었던 김택진 NC소프트 대표이사는 개발자 정체성이 강한 편이다.
넥슨의 이런 특징은 양면이 있다. 온라인 게임으로 돈을 제대로 버는 모델을 처음으로 정착시켰다. 이른바 '부분 유료화' 모델이다. 한국 소프트웨어 산업은 '불법 복제'를 떼놓고 설명할 수 없다. 이런 풍토에서 소프트웨어, 콘텐츠 등으로 수익을 냈다는 건, 평가받을 일이다. 실제로 넥슨 이후 등장한 많은 게임 및 콘텐츠 업체가 넥슨이 개척한 비즈니스 모델을 따랐다.
'현질' 이벤트, 게임에 '수저 논리'를 도입하다
넥슨이 개척한 유료화 모델은 이른바 '현질'(현금 사용)을 유도하는 방식이었다. 게임 이용자가 쓴 돈에 비례해서 좋은 아이템을 갖게 된다. 오랫동안 게임을 하며 쌓은 실력이 현금 앞에서 무력해진다. 금수저, 흙수저 등의 표현이 일찍부터 쓰인 곳 역시 게임 커뮤니티였다. 현금을 많이 충전한 이용자가 높은 레벨에 오르는 것을 보며, 게임 이용자들은 이른바 '수저' 론을 이야기했다.
넥슨이 온라인 게임 '던전앤파이터' 개발 업체인 네오플을 인수한 게 지난 2008년이다. 네오플 창업자인 허민 씨는 이후 고양 원더스 구단주 등을 거쳐 소셜 커머스 업체 위메프를 창업했다. 넥슨의 네오플 인수는 게임 업계에서 대표적인 인수합병 성공 사례로 꼽힌다. 네오플 창업팀 역시 두둑한 보상을 받았다. '던전앤파이터'는 넥슨에 인수된 뒤 본격적인 수익을 냈다.
그런데 넥슨이 '던전앤파이터'를 서비스한 방식이 이용자들의 반발을 샀다. 현금으로 산 아이템으로, 보유한 무기를 강화하는 이벤트를 진행했다. '돈슨'이라는 별명이 확산된 건 그 무렵부터다.
'메이플스토리', '카트라이더' 등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넥슨이 노골적인 '현질' 유도 이벤트를 하자, 이들 게임 이용자가 대거 이탈했다. 넥슨은 이른바 '대작 게임' 대신, 적은 비용으로 여러 게임을 만들었다. 그리고 성공한 게임에서 현금을 바짝 확보했다. 재무적인 관점에선 안전한 방식이다.
왜 상장을 미뤘을까?
하지만 개발자들은 반발했다. 유능한 개발자들이 대거 떠나면서 넥슨은 한동안 기술 공백을 겪었다. 개발자들의 이탈은 넥슨의 상장 문제와도 관련이 있었다. 2000년대 초중반, 유명 정보기술(IT) 벤처 기업들은 대부분 주식시장에 상장한 상태였다. 창업 초기에 합류했던 직원들은 대부분 주식으로 큰 돈을 벌었다. 넥슨 안에서도 이런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김정주 회장은 상장을 끝내 거부했다. 지금 알고 보니, 당시 넥슨 주식 가운데 일부는 회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법조인들에게 넘어가 있었다. 그때는 넥슨 직원들이 이런 사실을 몰랐었다.
개발자 이탈이 문제로 떠오른 2000년대 중반, 넥슨은 개발 조직 운영 방침을 개편했다. 각각의 게임 개발팀에게 수익에 따라 강력한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이다. 유능한 개발자들을 붙잡아두려는 방편이기도 했다. '상장'이라는 카드를 쓸 수 없었으므로 다른 대책을 마련한 것이다.
실패한 인센티브 정책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의도했던 것과 전혀 다른 효과가 있었던 것. 'A' 게임이 성공했다. 그럼, 수익 가운데 많은 부분이 'A' 게임 팀에 배당된다. 그걸, 팀 구성원이 어떻게 나눠야 하나. 여기서부터 갈등이 생겼다.
더 큰 문제는, 개발자들의 태도 변화였다. 'A' 게임 팀에는 유능한 개발자가 많다. 그런데 그들이 새로운 게임 개발에 도전하려 하지 않았다. 개발보다 운영 업무를 선호하는 현상이 생겼다. 이미 성공한 게임에서 '현질' 이벤트를 하는 게, 새로운 게임을 성공시키기보다 훨씬 쉽다. 그런데 회사 정책은 전자에 더 높은 인센티브를 주게끔 돼 있다. 그러니까 다들 성공한 게임 팀에 남아서 '운영' 업무를 하려 했다. 아울러 게임 이용자들의 비난을 산 '현질' 이벤트는 더 강화됐다.
인력 운영의 효율이란 관점에선 유능한 개발자는 운영보다 개발 업무에 배치하는 게 좋다. 하지만 개발자들이 그걸 거부했다. 아울러 성공한 게임 팀에선 신입 개발자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경향도 생겼다. 결국 넥슨은 다시 제도를 수정했다. 당시 넥슨의 시도는 IT업계에서 종종 화제가 됐다. 유능한 개발자를 영입하고 붙잡아 두는데 유리한 '인센티브' 정책에 대한 고민을 남겼다.
엔씨소프트와의 갈등
개발자들의 대거 이탈을 겪으면서, 김정주 회장은 개발보다는 유통과 마케팅을 중시하는 방침을 굳히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자체 개발보다 다른 회사를 인수합병 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김 회장 본인도 기술보다는 인문학과 문화예술에 더 관심이 있는 편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는 기업인으로 성공한 뒤 대학로 연극 무대에 서기도 했다. 또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전문사 과정에 뒤늦게 입학하기도 했다. 당시 연극인들과 한예종 관계자들은 김 회장이 넥슨 창업자와 동명이인인줄 알았다고 한다. 김 회장이 언론 인터뷰 등을 꺼렸던 탓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넥슨의 성공 방정식은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진행된 엔씨소프트와의 경영권 다툼 이후 삐걱대기 시작했다. 넥슨은 엔씨소프트 지분 14.68%를 8045억 원에 인수하면서 손을 잡았다. 그러나 애초 '단순 투자'라고 했던 걸, 지난해 '경영 참여'로 입장을 바꾸면서 갈등이 시작됐다. 먼저 입장을 바꾼 건 넥슨이었다.
기업법 전문가 아버지에게 배운 것
그리고 올해 들어 진경준 검사장 사건이 터졌다. 넥슨은 '돈슨'이었다. 이런 기업이 대가 없이 이익을 넘겼을 가능성은 없다. 넥슨의 성장 과정에서 진 검사장이 한 역할에 관심이 쏠린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넥슨의 뒷배 역할을 한 게 과연 진 검사장뿐이냐는 게다. 2011년 일본 증시에 상장될 당시 넥슨의 주주 가운데 지분이 많은 50인 중 38명이 한국에 주소지를 뒀다. 그 전에 이뤄진 비상장주식 거래 내역에 대해 넥슨은 밝힌 바가 없다.'제2, 제3의 진경준'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온라인 게임에 '수저' 논리를 도입해서 성공한 김정주 회장 역시 '금수저' 출신이다. 아버지가 판사 출신 기업법 전문가 김교창 변호사다. 김 회장은 어린 시절 김 변호사의 사무실에 자주 놀러갔다고 한다. 그때부터 기업인을 꿈꿨다고 한다.
'월급을 받는 입장이 아니라 월급을 주는 입장이 되고 싶다. 윗사람이 시키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일을 벌이고 싶다.' 김 회장의 이야기를,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이해했다.
하지만 김 회장이 아버지의 법률 사무소에서 보고 배운 건, 그게 다가 아니었을 게다. 김 회장의 어린 시절, 1980년대 초중반은 지금보다 법조계가 더 폐쇄적이던 시절이다. '인맥'이 대단히 중요했다. 그 영향이 지금까지 작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김 회장의 아버지인 김교창 변호사는 넥슨 창업 초기부터 경영에 깊이 개입했다.
그리고 지금,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의 처가 부동산이 매입하는 과정에서 진 검사장이 개입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넥슨 게이트'는 이제 시작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