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도 간다
9월 5일 아침. 비뜨히(Vitry) 시내 외곽 회전 로터리에서 파리 방향 이정표를 보며 돌다가 갑자기 고속도로가 나타나 화들짝 놀라 멈췄다.
며칠 전 길을 잘못 들어 혼쭐이 났던 고속도로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우린 자전거에서 내려 다시 시내로 들어왔다.
세 시간 넘게 시내 외곽을 돌다가 아침에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다시 길을 물어 운하 제방 길로 들어섰다.
운하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던 ‘보’ 같다. 폭은 30m 정도로 좁지만 수심이 깊어 배가 오르내릴 수 있었는데, 수문 옆 관리실에서 그 수위를 조절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넘칠 듯 물이 가득 찬 운하 옆은 서 있는 것조차 겁이 났다. 운하 제방 길은 노면이 울퉁불퉁하고, 곳곳에 웅덩이가 파여 있었다.
덕분에 자전거 바퀴에 떠밀린 돌멩이가 탱탱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튕겨 나갔다.
오랜 시간 운하 제방 길을 달렸더니 온몸이 아프고, 의욕도 떨어지고, 자전거 타는 재미도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좀처럼 뾰족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도중에 끊긴 운하 길을 나와 국도로 들어서자 운동장만 한 크기의 넓은 회전 로터리가 나타났다. 뒤따르는 추니한테 왼손을 들어 로터리를 한 바퀴 돈다는 수신호를 보내며 돌던 때였다.
끼익! 초대형 트레일러가 내 옆에서 급브레이크를 잡으면서 연결된 컨테이너들이 동시에 부대끼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트레일러와 거의 한 뼘 간격으로 접촉할 뻔했던 아찔한 순간을 추니가 뒤따라오면서 고스란히 목격했다.
너무 놀란 우리는 로터리를 빠져나와 길가에 주저앉은 채 한동안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마음을 가라앉히고 프랑스 서쪽으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종종 길을 잃기도 하고, 허기진 채 헤매기도 하고, 또 위험한 지경에 빠지기도 하지만 우리는 가려는 방향을 알고 있다.
지금 달리고 있는 이 길을 누가 달렸다는 기록이 있던가. 우리가 처음으로 이 길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다.
고독과 두려움이 엄습해도 우리는 가야 한다. 갈 수 있다!’ 우린 다시금 마음을 굳게 가다듬었다.
해 질 무렵 샬론(Chalons) 외곽에 위치한 호텔에 짐을 풀고 바로 옆 중국요리점을 찾았다. 우린 요리사에게 맵게 요리해 달라고 주문하며 빨간 고추 표시 세 개짜리 메뉴를 가리켰다.
접시에 좋아하는 해물을 담아 가면 즉석에서 살짝 데쳐 주기도 하는 뷔페식이었다. 우린 눈이 뒤집혔고, 그날 밤 결국 소화제 한 알씩을 먹고 잤다.
9월 6일 아침. 출발부터 아예 지방도로로 접어들어 차량과 함께 달렸다. 괜히 자전거 전용도로를 찾느라 허둥대지 않기로 했다. 자전거 전용도로가 있는데 우리가 못 찾는 건지, 실제로 없는 건지 모르겠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는 자전거 길 지도를 보면서 별로 불편함 없이 달릴 수 있었다. 그래서 프랑스에 들어와서도 계속 자전거 길을 찾으려고 했었는데, 이제부터 자전거 길 찾기는 잊어야겠다.
내비게이션에 서쪽 대서양 방향의 도시와 도로를 미리 입력시켜 놓고 그때그때 도로 상황을 보면서 노선을 선택해 달리기로 했다.
뒤에서 달려오는 차량 운전자의 눈에 잘 띄도록 자전거 가방을 형광색 커버로 덮었다. 내비게이션에 도흐문(Dormans)을 목적지로 입력했다.
D-1 도로와 샤티용(chatillon)을 경유해 가도록 했다. 수확을 막 끝낸 광활한 밀밭은 사방을 둘러봐도 나지막한 구릉지만 보일 뿐 산이 보이질 않았다.
사방이 탁 트였다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게다. 평야를 가로질러 대여섯 시간을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드넓은 포도밭과 함께 ‘샴페인 로드’에 들어섰다. 샴페인 원조 마을답게 포도밭이 온 천지를 뒤덮었고, 길옆으로는 샴페인 생산 공장과 저장 창고들이 줄을 이었다.
포도밭 구릉지를 굽이도는 샴페인 로드는 여기저기 실개천이 흘렀고, 까마귀들은 포도송이에 달라붙어 단맛을 뽑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린 포도 향기에 취해 핸들을 놓칠 뻔했다.
프랑스는 왜 가옥을 예쁘게 수리 안 할까 궁금했다. 프랑스 경제가 어렵다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깨지면 깨진 대로, 또 허물어지면 허물어진 대로 그대로 그냥 뒀다.
창틀이 부식돼 흐트러져도 그대로 여닫고 있으며, 거기에다 원색 페인트는 또 왜 바르는지 모르겠다. 곧 넘어갈 듯한 담장에 진흙 덧씌우기를 해 놓은 모습이 마치 폐가처럼 보였다.
‘좀 깔끔하고 매끄럽게 도색을 하면 좋았을 걸……. 저게 뭐야!’ 거칠고, 울퉁불퉁하고, 곡선미도 없고, 프랑스 사람들 형편없다. 쯧.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시나브로 느낌이 온다.
정돈되지 않은 모습이 오히려 부담 없고 수수해 보였으며, 편하고 오랜 친구 같은 정감이 느껴졌다. 오래되어도 가치 있고 새로운 ‘빈티지(Vintage)’ 스타일이다.
오늘은 도흐문까지 80km를 달려와 저녁 식사로 샴페인 한 병을 곁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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