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구로공단역사기념사업에 참여하면서 몇 년 전 <구로공단에서 G밸리로>란 인터뷰집을 발간한 적이 있다. 구로공단 조성 50주년을 기념하여 그곳을 거치며 족적을 남긴 노동자 기업인 정치가 등 50명을 인터뷰해 엮어낸 책이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후 가장 오랫동안 기억에 남은 이야기는 인명진 갈릴리 교회 원로목사가 들려준 방림방적 여공들의 슬픈 일화다.
구로공단 인근인 영등포에는 방림방적(1967~1991년)이라는 유명한 공장이 있었다. 거기에서 6000명의 여성 노동자가 일했다. 당시 용어로 '여공'을 뽑는 기준은 크게 두 가지였다고 한다. 먼저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달리기를 시켜서 그중에서 잘하는 사람을 뽑았다. 왜냐하면 공장에서 방적기를 20~30대 세워놓고 실 뽑는 걸 지켜봐야 하는데 그 일을 혼자 해야 했기 때문이다. 막 뛰어다니며 일해야 하는 업무 특성상 달리기가 필수 과목이었던 것이다.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 중에서는 손을 내밀어 보라고 해서 손이 뻣뻣하고 굳은살이 있는 소녀를 뽑았다. 그런 사람은 어려서부터 일을 많이 해서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하기 마련이었다. 건강하고, 배우지 못해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았다. 또는 이름과 주소를 써 보라고 해서 글씨를 잘 쓰면 탈락이었고, 만약 한자까지 쓰면 아예 논외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게 선발된 10대 초중반~20대 중반의 '여공'의 근무 환경은 상상을 초월했다. 당시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방적기는 일본에서 퇴물이 된 것을 수입했기에 성능이 신통치 않았다. 그러다 보니 실이 자아지다가 끊어지고 자아지다가 끊어지곤 했다. 어린 '여공'의 역할은 정신없이 돌아다니면서 끊어진 실을 이어주는 것이었다. 빨리 잇지 않으면 방적기에서 나오는 실이 헝클어지기에 '여공'은 말 그대로 분초의 여유 없이 뛰어다녀야 했다.
실이 안 끊어지게 하려고 방적 공장의 온도는 높았다. 온도를 바짝 올려놓은 상태에서 '여공'이 뛰어다니면, 몇 시간 쯤 뒤엔 솜이 온몸에 달라붙어서 멀리서는 사람이 보이질 않고 솜 덩어리가 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 보인다.
'솜사람'이 되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생리 현상의 해결이었다. 화장실을 다녀오면 그 새 방적기에 실이 엉켜서 풀 수 없는 상황이 되고, 그러면 퇴근 후에 엉킨 실을 다 풀고 가야 했는데, 보통 두세 시간이 걸렸다. 더구나 잔업 수당을 주지도 않았다. '여공'들의 선택은 잔업 대신 바지를 입은 채로 서서 오줌을 싸는 것이었다. 고된 노동을 마치고 또 잔업까지 하는 살인적인 노동을 견디느니 어차피 땀으로 범벅에 된 옷에다 오줌을 싸며 실이 엉키지 않게 하는 쪽을 택했다. 일 끝나고 바지를 빨고 옷을 갈아입는 게 훨씬 효율적이었다.
최근 언론에 보도된 '신발 깔창 생리대' 사건을 접하며 나는 멀지 않는 과거의 방림방적 여성 노동자의 노동 환경을 떠올렸다. '신발 깔창 생리대' 사건과 방림방적 일화는 인간의 존엄성을 갉아먹은 야만의 현상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방림방적에서는 순종적이고 통제가 용이한 여성만으로 노동자를 구성하였다. '소변' 사건은 따라서 어느 정도 여성 문제의 성격이 띤다는 측면에서 두 사건에서 또 다른 공통점이 발견된다.
그러나 차이점이 더 크다. '신발 깔창 생리대' 현상은 앞으로 상당 기간 해결되지 못할 전망이지만, 업무 때문에 생리 현상을 해결하지 못하는 그런 작업장이 내가 아는 한 지금은 없다. 자본에 의한 노동의 착취가 근절되지는 않았지만 작업장 내 인간의 존엄성은 노사가 함께 논의할 의제의 테이블에 올라와 있고, 명목상일지라도 그 존엄성을 지키려는 방향으로 노력하고 있다.
노동의 소외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설명은 노동자가 자신 노동의 결과물로부터 배제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소외는 노동 과정에서 인간다움을 상실케 되는, 즉 인간이 개나 돼지와 다름없이 일하게 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방림방적의 참담한 일화는 마르크스의 <자본>에서도 반복되는데, 인간을 짐승으로 만드는 동력은 예나 지금이나 바로 자본의 탐욕이었다.
자본의 탐욕이 달라지지 않았지만, 가장 근원적인 인간다움이 존중받지 못하는 상태의 노동은 많이 사라졌다. 노동자가 소나 말과는 다른 처우를 받으며 일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이런 변화에 대해 거창하게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거론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생리적인 욕구 충족을 문제 삼는 작업장은 적어도 국내에선 거의 사라졌다.
지금의 문제는 작업장 밖이다. 과거 방림방적에서 일한 여성 노동자 또래의 여학생들이 신발 깔창이나 수건을 깔고 생리를 해결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다른 활동에 지장을 받고 있다는, 오래 되었을 그러나 최근에 비로소 공론화한 생리대 문제. 여성 노동자들이 옷을 입고 선 채로 오줌을 누게 만든 원흉이 자본이라면 생리대 문제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생리대 가격을 올리려고 했다가 곤욕을 치른 유한킴벌리는 아니다. 가격의 적정성, 기업 윤리 등 몇 가지 쟁점이 있겠지만, 기업은 기업의 방식으로 사회 문제 해결에 기여할 뿐이지 사회 문제 전반의 해결에 기업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나서지 않으며 나설 수도 없다.
적어도 소녀들이 생리와 관련하여 인간적인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건 사회와 국가의 몫이다. 방림방적 여공의 비인간적 노동 환경에 분노하듯이 깔창 생리대에 분노하여야 하며, 근무 중에 서서 오줌을 눠야만 하는 여성 노동자가 사라졌듯이 비위생적인 생리대로 고통 받는 여성 또한 사라져야 한다.
생리대 사건이 파문을 일으킨 이후로 다양한 지원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는 건 고무적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생리대 문제는 시혜나 지원이 아니라 당연한 기본권으로 접근되어야 한다. 나이나 소득, 지위와 무관하게 여성이라면 생리 현상을 해결하는 데 전혀 기초적인 불편을 겪지 않게 되어야 대한민국을 정상 국가라고 부를 수 있다.
교육부의 나향욱 정책기획관이 7일 저녁에 "민중은 개·돼지로 취급하면 된다"고 한 발언이 일파만파의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요약하면 '99%는 개·돼지이며, 자신을 포함한 1%는 군림자이다'는 것인데, 어찌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그가 경박하게 입을 놀렸을 뿐이지, 실제로 우리 사회, 우리 국가는 99%를 개·돼지로 만드는 시스템을 만들어 고착시키며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막연하게나마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박근혜 대통령이 '신발 깔창 생리대'에 특단의 대책을 내어놓을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잠시 품었다. 박 대통령에 대한 기대라기보다는 청와대 참모와 조언그룹에 대한 아주 정상적인 기대였다. 응당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으로, 그것 이상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안성맞춤의 정책 현안이기에 나의 그런 생각은 당연했다. 그러나 나향욱 발언을 지켜보며, 나의 기대가 얼마나 비정상적인 것이었는지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1%는 본질적으로 99%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선 나향욱 기획관에게 감사하고, 앞으로 많은 나날을 깔창 생리대로 버텨낼 많은 소녀들에겐 참으로 더할 나위 없이 송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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