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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을 지켜낸 십승지(十勝地), 무주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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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을 지켜낸 십승지(十勝地), 무주고을

2016년 7월 고을학교

무주((茂朱)는 조선 태종 14년 전국의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옛 신라 땅의 무풍(茂豊)과 백제 땅의 주계(朱溪)를 통합하면서 두 고을 이름의 첫 글자를 따 ‘무주’라는 새로운 지명을 붙여 사용하게 된 것이 오늘에 이릅니다. 고을의 중앙에는 고려 말 거란병의 침입과 막아내고 임진왜란 때는 <조선왕조실록>을 굳건히 지켜낸 천혜의 요새 적상산(赤裳山. 1034m)이 버티고 있으며, 명산 덕유산(德裕山 1,614m)과 대덕산(大德山 1,290m)이 고을을 옹위하고 있습니다.

여름향기가 절정인 7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33강은 한국인의 전통적 이상향으로 전하는 십승지(十勝地)의 하나인 무주고을을 찾아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가을 적상산. 단풍이 붉게 물들면 마치 여인들의 치마[赤裳]와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무주군


고을학교 제33강은 2016년 7월 24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무주IC-무주읍치구역(한풍루/무주향교)-지전마을-나제통문-서벽정(수성대/일사대)-점심식사 겸 뒤풀이-적상산(안국사/적상산사고지 유구/적상산성)-용추폭포-칠연의총-덕유산IC-서울의 순입니다.

▲<무주고을> 답사 안내도 Ⓒ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33강 답사지인 <무주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신라 땅 ‘무풍’과 백제 땅 ‘주계’가 합쳐 무주고을

무주(茂朱)는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삼한시대(三韓時代) 동쪽은 변진, 서쪽은 마한에 속했고,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변진의 무풍(茂豊)은 신라에 속하여 무산현((茂山縣)이라 했으며, 마한의 주계(朱溪)는 백제에 속하여 적천현(赤川縣)이라 했던 것을 신라가 통일한 이후 종전의 무산을 무풍으로, 적천을 단천(丹川)으로 개칭했습니다.

고려 건국과 함께 무풍의 지명은 그대로 두고 단천을 주계로 바꾸어 사용하다가 조선 태종 14년 전국의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옛 신라 땅의 무풍과 백제 땅의 주계를 통합하면서 두 고을 이름의 첫 글자를 따 ‘무주’라는 새로운 지명을 붙여 사용하게 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신라와 백제는 5세기 이전에는 주로 죽령(竹嶺), 조령(鳥嶺), 추풍령(秋風嶺) 쪽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그 뒤 가야제국(加耶諸國)이 신라에 흡수되면서부터 양국은 백두대간 상의 추풍령에서 육십령(六十嶺) 사이의 높고 낮은 고개를 넘나들면서 전투를 하였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김유신이 백제 장군 의직(義直)과 무산성(茂山城. 지금의 무주)에서 싸웠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무주에 있는 나제통문(羅濟通門)을 사람들은 옛 신라와 백제를 잇던 통로로 잘못 알고 있는데, 나제통문은 일제강점기에 무주와 김천을 잇는 신작로를 닦을 때 뚫은 바위터널입니다.

그렇긴 해도 백제와 신라, 경상도와 전라도를 구분짓던 그 오랜 내력이 있어 지금도 이 나제통문을 사이에 두고 동쪽 무풍 방면의 이남(伊南)과 서쪽 무주 방면의 새말[新村]은 같은 소천리에 속해 있으면서도 말이 다르고 풍속이 판이하고 서로 통혼(通婚)도 하지 않는다고 하며, 지금도 무주에서 경북 김천시와 경남 거창군으로 드나들 때는 반드시 이 문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전라도와 경상도의 상징적 경계로서는 모자람이 없는 셈입니다.

무주는 지형적으로 동쪽으로 백두대간 상의 덕유산이 둘러쳐져 있어 옛 신라 땅인 김천과 거창을 덕산재(德山峴)와 신풍령(新風嶺)으로 넘나들었고, 남쪽으로는 장수, 서쪽으로는 진안과 맞닿아 있습니다. 고을의 중앙에는 고려 말 거란병의 침입과 막아내고 임진왜란 때는 <조선왕조실록>을 굳건히 지켜낸 천혜의 요새 적상산이 버티고 있으며 구천동 백련사에서 흘러내려온 물줄기는 백두대간의 서쪽능선을 타고 흘러내리는 작은 물줄기들을 모두 받아 안아 남대천을 이루어 무주를 휘감아돌아 마침내 금강의 본줄기에 합류하여 서해로 흘러듭니다.

대덕산(大德山. 1290m)은 무주군의 최동단에 위치하며 가야산을 향해 뻗은 능선을 사이에 두고 경북 김천과 경남 거창을 갈라놓은 삼도의 분기점, 즉 해발 1250m의 초첨산을 옆에 둔 명산으로, 옛날에는 다락산, 다악산으로 불리었고 정상에는 기우단이 있었다고 합니다. 1598년(선조 31)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는 전라병사(全羅兵使) 이광악(李光岳)이 왜적을 물리친 곳이며, 1728년(영조 4)에 일어난 이인좌(李麟佐亂)의 난 때에는 이 지역의 의병들이 반란군을 물리쳐 국난이 있을 때마다 고장을 지켜주었던 곳입니다.

부드럽게 생겼으면서도 우직한 남성다운 덕기(德氣)가 어린 이 산은 예부터 수많은 인걸들을 배출했고 이 산이 부려놓은 무풍(茂豊)은 연풍(延豊), 풍기(豊基)와 함께 삼풍(三豊)의 고을이었으며, 특히 천재지변도 피해간다는 남사고(南師古)의 십승지(十勝地) 중의 하나로 난이 일어날 때마다 이곳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구천동 제6경 일사대 Ⓒ무주군

덕유산, 대덕산 등 명산 즐비


덕유산(德裕山. 1614m)은 소백산(小白山)에서 남쪽으로 내리 뻗어 지리산을 이어주는 중간에 위치하며 영, 호남을 한 눈에 굽어보고 있는, 남한에서는 네 번째로 높은 큰 산으로, 남쪽으로 경남 함양군과 거창군에 인접하고 전북 장수군과 군계(郡界)를 이루는데, 옛날에는 광려산(匡廬山) 또는 여산(廬山) 등으로 불렀습니다.

정상인 향적봉(香積峰)의 동쪽에는 백련사가 있고 하류에는 구천동계곡(九千洞溪谷)이 있으며 남쪽에는 칠연계곡(七淵溪谷)이 절경을 이루고 있어, 삼국시대부터 많은 사찰이 들어서서 수도 요람으로 유명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많은 사람들의 피난처로, 구한말(舊韓末)에는 구국항쟁에 앞장섰던 의병들의 활동거점으로 우리 민족의 수난사와 함께 해 왔습니다.

덕유산의 문화경관으로는 신라 때의 고찰 백련사와 원통사가 고색창연하고, 천연기념물인 설천면의 반송(盤松)을 비롯하여 고산지대에서만 살고 있는 주목(朱木)이 군락을 이루며, 구한말 의병의 유적지인 ‘칠연의총’이 있습니다.

지장산(智藏山. 799m)은 무주군 서단에 위치하는데, 진안군 용담면과 안천면, 무주군 부남면의 경계를 이루며 새로운 명소로 자리잡은 용담샘을 지그시 굽어보고 있습니다. 그 뜻은 지혜가 광대하여 일체법(一切法)을 다 포함하므로 지장(智藏)이라 하고 오교장상(五敎章上)에는 일체법이 다 비로자나의 지장의 바다로 흘러들어간다고 했는데 바로 ‘화엄의 바다’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한글로 같은 발음의 지장(地藏)은 지장보살을 의미하므로 혼돈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산은 부남팔경 중의 하나로 1907년 구한말 때 의병장 문태서(文泰瑞)와 신명선(申明善) 부대가 일본군과 싸우며 구국 항쟁을 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삼봉산(三峰山. 1254m)은 백두대간 상에 있고 봉우리가 셋이라서 삼봉(三峰)이라 하며 덕유연봉(德裕連峰)의 첫 번째 봉우리인데, 정상의 주봉을 중심으로 투구봉, 노적봉, 칠성봉, 신선봉, 석불바위, 장군바위, 칼바위로 이어진 능선이 거창 땅의 금봉암(金鳳庵)과 함께 어우러져 마치 소금강의 신비경을 방불케 합니다.

민주지산(岷周之山. 1242m)은 전라북도 동북단에 위치하여 충청, 전라, 경상의 삼도를 가르는 삼도봉을 거느린 명산입니다. 옛 삼국시대는 신라와 백제가 접경을 이루었던 산으로 높은 봉우리와 깊은 계곡에는 곳곳에 소(沼)와 담(潭)이 있고 흐르는 물이 곡류(曲流)하여 절경을 이루며 설천면 소천리로 흘러나와 남대천(南大川)에 유입됩니다.

이 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충북 영동군의 절경 물한리계곡과 경북 김천시 황악산 기슭의 직지천이 유명하고, 동남쪽으로는 미소를 머금은 삼두마애불(三頭磨崖佛)을 품고 있는 석기봉(石基峰. 1200m)과, 1414년(태종 14) 전국을 8도로 나눌 때 삼도의 분기점이 된 삼도봉(三道峰)이 웅거하여 삼남을 굽어보고 있습니다.

조항산(鳥項山)은 백두대간 덕유산 백암봉에서 서북으로 분기된 덕유지맥이 향적봉, 두문산, 안성치, 조두치, 봉화산, 불당산을 지나서 일구어 놓은 산봉우리로, 정상에 서면 사방이 탁 트여서 조망이 좋습니다. 북으로는 민주지산의 연봉인 석기봉과 삼도봉이 다정스럽게 가다오고 동쪽에는 가까이 마향산이 나직이 숨어 있으며, 멀리로 적상산, 향적봉을 지나 남덕유까지 백두대간의 마루금이 이어져 있는데, 서쪽엔 옥녀봉과 지소산을 거느린 지장산이 지척에 있고 물줄기는 모두 금강에 합수되어 서해로 흘러듭니다.

조항산 자라에 있는 ‘금강벼루길’은 금강가의 낭떠러지로 통하는 비탈길을 이르는 말로 주민들은 흔히 ‘보뚝길’로 부릅니다. 원래는 일제강점기에 굴암리의 대뜰에 물을 대기 위해 1.5km 길이의 농수로를 건설한 것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대소마을과 율소마을을 이어주는 지름길로 자리잡았고, 대소리 5일장이 서면 ‘나들이길’로, 아이들의 ‘학교길’로, 그리고 이웃마을로의 ‘마실길’로 이용되던 소통의 길, 토속성 짙은 추억의 길이였습니다.

칠연계곡(七淵溪谷)은 덕유산 능선의 동엽령 서쪽 골짜기에 위치한 심산유곡으로, 반석 위로 흐르는 맑은 찬물이 주변의 울창한 송림과 기암괴석 사이를 헤집고 흘러가는데, 칠연폭포, 용추폭포, 명제소, 문덕소, 도술담 등의 아름다운 비경을 만들며 금강 상류인 구리향천으로 흘러갑니다.

1907년 일본의 강압으로 정미칠조약이 체결되어 우리의 군대가 해산 당하게 되자 일본의 침략에 울분을 참지 못하던 시위보병(侍衛步兵)들은 전국에 흩어져 항쟁을 벌였습니다. 이때 시위대 출신인 신명선이 덕유산을 거점으로 의병을 모집하여 무주, 장수, 순창, 용담, 거창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우면서 수많은 공을 세웠는데, 초기 창의할 때 불과 40여 명에 지나지 않았던 의병은 150여 명의 부대가 되었습니다.

▲칠연계곡 칠연폭포 Ⓒ무주군

칠연계곡(七淵溪谷), 칠연의총(七淵義塚)

1908년 4월, 일본군 사살 15명, 부상 20명의 성과를 거둔 장수격전 후 칠연계곡 송정(松亭)에서 쉬고 있던 중 잠복하고 있던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150여 명의 전 대원이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는데 그 넋을 기리기 위해 칠연계곡에 ‘칠연의총(七淵義塚)’을 세웠습니다.

적상산(赤裳山. 1034m)은 사면이 층암절벽으로 둘러싸여 가을 단풍이 붉게 물들면 마치 여인들의 치마와 같다고 하여 ‘적상’이라 이름 붙였답니다. 정상의 기봉이 향로봉(1029m)을 거느리고 천일폭포, 송대폭포, 장도바위, 장군바위, 안렴대 등의 자연명소와 정상분지의 양수발전소 상부댐인 산정호수(적상호), 고색창연한 적상산성, 안국사 등 유서 깊은 문화유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안렴대는 적상산의 정상 남쪽 층암절벽 위에 위치한 사방이 높은 낭떠러지로, 고려 때 거란의 침입이 있었을 때 삼도안렴사가 군사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들어와 진을 치고 난을 피한 곳이라 하여 안렴대라 했다고 합니다. 병자호란 때는 적상산사고의 실록을 안렴대 바위 밑에 있는 석실로 옮겨 난을 피했다는 유서 깊은 사적지입니다.

장도바위는 적상산성 서문 아래 하늘을 찌를 듯이 서있는 바위로, 고려 말 최영 장군이 적상산을 오르다가 길이 막혀 장도를 내리쳐 길을 내고 올라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산정호수는 적상산 분지(해발 800m)에 위치한 인공호수로 양수발전소에 필요한 물을 담아두기 위해 만든 댐으로 적상호라 부르고 있습니다.

적상산성(赤裳山城)은 고려 말에 축조된 석축산성입니다. 이 성이 있는 적상산은 그 바위색이 검붉을 뿐만 아니라 사면에 둘러쳐 있는 층암절벽이 가을 단풍과 어울려 아름답고 여인의 치마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상산(裳山) 또는 상성산(裳城山)이라고도 부릅니다. 성의 둘레는 약 8143m, 높이 1.2~1.8m이며, 자연석으로 쌓았으며 현재 북문지, 서문지 및 사고지 등이 남아있고, 당시 성 안에는 비옥한 토지가 있었으며 못이 4개소, 우물이 23개소 있었다고 합니다.

고려 말에 거란병이 침입하였을 때 인근 수십여 곳의 군현이 도륙되었는데도 여기에 사는 주민들만은 층암절벽으로 둘러싸인 적상산의 지형적 특성으로 그 참화를 면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연유로 최영(崔塋)은 이곳에 산성을 축조하고 창고 짓기를 건의하였고, 조선 세종 때의 체찰사 최윤덕(崔潤德)도 이곳을 살펴본 뒤 반드시 축성하여 보존할 곳이라고 건의한 바가 있다고 합니다.

그 후 임진왜란이 끝난 1614년(광해군 6)에 실록을 보관할 사고(史庫)가 설치되었고, 1633년(인조 11)에는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묘향산에 있던 사고를 이곳으로 옮겨 보관하였으며 1641년에는 선원각(璿源閣), 군기고(軍器庫), 대별관(大別館)을 세웠습니다. 1643년에는 산성의 수호 대책으로서 승군을 널리 모집하여 호국사(護國寺)를 창건하였는데, 호국사는 적상산사고를 지키는 승병들의 숙소로 1910년 경술국치로 사고가 폐지될 때까지 있었으나 1949년 여순사건 때 소실되었습니다.

▲무주향교 Ⓒ무주군

<조선왕조실록> 지켜낸 적상산사고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에 보관 중이던 실록을 제외하고 나머지가 전소되자, 태조부터 명종까지의 실록 3부를 더 인쇄하여 전주본 원본과 교정인쇄본을 합쳐 실록 5부를 만들어 춘추관, 마리산,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에 각각 보관하게 하였습니다.

이 중 묘향산본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어 관리가 어려워지면서 1614년(광해군 6)에 적상산에 실록전을 건립한 뒤 1618년(광해군 10)에 묘향산사고의 실록 일부를, 1633년(인조 11)에 나머지를 모두 적상산사고로 옮겼으며, 그 후 1641년(인조 19) 이곳에 선원전을 건립하고 선원록(璿源錄)을 보관함으로써 적상산사고는 비로소 완전한 사고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적상산사고에는 실록 824책, 선원록 1,446책, 의궤(儀軌) 260책, 잡서 2984책으로 총 5515책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1910년 이후 일제에 의하여 왕실 규장각으로 옮겨졌다가 한국전쟁 때 북한으로 반출되어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에 보관 중입니다.

이후 실록전과 그밖에 부속건물들은 모두 훼손된 채 유구(遺構)인 주춧돌만 어지럽게 흩어져 남아 있었는데 이곳이 1992년 무주양수발전소 상부댐 축조로 물에 잠기게 되자 현재의 위치로 옮겨 1997년 선원전을, 1998년 실록전을 복원하였습니다. 현재 이곳에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복본 34권(왕조별로 1권씩 27권, 무주에 관한 기록 7권)과 왕실 족보인 <선원록(璿源錄)> 복본 5권을 제작해 비치하였고, 실록의 제작, 편찬 과정 및 옮기는 과정 등을 담은 22종의 전시 패널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적상산성호국사비(赤裳山城護國寺碑)는 1643년(인조 21) 이조판서 겸 대제학인 이식(李植)이 왕명으로 적상산사고를 순찰하고, 문란해진 사고의 관리와 성내의 방비를 철저히 하기 위하여 왕에게 진상(秦上)하여 1645년 호국사를 창건하게 된 경위를 기록한 것입니다.

이 비는 이면비(二面碑)로, 전체의 높이가 1.78m인데, 장방형 농대석(籠臺石) 위에 놓은 비신(碑身) 상단에는 ‘적상산성호국사비(赤裳山城護國寺碑)’라는 두전(頭篆)이 각자되어 있고 그 아래로 본문을 새겼으며, 뒷면에는 ‘순치 2년 10월 일건(順治 二年 十月 日建)’이라 새겼고 비신 위에 올려놓은 이수(離首)에는 4면에 용틀임을 조형한 반용(蟠龍)을 조각해 놓았습니다. 현재는 글씨가 마모되어 거의 알아볼 수 없고, 1898년(고종 35) 간행된 <적성지(赤城誌)> 고적조(古迹條)에 비문의 전문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무주향교와 한풍루

읍치구역(邑治區域)에는 무주향교와 관아에 딸린 누각인 한풍루가 남아있으며 작지만 아담한 서원도 다수 전해지고 있습니다.

무주향교(茂朱鄕校)는 1398년(태조 7)에 관아(官衙) 동쪽에 건립하였다가 그 뒤 북쪽으로 옮겼는데, 이건한 뒤 1692년(숙종 18) 호랑이의 피해가 많아 부사 김몽상(金夢上)이 향로산(香爐山) 서쪽으로 다시 옮겼으나 그 터가 너무나 습하여 1834년(순조 34) 다시 현재의 위치로 옮겼습니다. 1876년(고종 13) 대성전을 비롯하여 동, 서무, 동, 서재를 1884년(고종 21) 명륜당과 홍문을 중수하였고 외삼문, 내삼문, 전사재, 교직사 등이 남아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 6현, 10철을, 동무와 서무에는 우리나라의 18현을 모셨고 규모는 50여명 안팎의 중설위(中說位)에 해당합니다.

한풍루(寒風樓)는 창건연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전하는 바가 없고, 다만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성종 때의 성임(成任)과 중종 때의 유순(柳洵)의 시가 실려 있고, “객관 앞에 있다(寒風樓在客館前)”라고 기록되어 있어 관아에 딸렸던 건물로 추정됩니다. 많은 명사와 묵객들이 찾아와 풍류를 즐겼던 곳으로 전주의 한벽당(寒碧堂),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와 더불어 삼한(三寒)의 하나로서, 1576년(선조 9) 겨울,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도사(都事)로 이곳을 들렀다가 ‘호남의 제1루’라고 명명했습니다.

1592년(선조 25)에 왜군의 방화로 불타버린 것을 1599년(선조 32)에 임제의 동생인 임환(林懽)이 현감으로 왔을 때 다시 지었고, 1783년(정조 7)에 현감 임중원(林重遠)이 중수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불교포교당(佛敎布敎堂)으로 쓰였고, 그 뒤 안국사(安國寺) 승려 이철허(李澈虛)가 불하받았으나 저당채무조(抵當債務條)로 일본인에게 넘겼으며, 일본인은 다시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에 살던 이명주(李命周)에게 팔아넘겼습니다.

이명주는 1936년 이 건물을 영동(永同)의 양강(陽江)가로 옮겨지어 금호루(錦湖樓)라 불렀으나 1971년에 무주군민이 이를 다시 매입하여 이건하였습니다. 원래는 관아가 있었던 남대천(南大川) 가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무주읍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송병선의 서벽정

서벽정(棲碧亭)은 대사헌이었던 연재 송병선(宋秉璿)이 당시의 세태를 비관하고 은둔생활을 하던 중 무주를 찾아왔다가 구천동의 아름다움에 반해 일사대(一士臺)와 가까운 이곳에 집을 짓고 머물면서 영호남의 선비들과 시국을 논하고 후진을 양성한 곳입니다. 그 후 소실되었던 것을 1891년(고종 28)에 재건하였고 한국전쟁 때 북한군의 숙영지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며 1897년(광무 원년)에 무주군수 조병유(趙秉瑜)가 주자(朱子)와 송시열(宋時烈)의 초상을 봉안하였습니다.

송병선은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으로서, 학문과 절제 있는 행동으로 천거를 받아 서연관(書筵官), 경연관(經筵官), 지평(持平)을 거쳐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으나 취임하지는 않았으며, <벽사설(闢邪說)>을 지어 양학(洋學)을 배척하고 일본과의 개국통상을 반대하였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며칠을 단식하고 왕에게 소(疏)를 올리려다 고향인 대전 석남촌에 강제이송되자 ‘전 국민에게 보내는 글’ ‘서사동지(書祀同志)에게 보내는 글’을 짓고 1907년에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음독 자결하였습니다.

이 일대는 자연경관이 절경을 이루어 예부터 많은 선비들이 즐겨 찾았으며 계곡을 무계구곡(武溪九曲)이라 명명하였습니다. 아홉 군데의 명소마다 명칭을 붙였는데 서벽정은 그 중 제4곡인 일사대(一士臺)에 있으며 본래 수성대(水城臺)라 부르던 곳입니다. 송병선이 이곳에 정자를 짓고 후진을 양성할 때 이 고장 사람들이 그의 학리(學理)를 보고 ‘동방에 하나밖에 없는 선비’라 하여 동방일사(東邦一士)라는 별호를 붙이고 이곳을 일사대(一士臺)라 했다고 합니다.

백산서원(柏山書院)은 세종 때 삼정승을 두루 거친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을 비롯하여 사양재(四養齋) 하위국(河衛國)과 그의 네 아들인 하징도(河徵道), 하정도(河呈道), 하형도(河亨道), 하현도(河顯道)를 배향하고 있습니다. 하연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호는 경재(敬齋), 신희(新稀)이며 정몽주의 문인으로 태조 5년(139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후 고위 관직을 두루 거쳐 영의정까지 오르는데, 의정부에 들어간 후 20여 년 동안 문안에 사알(私謁)을 들이지 않았고 법을 잘 지켜 승평수문(昇平守文)의 재상으로 일컬어졌습니다.

1821년(순조 21) 진양 하씨 문중에서 문효공과 정경부인 성산이씨(星山李氏)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영당(影堂)을 세우고 백산영당(柏山影堂)이라 한 것을 국가에서 타진사(妥眞祠)라 사액(賜額)하였습니다. 그 후 1869년(고종 6) 철폐된 것을 1905년 유림과 후손에 의해 복원되어 하위국(河衛國)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죽계서원(竹溪書院)에서 훼철된 하징도(河徵道), 하정도(河呈道), 하형도(河亨道), 하현도(河顯道)의 위패를 봉안하고자 백산사(柏山祠)를 창건하였고 1917년에 후손들이 다시 건물을 짓고 구액(舊額) 백산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릅니다.

죽계서원(竹溪書院)은 1713년(숙종 39)에 건립된 서원으로, 금산김씨 시조이자 고려 때의 이름난 무신(武臣)이었던 김신(金侁)과 조선의 무신 장필무(張弼武)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으나 그 후 임진왜란 때 전사한 장필무의 두 아들 장의현(張義賢), 장지현(張智賢)과 하정도(河呈道), 하형도(河亨道), 하현도(河顯道)를 추가 배향하였습니다.

1869년(고종 6) 대원군의 철폐령으로 훼철되어 1905년에 하정도, 하형도, 하현도 등 3현의 위패는 백산서원(柏山書院)으로 옮겨 봉안하였으며, 1967년 본 서원을 다시 재건하여 현재는 문간공 참정 김선(金侁)을 주향으로 하고 조선 중기의 3부자 충신 장필무(張弼武)와 그의 아들 장의현(張義賢), 장지현(張智賢)을 배향하고 있습니다. 이곳이 평장마을이라 불리는 것은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김신의 출생지라 붙여진 지명입니다.

작지만 아담한 서원들

덕천서원(德川書院)은 연산군 때 무오사화로 희생당한 탁영 김일손(金馹孫)과 그의 후손인 김치삼, 김형을 배향(配享)하고 있는데, 1919년 설천면 두길리 구산마을 앞산 위에다 유천사라는 현판을 걸고 건립했다가 1982년 소천리 이남마을로 옮겼고, 1993년 현 위치로 다시 옮기면서 덕천서원이라 했으며 경내에는 덕천사(德川祠)라는 사당과 공덕비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김일손은 김종직의 제자로 스승을 닮아 성정이 곧은 인물로서 1498년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앞서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은 것이 연산군에게 알려져 사형을 당했으며, 중종반정 이후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문민(文愍)의 시호를 받았습니다.

도산서원(道山書院)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도승지, 충청도관찰사, 대사헌, 형조판서 등을 지내고 공직에서도 학문진흥에 관심을 두어 성리학에 관한 책을 펴내 임금으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한 충목공 김려석(忠穆公 金礪石)과 세조 즉위에 반대하여 은둔생활을 한 임회당 박희권(臨淮堂 朴希權), 김여석의 5대손 김경조(金敬祖)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이 서원은 1813년(순조 13) 당초 백운암(白雲庵) 건물을 이건하여 건립한 것이라고 하는데 고종 5년(1868) 훼철되었던 것을 순종2년(1908) 도산여학당(道山輿學堂)으로 개칭하고 사립학교를 설립하였다가 1942년 안성공립학교가 개설되면서 다시 서원으로 환원하였고 1970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분양서원(汾陽書院)은 일제강점기인 1943년 건물을 중수하고 사당인 숭모사(崇慕祠)를 건립한 후 문중의 선조인 남은(南隱) 서섭(徐涉), 취정(翠亭) 서효재(徐孝載)를 배향하였고 1971년 사당 앞에 서재(書齋)인 분양정사(汾陽精舍)를 세우면서 분양서원이라는 현판을 걸었습니다. 경내에는 숭모사와 강당, 그리고 분양정사묘정비, 내삼문, 외삼문, 고직사 등이 남아 있습니다.

아름다운 지전마을


남대천가에 있는 지전(芝田)마을은 전통가옥, 남대천, 노거수, 마을 전체에 식재되어 있는 감나무, 이들과 어우러진 담장이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전통마을로, 뒤로는 백두대간이 둘러쳐져 있고 남대천이 마을의 좌측을 지나 금강으로 흘러들고 마을은 개량기와집 형태의 가옥이 주종을 이루며 특히 700m에 이르는 아담한 돌담과 토석담이 아름답습니다.

담장은 본래의 기능인 주택의 경계 역할을 하는 담장과 외벽의 기능을 하는 담장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 마을의 대부분의 담장은 본래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을 차지하는 토석담은 흙과 자연석을 혼용하여 평쌓기를 하였고 담장의 지붕은 한식기와가 아닌 시멘트 기와로 처리되어 아쉬움이 남습니다.

지전(芝田)이라는 이름은 이곳이 예전부터 지초(芝草)가 많이 나던 곳이라 하여 붙여졌다고 합니다. 마을의 형성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마을 옆을 흐르는 남대천가의 오래된 느티나무의 수령이 약 300여년 정도인 것으로 보아 17세기 후반에 형성된 전통마을인 것 같습니다.

산이 높고 골이 깊어 이곳에 기대고 있는 사찰들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백련사(白蓮寺)는 신라 신문왕 때 백련선사가 숨어 살던 곳으로, 830년(흥덕왕 5)에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전성기 때는 14개의 사암이 있어 구천 명의 승려들이 도를 닦던 곳이어서 구천동이라 했다고 합니다. 조선 중기 부용, 부휴, 정관, 벽암대사 등 수많은 고승들이 선풍을 일으켰던 불교성지로 한때는 구천동사라 하였습니다.

한국전쟁 때 모두 소실되었다가 무주구천동이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백련사도 복원되기 시작하여, 1967년 무주읍내에 있던 조선시대 무주부(府)의 관아인 동헌(東軒) 건물을 이건하여 요사 문향헌(聞香軒)으로 사용하였으며 현존하는 당우 대웅전, 원통전, 명부전, 보제루, 천왕문, 일주문, 범종각 등이 있습니다.

안국사(安國寺)는 1277년(충렬왕 3)에 월인(月印)이 창건하였다는 설과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복지(卜地)인 적상산에 성을 쌓고 절을 지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승병들의 거처로 쓰이기도 했으며 1613년(광해 5) 사찰을 중수하고 이듬해 사고(史庫)를 두어 사각(史閣)과 선원각(璿源閣)에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선원록(璿源錄)>을 보관하고 덕웅(德雄)을 승장으로 하여 승병 92명을 두고 지키게 하였는데 이때 사찰 이름을 안국사라고 바꿨습니다.

1910년에 사고의 책을 규장각으로 옮기자 이철허(李徹虛)가 사고 건물을 경내로 이전하였고 1990년 초에 양수댐 건설로 절 지역이 수몰지구에 포함되자 1991년부터 이전을 시작하여 1993년에 지금의 위치로 완전히 옮겼으며 경내에는 극락전, 천불보전, 청하루, 지장전, 삼성각, 범종각 등이 남아 있습니다.

북고사(北固寺)는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무학대사 자초(自超)가 경월사(慶月寺)라는 본래의 이름을 북고사로 바꿨다는 설화가 전하므로 늦어도 고려 말에는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392년(조선 태조 1)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자초가 새 도읍지를 찾아 여러 지방을 다니다가 이 절이 있는 곳에 이르러 “무주의 지세가 복지(卜地)이나 북쪽 능선이 약하다”라고 하며 고을 현감에게 절에 탑을 세우고 절 이름을 북고사로 바꾸면 장차 큰 고을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산 높고 골 깊으니 사찰도 많다


원통사(圓通寺)는 신라 때 창건된 고찰로 구천동 임성당 대사의 제자 남봉 선사가 선풍을 전하던 사찰인데, 1689(숙종 24) 탄언, 혜옥 선사 등이 중창하였고 조선 말기에는 일본군에 항거하던 의병들이 활동 근거지로 삼았던 호국 도량입니다.

<원통사중창비문>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던 당시의 규모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법당 외에 종각, 누각 등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비문에 의하면 탄언(坦彦), 도영(道英), 혜옥(惠玉), 일학(一學) 등에 의해 당(堂)과 종각을 중창하고 불상을 중수했으며 동종을 주조하는 등의 불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원통사는 의병부대가 항일투쟁의 근거지로 삼았으며, 1949년 여순사건 병화로 소실된 것을 1985년에 대웅전, 선초당(善超堂), 연교(超然橋) 등을 완성함으로써 원통사의 옛 모습을 찾게 되었습니다.

향산사(香山寺)는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하는 사찰로 3·1운동 때의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용성(龍城) 스님이 창건하였고 1936년 선파(禪波) 스님이 중건하였는데, 대웅전과 나한전, 산신각, 일주문, 종무소 겸 선방, 요사채로 이루어진 단출한 규모로 마당에 3층석탑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향산사에는 총 43종, 97책의 불서(佛書)가 소장되어 있는데 그중 1474년 궁실의 극락왕생과 장수를 기원할 목적으로 간행된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詳校正本慈悲道場懺法)>과 <운수단(雲水壇)> 2종, 1568년 경북 상주 보문사에서 간행된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天地冥陽水陸齋儀纂要)> 등 17책, 그리고 19권의 희귀본은 ‘향산사소장 불서’라는 명칭으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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