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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내면의 바다를 깬 도끼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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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내면의 바다를 깬 도끼는 무엇인가?"

[화제의 책] 정혜윤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텍스트가 있고 텍스트에 대한 텍스트, 즉 메타 텍스트가 있다. 그런데 이 책은 메타 텍스트에 대한 텍스트, 그러니까 메타-메타 텍스트가 되겠다.

이런 경우 원 텍스트와 독자의 거리가 멀어진다는 치명적 단점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각각의 책은 각각의 독서를 통해 다시 태어난다"는 보르헤스의 말을 대입해보면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정혜윤이 만난 매혹적인 독서가들>은 오히려 더 매력적이다.

진중권·정이현·공지영·김탁환·임순례·은희경·이진경·변영주·신경숙·문소리·박노자가 책을 만나 맺은 관계들이 정혜윤에 의해 해석 혹은 전달되니 독자가 접하는 컨텍스트는 엄청나게 풍부할 수밖에 없다.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나 장정일의 <독서일기> 혹은 정혜윤의 전작(前作) <침대와 책>같은 '책에 대한 책'을 떠올려 보면 이해가 쉬울까?

관음증을 충족시키기 충분한 인터뷰 11편

이 책은 정혜윤이 '매혹적인 독서가' 11명과 나눈 독서 인터뷰에다가 자신의 독서관을 함께 엮은 책이다.

11명 중에 누가 나랑 비슷한 성향을 지녔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일단 쏠쏠한 재미다. 정혜윤은 진중권을 만나 벤야민과 보르헤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정이현과는 야구를 소재로 깔깔댄다. 임순례와는 폴 오스터를 향해 엄지 손가락을 치켜든다.
▲ 표지 촬영 장소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목동 교보문고 서가란다 ⓒ푸른숲 출판사

<손석희의 시선집중>이 아닌 다음에야 인터뷰어가 주도권을 쥐는 인터뷰란 얼마나 재미없는가? 하지만 이 책에는 인터뷰이 11명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난다.

임순례에 대한 인터뷰는 스산한 느낌을 남기고, 신경숙 인터뷰에선 70년대가 엿보이고 이진경·변영주 인터뷰에선 80년대가 드러난다.

정혜윤 자신의 방대한 독서량, <CBS> PD로 시사 교양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쌓아온 단단한 내공이 없으면 불가능한 인터뷰들이다.

외려 이 점이 단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느낌까지 든다. 제목도 들어보지 못한 책을 가지고 두 사람이 이마를 맞대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질투가 자괴감에 빠질 위험이 크다는 말씀.

그래서 '책 어때'라는 정혜윤의 질문에 "인터뷰이와 인터뷰어의 밀착도가 너무 높아서 독자가 파고들 틈이 없다"고 심술궂게 답해줬다.

하지만 틈이 없으면 어떠랴. 정혜윤은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 <붉은 다라 아래 따뜻한 물>을 언급하며 "이들은 몸을 섞었던 관능적인 여인이 책이었던 사람들"(15쪽)이라고 말한다. 틈이 없는 탓에 매편의 인터뷰는 우리 관음증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하다.

저자 자신이 12번째 매혹적 독서가

그리고 매혹적인 독서가 11명을 만난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는 또 다른 매혹적인 독서가 정혜윤이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드러낸 자신의 모습은 다른 11명에 손색없이 매혹적이다.

프롤로그에서 오빠가 들고왔던 <전태일 평전>을 쥔 자신의 모습을 묘사한 대목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한 대목을 연상시키게 하고 <톰소여의 모험>에 대한 대목은 한 때는 모두가 꼬마 독서광이었던 우리의 어린시절을 연상시킨다.

숙취가 덜 깬 한낮에 정혜윤을 만난 날 '책 행동학가'임을 자임하는 그녀가 긴 팔을 휘휘 저으면서 책에 나온 명장면을 따라하던 경험을 신나게 말할 때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지금 고백컨데 기자도 어릴 적 <톰 소여의 모험>에서 톰이 이모로 부터 벌을 받고 담장 페인트 칠을 하던 대목을 읽다 페인트 통과 붓을 찾아들고 우리 집 벽 앞에 선 적이 있었다.

그리고 에필로그에선 11편의 인터뷰 속에 등장했던 14명의 작가가 재정리된다.

"한 권의 책의 운명은 쓰인 시간에 결판나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다가올 어떤 의미 부여를 기다리는 형식이라 했다. 나는 이것이 책과 인간의 공통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출생할 당시에, 취업을 할 당시에 결정 난다기보다는) 어떤 의미 부여를 기다리고 있는 존재다"

정혜윤 자신이 이 책에서 절창絶唱)으로 꼽은 대목인데 보르헤스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기자는 아쿠타카와에 대한 대목 "정말이지 나는 완고한 고집불통 진실보다 번민 끝의 취약한 거짓말에 더 맘이 가는데 아쿠타가와의 표현대로라면 '나는 불행히도 안다. 때론 거짓말에 의지해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질실도 있음을.…나의 표현대로라면 '거짓말에 의지하는 진실이 가장 치명적인 진실이다" 쪽이 더 맘에 든다.

"불안한 영혼을 가진 자는 책을 찾을 수 밖에 없다"

정헤윤에게 '진지한 독서광과 독서광을 자임하는 속물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냐'고 물었다. 곧바로 "전혀 없다"는 답이 곧바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정혜윤은 "불안한 영혼을 가진 자는 책을 읽을 수 밖에 없고 나는 그 독서가들의 불안한 영혼을 사랑한다"고 덧붙였다.

그렇다. 사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결핍된 존재다. 그리고 그 결핍을 자각하지 못하는 모습은 또 얼마나 추한가. 근원적 결핍을 뼈저리게 느끼는 인간을 책을 손에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책은 결핍을 메워주거나 치유하는 치료제가 아니라 결핍을 더 똑똑히, 깊이 자각시키는 마약이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정혜윤이 전작(前作) <침대와 책>에서 인용한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 한 대목이다.

그런데 우리는 타인에게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너무 쉽게 연민을 베풀곤 한다. 자신에 대한 연민을 끊을 수 있는 용기를 갖춘 자만이 타인에게도 연민을 멈추고 연대의 손을 내밀 수 있으리라.

이 책 뒷날개에는 "한 권의 책은 내면의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는 문장이 찍혀있다. 그리고 칼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비판을 위하여, 서설>에서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책을 만든 12명도 '책이야말로 자기 연민을 멈추고 스스로를 직시할 수 있게 만드는 무기'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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