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고 효과적으로 영양을 보충하려고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창비 펴냄)에는 주스의 속성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 나온다. 중심인물 가운데 한 명인 영혜는 어느 날 갑자기 육식을 거부한다. 안 그래도 마른 영혜의 몸이 축날까 봐 걱정스러운 그의 어머니는 딸에게 흑염소 즙을 건네며 마시길 강요한다. 고기의 영양을 농축한 즙액을 마시고 기운을 되찾으라는 것이다.
영어 단어 '주스'를 '즙'으로 바꿔 놓고 보면 왜 오늘날 사람들이 그토록 주스에 집착하는지 알 수 있다. 영양이 결핍된 사람의 원기를 보충하기 위한 음식으로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게 즙 또는 주스였다. 사람들 대부분이 굶주림으로 고생하던 시절에는 고기의 즙이야말로 최고의 약이자 음식이었다.
시대는 종말을 고하지 않는다. 한 시대가 저물고 다른 시대가 떠오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둘이 뒤섞여 공존하는 시기가 한참 동안 계속된다. 음식의 역사는 특히 그렇다. 과잉을 걱정하는 우리 시대에 들어 그 재료가 채소와 과일로 변하였을 뿐, 즙에는 영양 결핍으로 시달리던 옛날, 음식을 약처럼 바라보던 사람들의 관점이 녹아 있다.
과거 결핍의 문제가 칼로리와 단백질과 지방의 부족 때문이었다면, 이제 사람들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건 채소와 과일과 섬유질이다. 붕어 즙, 잉어 즙, 흑염소 즙 대신 해독주스와 착즙주스를 마신다. 화학첨가물과 가공식품으로 뒤덮인 시대에 자연식품인 채소와 과일의 즙을 마시면 신체의 독을 제거하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다. 하지만 틀렸다. 주스 다이어트가 때때로 성공하는 이유는 그 속에 녹아 있는 비밀스러운 성분 때문이 아니라 단지 음식을 적게 먹기 때문이다. 해독은 채소와 과일 속 성분에 맡겨서 될 일이 아니라 간과 신장이 하는 일이며, 주스는 엄연한 가공식품이다.
끓이거나 압력을 가해 살균
식물 입장에서는 꼭 필요한 방어 장치다. 하지만 그대로 두었다가는 주스가 효소 반응으로 변질되는 걸 피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주스를 끓여서 효소를 잠재울 필요가 있다. 살균을 위해서든, 효소의 기능 정지를 위해서든 주스를 장기 보관하려면 끓여야 한다. 마트에 냉장 진열된 다양한 주스는 저마다 생생함을 뽐내지만, 우리가 마트에서 구입하는 주스 대부분은 생식이 아니라 한 번 끓인 음식, 즉 화식이다.
소비자로서는 주스가 가열 조리된 음식이라는 사실이 달가울 리 없다. 이를 노리고 시장에 새로 등장한 게 착즙주스와 초고압처리 주스다. 착즙주스는 칼날 대신 맷돌로 재료를 눌러 짜내는 방식으로 열로 인한 성분 변질을 최소화했다지만, 사실 그런 추출 방식에 별 의미는 없다. 착즙 후 그대로 두면 식물에서 빠져나온, 주스 속에서 뒤섞인 내용물이 반응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그래서 대량 생산되는 착즙주스는 초고압처리로 살균한다. 강한 압력을 가해 주스 속 효소와 세균을 찌그러뜨려서 활동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초고압처리를 거친 주스는 끓이지 않고도 보존하기 쉽고 맛도 좋지만, 매우 비싸다. 한 번 마실 분량의 작은 병이 1.5L 가정용 주스보다 더 비싸다. 한 병에 1만 원이 넘는 착즙주스는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에 딱 좋은 수단이다. 그러니 할리우드 스타가 매일같이 착즙주스를 입에 달고 사는 게 건강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말기를. 캐나다를 대표하는 신문 <글로브 앤드 메일>에서 보도한 것처럼 착즙주스는 새로 유행하는 '지위 상징물'에 불과하다. 명품가방 대신 주스를 마시는 셈이다.
건강 때문이라면 비빔밥이 낫다
그렇지만 착즙주스나 초고압처리 주스의 영양 가치가 월등히 뛰어나다는 과학적 근거는 없다. 카페에서 바로 짜서 판매하는 착즙주스나 마트에서 판매하는 초고압처리 주스나 본질적으로 당분 음료다. 세계 각국의 정부와 보건단체에서 주스에 대해 경고하는 이유도 주스가 당분을 과잉 섭취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주스 한 잔으로 하루 분량의 채소와 과일을 섭취하라는 광고가 아무렇지도 않게 방송되지만 미국, 영국, 호주에서는 정부가 나서서 주스로 과일과 채소를 섭취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점을 환기하고 있다. 심지어 캐나다 보건부에서는 국민의 권장 식사법에서 주스를 빼 버려야 하는 게 아닌가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도 주스 속 당분량에는 차이가 없으니, 당분을 과잉 섭취하는 데 따른 건강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주스의 과잉 섭취를 방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빈속에 주스를 마시면 금방 다시 배가 고프다. 주스 속 당분이 빠르게 흡수되어 혈중 포도당 수치가 높아지면 우리 몸은 더 많은 음식을 기대하고 인슐린을 내어놓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음식을 더 먹었다가는 몸무게만 늘리기 십상이다. 가스파초 속 베타카로틴을 비롯한 지용성의 영양물질은 효율적으로 흡수된다. 수프에 넣은 올리브유와 수프에 곁들여 먹는 다른 음식의 지방이 지용성 성분을 녹여 체내로 흡수되도록 돕기 때문이다. 지방은 음식이 소화되는 속도를 늦추고 포만감을 길게 지속시킨다. 주스를 마실 때는 이와 다르다. 당분은 빠르게 흡수될지언정 다른 영양성분의 흡수는 도리어 줄어든다. 덜 먹어도 될 건 더 먹고, 더 먹어야 할 건 더 적게 먹는 식이다.
건강 때문이라면 굳이 주스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 채소의 맛과 영양을 즐기려면, 달걀 프라이에 나물과 채소를 얹고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고 쓱쓱 비벼 먹는 비빔밥이 훨씬 나은 방법이다. 마찬가지로 식후에 과일 몇 조각을 자신의 치아로 씹어 먹는 게 열심히 주스로 짜서 마시는 것보다 낫다. 하지만 맛 때문이라면 말리지 않겠다. 더운 날 냉장고에서 차갑게 식힌 과일주스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 가운데 하나다. 그러니 천천히 조금씩 여유롭게 맛보며 즐기시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우리나라 대표 생협 한살림과 함께 '생명 존중, 인간 중심'의 정신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한살림은 1986년 서울 제기동에 쌀가게 '한살림농산'을 열면서 싹을 틔워, 1988년 협동조합을 설립하였습니다. 1989년 '한살림모임'을 결성하고 <한살림선언>을 발표하면서 생명의 세계관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살림은 계간지 <모심과 살림>과 월간지 <살림이야기>를 통해 생명과 인간의 소중함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바로 가기 : <살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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