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2년 개봉한 마이클 만 감독의 영화 <알리>는 선수 시절 무하마드 알리가 두려움과 불가능에 맞서 싸우는 방식을 그렸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1974년 10월, 아프리카 자이레(지금의 콩고)에서 열린 알리와 조지 포먼의 대결이다. 이 경기는 이른바 '럼블 인 더 정글(Rumble in the Jungle)'이란 명칭으로 잘 알려진, 세계 복싱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명승부로 손꼽히는 시합의 하나다. 영화는 대결을 앞둔 알리의 두려움을 담담하지만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도 그럴 것이 조지 포먼은 알리가 간신히 이긴 조 프레이저를 처참하게 뭉갠 세계 최강의 핵주먹이었다. 영화 속 알리는 대외적으로 "포먼을 때려눕히겠다"고 특유의 입담을 계속해서 내뱉지만, 실제로는 조지 포먼의 핵펀치에 관한 공포와 패배의 두려움에 떤다.
사실 복서로서 전적만 보면, 알리는 '위대한 복서', '위대한 챔피언'이라고 말하기 2% 부족한 선수다. 통산 56승 5패, 37KO의 기록에서 보듯 무패의 복서가 아니었다. 30대에 링에 복귀했으나, 몸이 둔해져 과거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현란한 풋워크와 기술도 보여주지 못했다. 영화 속 모습에서 알 수 있듯, 알리는 사생활 면에서도 성인과는 거리가 먼 허점투성이 인간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알리를 '위대한 챔피언', '위대한 사람(The Greatest)'으로 기억한다. 권투를 즐기지 않는 이도 그의 이름은 안다. 기록과 기억의 차이를 만드는 이유는 알리가 기록지에 드러나지 않은 무언가를 가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알리가 시련과 두려움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행동했는지 알고 있다. 그는 두려움에 떨었으나, 결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온몸으로 공포와 맞서고, 불가능에 도전했다. 알리는 불멸의 인간정신을 몸으로 보여준 선수였다. 기록지에 드러나지 않은 이 꺾이지 않는 인간미가 알리를 '위대한 챔피언'으로 기억되게 만들었다.
지난 1996년 7월, 애틀랜타 올림픽 성화 최종 주자로 알리가 선정됐다. 그는 단순히 성화를 점화하는 장면만으로 사람들이 '위대한 사람(The Greatest)'의 모습을 각인케 했다. 이 순간은 알리의 위대함을 고스란히 응축한 장면이자, 올림픽 개막식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명장면으로 손꼽힌다. 잠시 그 순간을 추억해보자.
올림픽 여자 수영 4관왕 출신의 재닛 에번스가 성화를 들고 성화대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장막 뒤에서 최종 주자로 짐작되는 한 남자가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모습을 드러내 성화를 이어받았다. 성화봉을 든 남자의 손과 반대편 팔은 쉴 새 없이 떨렸다. 남자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언뜻 보기에도 남자의 건강 상태는 심각해 보였다.
잠시 후, 그 남자의 얼굴이 TV 카메라에 크게 잡히자 스타디움에 모인 8만5000여 명의 관중과 이 장면을 TV로 지켜본 전 세계 사람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남자는 무하마드 알리였다.
많은 이가 알리가 복싱의 후유증으로 인해 뇌에 치명적인 손상이 오는 파킨슨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알았다. 하지만, 그의 몸 상태나 병마의 진행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알지 못했다. 그의 몸 상태는 얼핏 보기에도 무척 심각했다.
알리는 성화를 넘겨받은 뒤에도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다행히 그는 성화대 바로 곁에 서 있었다. 알리는 몸만 간신히 돌린 채, 힘겹게 성화대에 불을 붙였다. 불을 붙이는 순간에도 알리의 손과 몸은 계속해서 떨렸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불안해보였다.
이 순간 알리는 띄엄띄엄 끊어지는 어눌한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를 보고 우셨나요? 눈물을 거두세요. 나도 이렇게 하는데 당신들은 왜 못하겠습니까? 기억하세요. 포기하지 않는다면 불가능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알리의 위대함을 만드는 방식이다. 파킨슨병은 뇌에서 시작해 사람을 서서히 파괴하고, 종국에는 죽음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알리는 결코 두려워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파킨슨병 진단을 받은 후 병원 치료를 거부하고, 30년 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굶주리는 아동에 관한 지원 활동에 매진했다. 이 업적이 평가받아 알리는 지난 2007년 노벨평화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영화 <알리>에서 알리는 "그래서요? 사람들이 내가 뭐가 되길 원하든, 난 내가 원하는 내가 될 거요"라는 명대사를 남긴다. 알리가 원했던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말년 알리의 대답은 이랬다.
"나는 모든 이의 권리를 존중하는 유머 있는 흑인으로, 자유·정의·평등을 위해 싸운 인간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흑인이면서 장애인인 내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싸운 것처럼,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이 세상과 맞서 승리했으면 좋겠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성공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당신들에게 줬다면... 나, 알리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위대한 권투 선수이자 인권운동가, 반전운동가 알리는 지난 3일 영면했다. 알리의 마지막 라운드는 이제 끝났지만, 그가 인생의 매 라운드마다 우리에게 건넨 메시지와 울림은 앞으로도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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