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본연의 나로
다음 날 아침. 붕어섬 캠핑장은 인터넷이 잘 안돼서 블로그를 여는데 버퍼링이 계속됐다. 글은 나중에 쓰기로 하고 사진부터 얼른 후닥닥 올렸다.
블로그는 매일 아침 5시부터 두 시간 정도 썼다. 낮에는 라이딩을 하느라 힘들고, 저녁엔 피곤해서 글을 제대로 쓸 수 없어 새벽에 맑은 정신으로 글을 썼는데 아직 하루도 빠짐없이 써 왔다.
나와의 약속이니 끝까지 일기를 잘 써야겠다. 물안개 자욱한 붕어섬을 한 바퀴 산책하고 나서 텐트를 정리했다.
매트와 베개에서 공기를 뺀 다음 돌돌 말아 압축시키고, 머리맡에 놓아둔 안경과 스마트폰, 물통, 여권, 지갑을 챙겼다.
침낭에서 빠진 거위 털이 텐트 한구석에 모여 있다가 회오리쳤다. 입 안에서도 털이 나왔다. 퉤퉤!
텐트 안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라이딩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에 바깥 텐트를 마지막으로 접기 시작할 때쯤이면 추니와 항상 의견이 엇갈린다.
추니는 남아 있는 물기가 완전히 마를 때까지 나뭇가지에 걸든가 아니면 마른 바닥에 펴 놓자고 했고, 나는 어느 정도 마르면 대충 둘둘 말아 가방에 넣자고 했다.
붕어섬을 나오느라 작은 다리를 건넜다. 잠시 전망 좋은 쉼터에 들렀다. 강 건너 보이는 포도밭은 긴 능선을 잔디 깎는 기계로 밀어 놓은 듯했다.
쉼터에는 이미 몇 명의 자전거 여행자들이 와 있었는데, 우리가 멈춰 서자 자기들끼리 “꼬레아, 꼬레아”라고 수군거렸다.
“할로. 안녕하세요.” 안장에서 내리며 인사말을 건네자 일제히 표정들이 바뀌면서 각자 한마디씩 해 댔다. “저 건너 포도밭이 참 아름다워요. 어디 먼 곳에서 오셨나요? 어디까지 가시는데요? 비 올까 걱정입니다.”
우린 알아듣는지 확인할 필요 없이 중언부언 떠들어 댔다. 모두들 한결같이 다 알아들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 반응이 없다. 대표 아저씨 한 분이 독일어로 뭐라 뭐라 말하지만 우리 역시 고개만 끄덕일 뿐 정확한 얘기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거 한번 읽어 보시겠어요?” 우린 핸들 가방에서 영어와 독일어로 번역된 소개장 한 장을 꺼냈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현지에서 갑갑할 때 쓰려고 친구한테 번역을 부탁해 가져온 것이다.
A4 용지 양면을 코팅한 건데 우리의 여행 일정과 청실홍실, 2018평창동계올림픽, 김연아, 독일에서 활약하고 있는 손흥민 선수에 대한 이야기들이 적혀 있다.
“와우! 멋져요. 우리랑 같이 사진 한 장 찍을래요?” 소개장을 읽자마자 옆 사람들과도 정보를 공유하느라 분주하더니 기념사진을 함께 찍자고 다가왔다.
“물론이죠. 좋아요. 아름다운 한국에 한번 놀러 오세요.” 우린 골고루 한 팀씩 돌아가며 같이 사진을 찍었다.
트레이스 붕어섬을 떠나 40km 남짓 달려 ‘블라이(Bullay) 캠핑장’에 도착했다.
블라이 캠핑장 주인아저씨는 독일어, 나는 서툰 영어로 서로 얘기를 주고받느라 쩔쩔매고 있는데 주변에 도와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캠핑장 사용료는 내일 아침에 나갈 때 지불하고, 화장실 열쇠는 10유로를 먼저 맡긴 뒤에 받아서 사용하다가 내일 아침에 열쇠를 반납하면 맡겼던 돈을 돌려주겠다.
그리고 샤워 코인 2회분 80센트를 미리 내라.”는 얘기를 한 시간 가까이 손짓 발짓한 끝에 겨우 알아들었다. 먹구름은 몰려오는데 접수가 끝나지 않아 추니는 옆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서둘러 지정 장소로 달려가 텐트를 치는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강한 소나기에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흠뻑 젖었다. 젖은 텐트를 수건으로 닦아 짜냈다.
그래도 덮고 잘 침낭은 젖지 않아 다행이었다. 피곤해 그냥 침낭 속으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 가재도구가 비에 젖었으니 수해 응급 구호 물품이라도 받으면 좋겠다.
8월 26일. 모처럼 맑은 아침이라 기분이 상쾌하다. 서둘러 젖은 텐트와 가재도구들을 캠핑장 울타리에 걸거나 도로 위에 널었다.
빵과 우유로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뽀송뽀송하게 다 말랐다. 빈트리치(wintrich) 부락을 지나는데 여기저기서 왁자지껄하다.
방금 여객선이 승객을 싣고 와 풀어 놓았나 보다. 선착장이 몇 개 있는지를 보면 그 지역의 상권을 가늠할 수 있다.
여객선에서 내린 관광객들은 그 마을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도 하고, 몇 시간 동안 머물다가 다른 마을로 이동하기도 한다.
뒤따라오던 추니가 갑자기 안 보여 되돌아가 보니 나뭇가지를 휘어잡으며 뭔가를 열심히 따고 있었다.
도토리를 뭐하러 따느냐고 했더니 껍질을 까서 하얀 알맹이를 입에 넣어 주었는데, 어릴 적 먹어 본 ‘깨금’이었다.
쉼터에서 가벼운 스트레칭을 했다.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 추니는 왼쪽 손목에 보호대를 두르고, 나는 왼쪽 팔꿈치에 파스를 붙였다.
추니는 며칠 전부터 손목이 시큰시큰해서 핸들을 꼭 쥘 수가 없단다. 하기야 한 달 열흘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4~50km를 달렸는데 몸이 성할 리 없겠지.
“잠깐 좀 쉬고 갑시다.” 추니는 산 능선이 굽이돌아 포근하게 감싸 안은 강변 쉼터에 멈춰 섰다.
“그러자고요. 간밤 기차 지나가는 소리에 잠을 설쳤더니 피곤하네요.” 마침 나도 좀 쉬고 싶었다. 지나는 배 위에서 관광객들이 우릴 보고 손을 흔들었다.
혹시 배에 타고 있던 한국인이 펄럭이는 태극기를 본 걸까? 우리도 같이 손을 흔들었다.
고니가 양지바른 잔디밭에서 풀을 마구 뜯어 먹고 나서 소처럼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다. ‘삐리릭’ 문자 메시지가 왔다.
6시 기상. 아참, 오늘 일찍 출근하는 날이지! “사고 5명, 사고는 출장 3명, 현장 근무 2명, 이상 민방위 비상소집 결과 보고 끝.”
“네, 아침 일찍 응소하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우리 직장과 지역은 우리가 지킨다는 …….”
“아침 식사는 해장국으로 한다고요?” “음, 그럼 갑시다. 현관에 차 대기시켜 놓았다고요?” “자, 김 국장은 내 차로 같이 갑시다.”
“아침 일찍부터 교통이 복잡하네요. 월요일이라서 그런가?” “저기, 안 과장님? 저기 저 현수막 좀 떼라고 하시죠.
저게 뭐야. 큰길 한가운데 저래도 되는 거예요? 하여간 뭐 좀 안다는 사람들이 더하다니깐. 쯧!”
“여보! 이제 갑시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어요. 낮잠에 무슨 잠꼬대를 그렇게 해요?” “으윽.” 먹구름이다. 얼른 비 피할 곳부터 찾아야겠다.
“현직이라면 얼른 우산 좀 가져오라고 할 텐데.” 나는 푸념하듯이 내뱉었다. “꿈 깨세요. 지난달 은퇴했잖아요.” 추니는 안쓰러운 듯 훈계를 했다.
“아, 그렇지! 지금은 부시장이 아니지!” 그간 따스한 온실 속에서 별 걱정 없이 지내면서 과분한 명예까지 얻었는데, 생각해 보면 감사하고 신세를 많이 졌다.
이제 다시 나 본연의 모습과 마주한다. 거센 비바람과 가시덤불을 헤치며 황야를 횡단하고 있다. 기웃기웃 속물근성은 버리자. 얼른 단잠에서 깨어나자.
트리어(Trier)에 들어왔다. ‘제2의 로마’라 불리는 트리어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다.
도시 입구에 세워진 ‘검은 문’이라는 뜻의 ‘포르타 니그라(Porta Nigra)’는 그 규모가 엄청 크고, 벽체에 붙은 이끼가 검은색을 띠고 있어 흉측했다.
중앙 광장에서 스위트 와인 향에 취했다. 진하면서도 시원하고 새콤달콤해 입 속에 넣고 잠시 맛을 음미하다가 그냥 넘겨 버리기 아까워 이내 멈췄다.
이곳에 며칠 더 묵으면서 구석구석 재밌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아쉬웠다. 괜스레 마음이 조급한 자전거 집시다.
모젤 강 자전거 길이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다음은 어느 길로 갈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안내센터에 가서 물어보고, 지도책도 사고, 먼 길 가는 이에게도 물어봐야겠다.
몇 사람에게 물어보긴 했는데 여기서 룩셈부르크를 거쳐 프랑스 쪽으로 가는 길을 잘 모른단다. 독일 국경을 넘어서도 자전거 길이 나 있어야 할 텐데 걱정이다. 만일 자전거 길을 찾지 못하면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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