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 향기에 취하다
다음 날 아침, 캠핑장을 나서며 한 번 더 로렐라이 언덕을 돌아봤다. 아쉬움일까? 그냥 나도 모르게 높은 절벽과 그 아래 거센 물결을 훑어봤다.
소중한 인연. 애틋한 사랑. 이별의 아픔을 간직한 언덕이다. 모처럼 따스한 햇살 맞으며 고어(Goar) 마을을 지나다가 공원 벤치에 앉아 슬그머니 다가오는 배들을 살폈다.
크고 화려한 배를 하도 많이 봐서 이젠 별 감흥이 없다. 석탄 싣고, 가스 싣고, 관광객 싣고, 뭔가 알 수 없는 컨테이너를 잔뜩 싣고 지나갔다. 강폭은 좁은데 두세 척이 동시에 나란히 지나가기도 했다.
라인 강은 한강의 반 정도 밖에 안 되는데 배가 지나는 곳의 수심을 어떻게 저렇게도 잘 관리하고 있을까?
강 양안에 화려한 구조물도 없다. 물 흐름을 돌려놓은 자국도 없고, 그저 물살이 급하면 급한 대로 물길 따라 배가 다니고 있었다.
오후 2시. 코블렌츠(Koblenz)에 도착했다. 코블렌츠가 왜 그토록 아름다운 도시로 소문났는지 이해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빌헬름 동상의 기개가 하늘을 찔러서일까? 강을 가로질러 성곽을 오르는 케이블카 때문일까? 라인 강과 모젤 강이 만나는 합수머리에 만들어진 배 모양의 선착장이나, 중앙 광장에 있는 공상 영화에서나 볼 법한 묘한 느낌의 안내센터 때문일까?
그게 아닐 성싶다. 무엇보다도 전체적인 도시 느낌이 시원했고, 아주 멋진 공간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수령이 몇 백 년 이상 된 가로수가 끝없이 하늘을 덮었고, 도로가 공원인지 공원이 도로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길이 훤하게 열려 있었다.
획일적인 공간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조형물은 끊어질 듯 이어졌고, 바닥은 지루하지 않게 깔끔했으며, 여기저기 작은 안내센터는 친절하기 그지없었다.
룩셈부르크에서 왔다는 키다리 젊은 부부가 다가와 사진을 찍어 줬다. 그리고는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들은 모젤 강 자전거 길을 가끔씩 탄다며 우리에게 모젤 강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알려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막 안내센터에 가서 모젤 강 자전거 길에 대해 알아볼 참이었는데 고맙고 참 이상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번 ‘자전거 유럽 횡단’ 계획을 세우면서 다소 유동적인 코스가 바로 이곳 코블렌츠였다.
라인 강을 따라 계속 직진해서 네덜란드를 경유해 프랑스로 가는 방법과 코블렌츠에서 모젤 강을 따라 프랑스로 가는 방법 두 가지를 놓고 고민했었다.
둘 다 장점과 단점이 있기 때문에 이곳 코블렌츠에 와서 코스를 정할 생각이었다.
우린 그 부부와의 만남을 우연이 아닌 인연으로 받아들였고, 부부의 조언대로 모젤 강을 택하기로 했다. 그들 부부가 우리의 여정에 중요한 이정표가 된 셈이다.
그날 밤, 모젤 강과 라인 강이 합류하는 코블렌츠 캠핑장에 텐트를 쳤다. 하룻밤에 23유로, 삼만 오천 원이었다.
다른 캠핑장보다 조금 비쌌는데 시내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인가 보다. 우린 옆자리 캠핑카 주인한테 양해를 얻어 캠핑카에 연결된 전원에 살짝 꼽사리를 껴서 스마트폰 배터리를 충전했다.
이번 여행에 배터리 4개를 가져왔는데 부족했다. 식당에서도 충전할 수 있었지만 두 시간 정도 느긋하게 식사하질 못해 완충이 되질 않았다.
사진도 찍어야 하고, 정보도 찾아야 하고, 지도도 봐야 하고, SNS도 해야 하고, 블로그도 해야 해서 항상 신경이 쓰였다.
8월 23일. 오늘부터 모젤 강을 따라 프랑스 쪽으로 오른다. 프랑스에서 발원해 룩셈부르크를 거쳐 이곳 코블렌츠로 흐르는 모젤 강은 어떤 모습일까?
모젤 강의 첫날 느낌은 한마디로 우중충했다. 잔뜩 흐린 날씨에 칙칙한 회색 지붕 색깔이 뒤섞여 기분이 우울해지는 것 같았다. 좀 밝은 색이면 좋았을 걸…….
모젤 강은 온통 포도밭이라서 밭과 강이 잘 구별되지 않았다. 절벽인지 포도밭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절벽이 포도밭이었고, 또 포도밭이 절벽이었다.
거의 직각에 가까운 비탈면에 손바닥만 한 공간이라도 있으면 불과 두세 그루의 포도나무라도 심었다.
어떤 방법으로 가파른 곳에 매달린 포도나무를 손질하는지 추측도 할 수 없을 정도다. 참말로 농사를 짓는 건지 곡예를 즐기는 건지 모르겠다.
흙이 빗물에 씻겨 흘러내리는 걸 막으려고 얇은 구들장 같은 돌을 덮어 놓았고, 대궁은 척박한 환경을 말해 주듯 껍질이 거칠고 두껍게 터져 있었다.
몇 잎 달린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달린 새끼손톱만 한 포도 알은 송알송알 너무 앙증맞았다. 포도송이 크기는 겨우 손바닥 반만 했는데, 이제 거의 다 익은 것 같았다.
영양분을 어떻게 흡수하며 자랐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하루 종일 양지 녘에서 시원한 골바람 맞으며 아침 이슬 머금고 저절로 자랐을 게다.
모젤 강변은 포도밭과 숙박 시설과 레스토랑 이외에는 다른 소득원을 찾기 어려워 보였다.
자전거 여행자들에게 많이 의존하고 있는 것 같았고, 친절함은 척박한 모젤 강가에 사는 주민들의 생존 인자인 것 같았다.
우리는 빨간 열차와 함께 모젤 강 물길을 달렸다. 모젤 강 자전거 길은 포도밭이 있어 행복했다.
코베른(Kobern) 마을을 지나 트레이스(Treis)에 도착해 붕어섬에 텐트를 쳤다. 이용료는 하룻밤에 18유로. 샤워 코인 두 개 값 1.60유로는 별도다.
고요한 캠핑장에 노을이 지고, 모젤 강 속에 포도밭이 깊이 잠겼다. 가는 곳마다 캠핑장은 늘 조용하고 적막하다. 이곳 독일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심심하게 시간을 보낸다.
뭐 좀 맛있는 게 있으면 우리 같은 자전거 집시 이웃에게 한 접시 갖다 주면 얼마나 좋을까? 이 사람들 인정머리도 참 없다. 늘 우리가 캠핑장에서 먼저 말을 거는 편이다.
“안녕하세요.” “할로.” 독일어가 서툴러 대화 분위기는 금방 썰렁해지지만 그들도 한국어를 못해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일 게다.
엄마 아빠들은 아이들을 돌보거나, 개 목줄 쥐고 산책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선탠을 하거나, 해먹에 돌돌 말려 있다.
카드놀이도 하고, 노래도 하고, 뭐 좀 재미있고 시끌벅적하게 노는 걸 못 봤다. 우리도 벤치에 앉아 저들처럼 밍밍한 하루를 보내기에는 인내심이 미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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