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내리는 밤
다음 날. 유스호스텔을 막 나오려는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린 꺼냈던 자전거를 다시 호텔 창고에 넣고 자판기 커피를 한잔하며 비 그치기를 기다렸다.
한 시간 정도 기다리다 못해 보슬비를 맞으며 출발했다. 자전거 집시라면 이 정도 비를 맞는 건 대수롭지 않다.
달리다가 멀리 능선이 뿌예지면 가로수나 다리 밑으로 잽싸게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우린 뷔르츠부르크에서 마인 강을 만나 물길 따라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서쪽으로 향하고 있다.
이제 머지않아 덩치 큰 ‘라인 강’을 만나면 마인 강이라는 이름은 소멸된다. 큰 게 이기고, 작은 게 패한다는 것은 인간의 논리일 뿐, 마인 강은 여전히 그대로 흐른다.
마인 강은 먼 길을 굽이돌아 꿋꿋하게 이곳 마인츠(Mainz)까지 흘러왔다. 급한 곳에선 거세게, 완만한 구간에선 유유하게 흘렀다.
흐르다가 장애를 만나면 비켜 흘러 상해를 입지 않았다. 갈대와 만나 스러지지 않으면 옆으로 돌아 흘렀다. 순리에 따르며 흘렀다.
왜냐하면 억지는 나중에 상흔이 남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커다란 바위가 물러서 주지 않으면 스쳐 돌아왔다.
하지만 천천히 그 바위가 뚫려 언젠가 물길이 될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늘 겸손하게 낮은 곳으로 흘렀다.
한쪽이 기울면 그곳을 채우려 했고, 많은 곳에서 적은 곳으로 옮기고, 구석구석 빈 공간이 생기면 파고들었다.
그리고 항상 수평을 이루며 동등해지려 했다. 일시적으로 수위가 높아졌을지라도 잠시 머물 뿐 곧 다른 위치로 이동하고, 주변을 헤아리다가 경사진 곳이 있으면 그곳으로 흘렀다.
마인 강과 라인 강이 만나는 합수머리는 눈에 띄게 강폭이 넓었다. 마치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양평 두물머리 같았다.
2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중세 도시 마인츠는 유럽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든 구텐베르크가 탄생한 곳이고, 유럽 최고 품질의 와인 생산지다.
마인츠는 중세의 모습이 고스란히 보존된 로텐부르크와 국제 상업 도시 프랑크푸르트를 잘 조화시켜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흙탕물이 빠른 속도로 흐르는 걸 보니 라인 강 상류에 비가 많이 내렸나 보다. 덩치 큰 여객선들이 급물살에 뒤뚱거리며 제 몸 가누기에 바쁜 모습이 안쓰럽다.
가마우지는 거친 물속에 연신 곤두박질치며 고등어만 한 물고기를 잡아 올려 순식간에 입에 넣고는 또 머리를 처박는다.
가마우지가 엄청 많다. 두세 마리씩 물살 따라 신나게 떠내려가면서 사냥을 하고 나서 다시 위쪽으로 날아오르기를 반복했다.
자전거에 부착한 여섯 개의 가방이 거센 바람에 부딪히며 핸들이 심하게 흔들렸다. 걷는 속도보다 조금 빠르다.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리거나, 길이 험해도 우린 가야 한다.
오늘 어디에 몇 시까지 가야 하고,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하고, 어디서 잠을 잘 예정인지 자전거 집시의 하루 일과는 정해진 게 없다.
갈 데까지 가 봐야 안다. 늘 그랬듯이 잘 곳과 먹을 것, 만나는 사람들 모두 예약 없이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늘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지만 ‘가이젠하임(Geisenheim) 캠핑장’에서 발길을 멈췄다. 텐트를 치다가 거센 바람에 날아간 텐트를 주워 오기를 반복했다.
핀을 땅속 깊이 박고 텐트 줄을 단단히 조여 맸다. 텐트를 치자마자 곧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참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췄다.
8월 21일. 밤새 내리던 비가 그치고 세찬 강바람도 누그러졌다. 오전에 뤼데스하임(Rudesheim)을 지나는데 많은 관광객들이 배에서 내리고 있었다.
백포도주 산지로 유명한 곳이라더니 사방이 포도밭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시내를 통과하면서 일명 ‘철새골목’으로 불리는 100m 남짓한 술집 골목을 지나는데 낮부터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우린 뤼데스하임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그래야 라인 강 하류 방향의 자전거 길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라인 강변을 따라 라이딩을 즐기는 이들이 부쩍 눈에 많이 띄었다. 강변 양쪽 가파른 절벽 위에는 낡은 고성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었다.
이 고성들을 건축한 중세 지방 영주들은 그들의 영토를 탐욕스러운 약탈자들로부터 지키려고 했을 것이다. 아마 산꼭대기를 전략적 요지로 여겼던 모양이다.
지금의 고성은 신비한 매력과 멋진 장관을 뽐내지만, 저 큰 돌덩어리들을 산꼭대기까지 운반했을 당시의 인부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찡하다.
그야말로 피눈물 나는 노동의 연속이었겠지만 그만큼 그에 상응하는 보답도 있었을 것이다.
라인 강은 로마 시대 이래 부유한 상인들이 물자를 수송했는데, 이 라인 강을 내려다보는 성을 소유하면 강력한 권력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라인 강을 오가는 배들을 통제하면서 상인들에게 ‘통과세’를 징수해 수입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유적지로 보존되면서 호텔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참에 추니랑 멋진 고성에 올라 숙박 한번 해 볼까? 하지만 공짜로 자라고 해도 자전거를 끌고 거기까지 올라 갈 수가 없다.
라인 강 도로변 차량 카페에서 다른 사람들과 줄지어 점심 식사를 주문했다. 소시지 두 개와 감자튀김, 콜라 한 병, 모두 5유로다.
7,500원으로 간단하게 한 끼 때웠다. 그나저나 귀국해서도 추니가 이런 식으로 식사를 간단히 해결하자고 하면 어쩌지?
점심 식사를 마치고 잠시 쉬는데 저만치 깎아지른 절벽 위에 펄럭이는 깃발이 보였다. “아니 저게 뭐지? 와우, 높다!”
그 절벽 아래 S자 굴곡에 부딪혀 휘감기는 물결은 엄청난 소용돌이여서 큰 배들이 교차할 땐 서로 뱃머리를 돌리느라 힘겨워하는 모습이었다.
안내판을 보니 ‘로렐라이(Loreley)’ 언덕이었는데, 이곳을 지난다는 걸 미리 알지 못했다. 우린 로렐라이 캠핑장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로렐라이 언덕’ 하면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이곳을 지나던 뱃사공들이 요정의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홀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물결에 휩쓸려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그 요정이 바로 로렐라이인데, 로렐라이는 사랑하는 남자의 변심으로 인해 요정이 되었다고 한다.
안타까운 이 이야기에 비하면 우리는 참 행복한 연인이다. 행복한 자전거 집시 연인…….
로렐라이 캠핑장에서 삼각대를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줌(Zoom)을 당겨 보기도 하고, 두 손가락 펴 포즈를 취해 보기도 했다.
로렐라이 언덕 아래 라인 강을 배경으로 집시 연인의 예쁜 모습을 사진에 담으려 했는데 아무리 찍어 봐도 별로다.
우리는 캠핑장 옆 레스토랑에서 밤늦도록 와인을 마셨다. 캠핑장 잔디밭. 캄캄한 하늘에 별들이 꽉 들어찼다.
유난히 반짝이는 별들과 은은한 별들. 갑자기 한 아름 별들이 우리 가슴으로 쏟아져 내렸다.
양팔 벌려 뒤로 넘어질 듯 끌어안았다. 캠핑장은 온통 별들로 덮였고, 라인 강 물길도 멈췄다. 우린 눈을 감았다. 감사해서, 정말 감사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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