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오는 5월 27일 일본 히로시마(廣島)를 방문해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함께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 헌화하고 제2차 세계 대전 때 숨진 모든 희생자를 위해 묵념할 계획이다. 오바마가 위령비에 헌화하는 자리 피폭 피해자를 초청하는 것도 검토 중이다. 우리는 이런 오바마의 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지금까지 우리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미국이 히로시마(1995년 8월 6일)와 나가사키(9일)에 원자 폭탄을 투하한 일에 이중적인 마음을 가져왔다. 절대 다수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전범국인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는 전쟁을 일찍 끝내기 위한 마땅한 조치였다고 믿어 왔다. 일부 소수가 지속적으로 인류 절멸의 가능성을 열어젖힌 원폭 사용의 정당성을 따져 물었을 뿐이다.
지금 원폭 투하가 더 굳건한 미-일 동맹을 완성하는 수단으로 쓰이는 역설을 염두에 둔다면, 다시 한 번 이 끔찍한 전쟁 중의 행위가 갖는 의미를 세심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황희경 영산대학교 교수가 중국의 지식인 간양(甘陽)이 중국 잡지 <독서>에 2000년 8월에 발표한 글을 번역해서 소개한다.
간양은 일반적으로 중국 학계에서 신좌파의 한 사람으로 거론되는 학자로 지금은 광둥 성 광저우 중산대학교 인문고등연구원 원장으로 중국 사상계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지식인이다. 황 교수는 "간양이 원폭 50주년이 되는 1995년에 이 글을 쓴 지 21년, 발표한 지는 16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현재적 의미가 있어서 번역, 소개한다"고 밝혔다.
1995년 8월 6일 미국이 인류 최초의 원자 폭탄을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한 지 50주년(3일 후에 미국의 두 번째 원자 폭탄을 나가사키에 투하한다)이 되는 날이다. 미국 연방 우정총국은 원래 버섯 모양의 원폭 경관이 인쇄된 우표를 발행해서 이른바 "핵 승리" 50주년을 기념하기로 결정했으나 사회 각계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철회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저명한 미국의 정치철학자이자 <정의론>의 저자 존 롤스가 히로시마 원폭 50주년을 맞이하여 쓴 글(Fifty Years after Hiroshima)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 날 정작 필요한 것은 엄숙한 반성이며 또한 당시 미국이 원자 폭탄을 사용하기로 한 결정은 도대체 변호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진지한 대답이다. 롤스 본인의 대답은 단호하다. 히로시마에 대한 원폭은 거대한 죄악이다.
현재 관방의 통계에 근거하면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 폭탄은 18만6940명의 사망을 초래했는데 대부분 시민이었다. 동시에 미국의 권위 있는 잡지 <포린 어페어스>(1995년 1권)에 실린 "원자 폭탄 공습에 대한 재검토"라는 글이 밝힌 숫자에 따르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두 곳에서 원자 폭탄 폭발로 사망한 총 인원수는 25만 명에 달하고, 여기에 더해 적어도 10만 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참고로 조선인도 4만 명이 죽었다.)
이 글의 저자인 스탠포드 대학교 국제 관계와 외교 정책 연구 센터 주임 바톤 번스타인(Barton Bernstein)은 그 글에서 이런 놀랄 만한 사망 인원수에 직면해서 어떠한 사람이라도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왜 이렇게 많은 시민이 죽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당시 미국은 원자 폭탄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원자 폭탄을 사용하기로 한 결정은 도대체 어떻게 내려진 것이었는가?' '이러한 결정의 정당성(legitimacy)은 또한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번스타인이 보기에 현재 이미 공포된 각종의 문서 자료나 다양한 연구에 의하면 당시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필요는 완전히 없었다. 다시 말하면 수십만 명의 비참한 운명은 본래 완전히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더욱이 이런 점을 지적한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원자 폭탄을 사용하느냐 하는 중대한 결정이 당시 사려 깊거나 여러 가지를 곰곰이 따져 본 후에 내려진 결정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원자 폭탄을 사용하지 않을 가능성은 애초 토론조차 되지 않았고, 전체 결정 과정은 국회의 토론을 거친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그의 결론은 롤스와 상당히 일치한다. 즉 히로시마 원폭은 정당성이 결핍된 것이었다고.
히로시마 원폭에 대한 반성과 검토는 당연히 오늘날 시작된 것이 아니다. 허나 1995년이 50주년이라는 점은 반성과 검토로 하여금 아주 자연스럽게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게 만든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전쟁 자체는 절대적으로 정의로운 것이지만 미국이 마지막 순간에—당시 유럽의 전장은 이미 승리로 끝났고, 일본의 패배는 이미 거의 정해진 상황에서—시민이 거주하는 중심을 향해 원자 폭탄을 투하해서 수많은 생명이 왜 이처럼 비참하게 죽어야만 했는지 오늘날에도 납득할 수 없다.
필경 히로시마 원폭은 인류가 원자 폭탄이라는 무기를 사용해서 인류 자신을 살육한 위험한 선례를 열어젖힌 것이다. 따라서 50년 동안 미국 자신을 포함한 전 인류는 핵전쟁의 그늘 속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오늘날 냉전은 이미 끝났지만 인류에 대한 핵무기의 치명적 위협은 없어지기는커녕 도리어 핵무기의 부단한 확산을 통해 더욱 제어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히로시마 원폭을 어떻게 인식하고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인류가 핵무기를 다시 사용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는지의 여부와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만약 히로시마 원폭이 변호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러한 변호의 이유와 근거는 도대체 무엇인가가 먼저 반드시 추궁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후 어떠한 사람도 핵무기를 사용할 핑계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롤스가 히로시마 원폭 50주년을 기념해 쓴 글은 바로 이러한 각도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가 보기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두 곳에 대한 원폭뿐만이 아니라, 그 전에 미군이 1945년 봄부터 도쿄 등의 도시에 무차별적으로 가한 폭격은 모두 거대한 죄악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의 민주 국가가 전쟁 중에 준수해야할 정의 원칙과 도덕적 약속을 뛰어 넘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전쟁 문제에서 두 가지 허무주의 논점을 특별히 비판한다. 하나는 전쟁은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기에 어떠한 일도 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다른 하나는 전쟁 중에 모든 사람은 모두 죄가 있으므로 다른 사람을 질책할 권리를 가진 사람은 없다는 관점이다. 이 두 종류의 허무주의 논점은 문명 사회의 기초 전부를 와해시키기에 충분하다.
왜냐하면 롤스가 보기에 이른바 "정의와 품위 있는 문명 사회(just and decent societies)"의 근거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반드시 도덕과 정치의 균형을, 즉 어떤 것은 할 수 있고, 어떤 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따져보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교 능력을 말살하는 것은 하고자 하는 일을 멋대로 하고 책임은 지지 않는 것을 조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롤스가 제기하고자 하는 중심 문제는 민주 국가가 전쟁 중에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정의 원칙과 도덕 약속은 무엇인가이다. 그는 여기서 민주 국가와 비민주 국가가 전쟁 중의 구별을 특별히 강조한다. 비민주 국가는 그 정의에 따르면 바로 모든 결정을 소수의 사람에 의해 조종되는 나라다. 따라서 비민주 국가에서 전쟁 중에 행한 무책임한 행동과 범죄 행위를 민중이 책임질 수 없다.
그러나 민주 국가는, 만약 진정한 민주 국가라면, 이러한 사실은 전체의 국민이 자국이 한 행위에 대해 도덕적과 정치적 책임을 지며, 무책임한 행위와 범죄 행위가 발생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민주 국가는 전쟁 중의 정의 원칙과 도덕적 약속을 특히 명확히 해야 한다.
롤스는 우선 민주 국가가 전쟁을 진행하는 목표가 적대국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지속적 평화를 달성하는데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런데 이른바 "평화"는 현재의 적대국과 나중에 평화에 도달하는 것을 우선 가리킨다. 따라서 "현재의 적은 반드시 이후의 정의와 평화를 함께 누릴 동반자로 여겨져야 한다."
민주 국가가 전쟁을 수행하는 목적이 최종적으로 교전국의 인민과 지속적 평화를 달성하는 것을 찾는 것이기 때문에 민주 국가는 "전면 전쟁(total war)"을 진행할 권리가 없다. 즉 적대 국가의 전체 주민을 전쟁의 대상으로 대할 수 없다. 이는 우선 민주 국가가 전쟁 중에도 적대국 인민의 기본적 인권을 반드시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민주 국가가 우선 솔선수범하여 상대방 인민의 기본적 인권을 존중해야만 적대국의 인민도 자기 인민의 기본적 인권을 존중하는 것을 배울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장 기본적인 인권에 대한 보편적 존중이 바로 금후의 전쟁을 구속하고 지속적 평화의 가장 중요한 조건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롤스는 특별히 강조한다. 전쟁을 어떤 방식으로 진행하느냐, 다시 말하면 전쟁을 어떤 방식으로 종결하느냐가 교전국 쌍방의 인민들에게 장구한 심리적 영향을 남기기 때문에 이후 발생할 수 있는 전쟁에 모델을 수립한다. 따라서 민주 국가, 그 중에서도 전쟁 시기의 지도자에게 가장 큰 시련은 그들이 전쟁의 방식과 전쟁을 종결하는 방식을 결정할 때 우선 민주 국가가 전쟁을 수행하는 최종적 정의 원칙과 도덕적 약속에서 출발할 수 있느냐에 있다.
금후의 지속적 평화를 착안할 수 있느냐, 적대하는 쌍방의 인민들에 전쟁 중에서도 기본적 인권을 존중하는 것을 교육하는 것을 착안할 수 있느냐. 롤스의 견해에 따르면 아주 극단적으로 위험한 상황 하에서만, 즉 본국의 인민의 전체 생존이 근본적 위협을 받는 상황 하에서만 민주 국가의 전시 지도자들이 극단적 수단, 예를 들어 핵무기를 쓸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여기서 이른바 극단적 위기 상황이란 만약 극단적 수단을 채택하지 않으면 본국의 인민이 장차 멸망할 그런 상황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엄격히 정의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후 평화의 문제는 이미 배제되고, 마주친 것은 바로 본국 인민이 생존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극단적 수단을 채택하는 것은 변호할 수 있다.
그러나 롤스는 곧바로 지적한다. 히로시마에 대한 원폭을 변호할 수 없는 점은 바로 당시 어떠한 이유도 없었고, 사실상 미국이 이런 극단적 위기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한 어떤 사람도 없었다. 도리어 당시 모든 사람들은 독일이 이미 패한 이후에 일본의 패전은 이미 단지 시간의 문제이며 또한 주로 어떤 방식으로 투항하느냐(무조건적이냐 아니면 천황제를 보전하는 것과 같은 일정한 조건이냐)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핵 폭격뿐만 아니라 그 전의 도쿄 등의 도시에 대한 미국의 밀집 폭격은 롤스가 보기에 매우 커다란 잘못이며 죄악이었다. 왜냐하면 모든 이런 행위는 미국이 민주 국가가 전쟁 중의 정의 원칙과 도덕 약속을 위배했음을 표명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선 도쿄 폭격으로부터 히로시마 폭격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미 시민을 직접적 공격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며, 그 다음으로 원자 폭탄을 투하하는 방식을 선택해서 전쟁을 종결하는 것은 향후 지속적 평화에 엄중한 그늘을 드리우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써 향후 인류의 어떠한 전쟁도 최후에 핵전쟁으로 전화될 위험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롤스는 이로 말미암아 민주 국가의 전시 지도자로서 해리 트루먼은 함량 미달이라고 여겼다.
롤스의 논술은 얼핏 보기에 평범해서 참신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원자 폭탄이 왜 사용되었는가 하는 문제의 핵심을 틀어쥐고 있다. 이 핵심은 바로 이른바 "전면 전쟁"이라고 하는 현상이 왜 출현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다.
핵전쟁과 이전의 인류가 벌인 전쟁의 근본적 차이는 일단 발동하면 사병과 시민, 군사 목표와 비군사 목표를 구분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하면 핵전쟁은 불가피하게 적대국의 전체 주민의 생존이 공격 목표가 되어 버린다. 즉 이른바 "전면 전쟁"을 된다. 그러나 원자 폭탄은 "전면 전쟁"을 초래한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였다.
왜냐하면 원자 폭탄이 사려 깊은 고려 없이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인은 그 이전에 시민과 중심 도시에 폭격을 가하는 것이 이미 늘 있어 왔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히로시마에 대한 핵 폭격은 사실상 단지 이전의 일련의 "전면 전쟁"의 자연적 확대일 뿐이었다.
롤스가 도쿄 대폭격의 비정의성을 특별히 지적한 이유는 바로 도쿄와 기타 시민이 거주하는 중심 도시에 대한 비핵 폭격이 사실상 이미 히로시마 핵폭격을 위한 길을 전면적으로 닦아 놓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일찍이 히로시마 이전에 전쟁 중의 정의 원칙과 도덕적 약속은 이미 거들떠보지 않았다. 오직 이와 같았기 때문에 히로시마의 원폭이 있게 된 것이다.
여기서 당연히 이른바 "전면 전쟁"은 의심할 나위 없이 독일과 일본 파시스트들이 먼저 발동한 것임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일본군의 남경(난징) 대학살(1937년 12월 13일 남경 함락 이후 40 여일에 걸친)은 바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가장 이르면서 동시에 가장 분노스러운 "전면 전쟁"의 행동이었다.
그러나 롤스 등이 강조하려는 것은 독재 국가가 할 수 있는 일을 민주 국가가 할 수 없고, 민주 국가는 "전면 전쟁"을 진행할 수 없다, 즉 적대국 전체 주민을 공격 대상으로 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본군이 남경에서 천인공노할 만행을 벌였다고 해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자 폭탄 폭격으로 죽은 사람은 모두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마치 영국의 저명한 군사 이론가 하트(Sir Basil Henry Liddell Hart, 1895~1970년)가 당시 영국 공군이 독일의 시민이 거주하는 도시를 폭격했을 때 일찍이 지적한 것처럼 "만약 문명의 수호자들이 단지 자신의 승리를 가장 야만적이고 가장 원시적인 방식으로 건축해서 전쟁에 승리할 뿐이라면 그건 문명 자체에 대한 거대한 풍자가 아니겠는가?"
롤스와 다른 많은 학자들은 모두 1939년 미국이 아직 정식으로 참전하기 이전에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일찍이 유럽 각국이 시민의 거주지를 폭격하는 야만적인 행위를 피할 것을 호소하였음을 특별히 지적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말기가 되면 미국을 포함한 연합군 측에서 이미 전쟁은 시민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된다는 가장 기본적 도덕 약속을 완전히 뛰어 넘어,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인구가 고도로 밀집된 도시를 대규모 공습하는 일이 날로 증가하여 "전면 전쟁"이라는 현상이 날로 도를 더해 갔다. 그리하여 최후에는 전쟁의 일상적 상태라고 여겨지게 되었다. 그 중에서 특별히 연합군 측의 세 번의 대규모 도시 폭격은 히로시마 핵폭격으로 향하는 길을 튼 것으로 현재 보편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우선 1943년 7월 영국 왕립 공군의 함부르크 대폭격이다. 함부르크는 당시 독일의 두 번째 도시였는데 인구는 대략 150만 명에 달했다. 함부르크는 엘베 강의 경계로 강의 남쪽은 독일군이 주둔하는 곳이었고, 북쪽은 주로 일반 시민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나중에 "폭격기(bomber) 해리스"라고 불린 영국 공군 사령관 아서 해리스(Arthur Harris)는 강북, 즉 시민들이 집중한 거주지를 선택해 유명한 폭격 대실험을 지행했다.
이른바 새로운 실험은 폭탄과 연소탄을 서로 혼합한 대규모 투척이었고, 목적은 전 도시를 불바다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 해 7월 25일 한밤중에 영국 왕립 공군은 728대의 비행기를 출동시켜 이런 방식으로 함부르크 북부를 폭격했고, 전 도시는 순식간에 연옥으로 변해버렸다. 이틀 후 영국은 다시 787기의 비행기를 동원하여 같은 방식으로 같은 지역을 폭격했다. 목적은 순전히 불바다가 지속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불바다 폭격 하에서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은 아무도 살아서 도망칠 수 없었다. 이는 실로 전 도시를 도륙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동시에 불바다로 말미암아 일산화탄소 유독 가스가 전 도시에 가득차서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이는 원자 폭탄 폭격으로 나아가는 큰 걸음을 내딛는 것이었고 차이란 단지 핵 방사능의 살상력을 아직 구비하지 못했을 뿐이다.
두 번째는 1945년 2월 영국과 미국 공군이 연합해서 드레스덴을 폭격한 일이다. 함부르크 폭격 이후 영국 공군은 1943년 말과 1944년 초에 베를린을 집중적으로 폭격했다. 그러나 베를린이 방어 설비가 삼엄했기 때문에 영국 공군은 중대한 손실을 입었다(1047기의 폭격기를 상실했다).
그리하여 영국은 베를린 폭격을 포기하고 방비하지 않은 비군사 도시 드레스덴-유럽 바로크와 로코코 예술과 건축으로 유명한 도시-로 방향을 돌렸다. 그 해 2월 13일 먼저 영국 공군 796기의 비행기가 연속해서 드레스덴에 두 번에 걸쳐 "불바다" 폭격을 가했고, 그 다음날 미국 공군 311기에 달하는 B-17 폭격기가 다시 폭격했다. 드레스덴은 일순간에 폐허로 변했다. 사망 인원수는 최저 3만 5천명, 최고 10만 이상에 달할 것으로 추측된다.
히로시마 이전에 원자 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추측한 원자 폭탄의 살상력은 단지 2만 명이었다! 드레스덴 대공급의 참상은 사실상 윈스턴 처칠 본인조차 몸서리치게 만들어서 "우리들은 야수가 되었는가? 우리들은 너무 지나치게 폭격한 것은 아닌가?(Are we beasts? Are we taking this too far?)"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게 했다.
그러나 드레스덴 폭격은 실제로 전면 전쟁이 이미 합리화, 합법화 심지어 전쟁의 정상 상태로 여겨졌고, 따라서 시민과 군인, 도시와 전장의 구분이 이미 존재하지 않음을 표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드레스덴 폭격 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1945년 3월 9일 한밤에서 다음날 새벽까지 미국이 규모가 더 크고, 참상이 더욱 공포스러운 도쿄 대공습을 감행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공습의 목표는 인구가 가장 밀집해 있는 도쿄 시 중심으로 명확히 했다. 그 결과 한 번의 폭격에 8만3783명(이는 일본 측의 통계다)이 터지고 불타고 숨 막혀 죽였다. 이어 일본의 모든 대도시 중도시는 모두 미국의 불바다 폭격의 목표가 되었으며, 절대 다수는 모두 평지가 되었다. 1945년 여름까지 인구가 25만 이상의 도시 중에서 단지 두 도시-교토와 히로시마-만이 불바다 폭격을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미심장한 것은 교토와 히로시마가 줄곧 폭격을 당하지 않은 이유는 두 도시가 미군에 의해 원자 폭탄을 쏠 곳으로 이미 내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시민과 중심 도시를 폭격하는 것이 이미 전면적으로 합리화, 심지어 전쟁의 주요 방식이 된 이후에 원자 폭탄은 톤수가 더 크고 위력이 더 강하며, 좀 더 공포스러운 커다란 폭탄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었다!
폭격하는 자에게 원자 폭탄을 사용해서 히로시마를 폭격하는 것과 일반적 폭탄을 사용해서 도쿄를 폭격하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었다. 함부르크로부터 드레스덴, 도쿄, 다시 히로시마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일맥상통하게 새로운 전쟁관이 관철되었다. 즉 전쟁은 곧 전면 전쟁이다!
이로부터 우리들은 왜 오늘날 사람들이 모골송연하게 생각하는 히로시마 원자 폭탄 폭격이 당시의 정책 결정자들에게는 실제 근본적으로 그다지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1993년에 은퇴한 경륜이 풍부한 미국 상원의원 앨런 크랜스톤(Alan Cranston, 1914~2000년)은 히로시마 50주년에 쓴 글에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미국의 대중들은 원자 폭탄 폭격이라는 그런 중대한 일이 도대체 어떻게 결정된 것인지를 묻지만 이 일이 사실 애초에 결정된 적이 없다(there was never any decision)는 답안을 모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도쿄 대공습 등은 사실 일찍이 그것을 위해 결정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원자 폭탄이 만들어지면 당연히 곧 사용한다는 것이다."
크래스톤 상원의원이 지적하는 것처럼 트루먼 내각은 원자 폭탄이 만들어지면 마땅히 최대한 빨리 사용해야 한다고 이미 아주 분명하게 결정했다. 트루먼 대통령과 그 참모들이 토론한 문제는 바로 어느 곳에, 언제, 구체적으로 어떻게 원자 폭탄을 투하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학자와 정치가들이 가장 골치 아프게 생각하는 문제-공포스럽기 그지없는 신무기가 가져올 심각한 도덕과 윤리적 함의에 관해서는 당시엔 전혀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다.
트루먼 본인은 나중에 그가 최후의 결정을 내기기 전에 고급 참모를 소집, 전문가 회의를 열어 이미 성공적으로 제조한 원자 폭탄을 도대체 어떻게 할지를 연구했다고 공표했다. 그러나 크래스톤 상원의원은 역사학자들이 오늘날 모든 문서와 관련된 자료를 살펴보았지만 트루먼이 이런 회의를 소집해서 열었음을 표명하는 어떠한 기록도 발견하지 못했음을 지적했다.
번스타인은 "원자 폭탄 폭격 재검토"라는 글에서 똑같이 지적하기를, 현재 이미 공포된 문서 자료를 통해 모든 원자 폭탄을 거론한 기록 중에 사람들이 사용한 말은 모두 "원자 폭탄을 사용한 후…", 혹은 "원자 폭탄을 사용할 때…"였지, "만약 원자 폭탄이 사용된다면"이라는 말을 한 사람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원자 폭탄이 일단 성공적으로 제조되면 바로 사용할 것이라는 점은 처음부터 자명한 사실이었고, 유일한 문제는 단지 시간, 지점 및 기타 기술 문제였지, 원자 폭탄을 사용하지 않는 문제는 애초에 진지하게 고려된 적이 없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A. H 콤프턴(A. H. Compton)은 일찍이 1945년 5월 28일에 최고 정책 결정조에게 원자 폭탄의 사용이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대학살(mass slaughter)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주의하라고 요청했고, 5월 29일 마샬 장군은 원자 폭탄은 시민이 아니라 군대에만 응당 사용되어야 하며, 시민에 관계된다면 먼저 일본 측에 충분히 경고해서 시민을 철수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번스타인이 지적하는 것처럼 이런 목소리 자체도 상당히 미약했을 뿐만이 아니라 전혀 중요하지 여겨지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시 주요 결정자들은 사실상 기만적인 태도로 그들이 본래 반드시 정시해야 할 중대한 윤리적 문제를 회피했다. 즉, 한편으로 그들은 원자 폭탄이 시민에 대한 대학살을 초래하리라는 점을 매우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들은 자신들이 결코 원자 폭탄을 사용해서 시민을 대하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 믿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트루먼 자신이 이 방면의 바로 가장 좋은 예이다. 1945년 7월 16일 원자 폭탄 첫 폭발 실험을 성공한 후 트루먼은 원자 폭탄의 공포를 이미 완전히 잘 알았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서 원자 폭탄의 성능과 관련한 세세한 점을 기록하고, 원자 폭탄이 인류 유사 이래 가장 공포스러운 무기여서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음을 경탄했다.
그러나 단 며칠 후에 그는 원자 폭탄을 히로시마에 사용하는 군 계획을 비준한 이후에 일기에서 "나는 원자 폭탄 사용을 군사 목표를 파괴하는데 사용하지 부녀와 어린이를 상대로 사용해서는 안 됨을 비준했다"고 기록했다. 번스타인 교수는 트루먼이 여기서 완전히 자아기만에 빠졌다고 평론했다.
왜냐하면 트루먼은 히로시마 폭격이 대량의 부녀자와 아동의 죽음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점을 그는 의식상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반드시 자신의 내린 명령이 부녀자와 아동에 대한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군사 목표를 대상으로 한 것으로 스스로 믿어야 했다. 이렇게 해서 부녀자와 아동이 원자 폭탄의 폭발로 대량사하는 점은 그에게 접수될 수 있는 것으로 변하게 된 것 같다.
롤스는 그 글의 마지막에서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 폭탄 폭격의 비극이 발생하게 된 이유는 결국 트루먼 등이 인권, 더욱이 적대국 시민의 인권에 대한 충분한 존중이 결핍된 점에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는 트루먼이 히로시마 나가사키 폭격 후에 자신을 변호할 때 일본인은 짐승이며 당신이 짐승과 상대할 때 그것을 짐승으로 여겨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한 점을 특별히 지적했다.
여기서 극히 민감한 하나의 문제가 도출되어 나온다. 즉 원자 폭탄 폭격과 인종 차별의 문제이다. 만약 원자 폭탄이 독일이 패전하기 이전에 성공적으로 완성되었다면 연합군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바로 독일을 폭격하는데 사용했을까를 많은 사람들이 줄곧 의심하였다. 이 문제는 단지 추측일 수 있기에 사실의 답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근래 많은 연구자들은 모두 원자 폭탄이 유럽의 전장에 사용되었더라면 연합군 측의 결정은 반드시 훨씬 신중했을 것이라고 여긴다. <뉴요커>는 이번에 히로시마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발행한 특집호에 머레이 세일(Murray Sayle)의 장문의 글을 실었다. 그는 글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치를 증오하지만 영미 사람들은 여전히 독일인 중에 품위 있고 존중받을 만한 사람이 많이 있다는 점을 결코 의심하지 않음을 지적했다. 일본인은 다르다. 당시 영미인에게 좋은 일본인이라는 말은 근본적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세일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저명한 종군 기자 어니 파일(Ernie Pyle)이 당시에 한 말을 인용해서 이 점을 설명했다.
유럽에서 우리들은 적군이 아무리 모골이 송연하게 공포스러워도 그들도 여전히 사람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아시아 전장에서 나는 우리들에게 일본인은 사람이 아니라 극도로 증오스러운 어떤 물건, 다시 말하면 많은 사람이 일본인을 사마귀나 쥐로 보는 느낌을 즉각 발견했다.
오늘날 이 문제에 대해 가장 상세한 연구는 아마도 버클리 대학교 교수 로널드 타카키의 책, < 로시마, 왜 미국은 원자 폭탄을 떨어뜨렸는가?(iroshima : Why America Dropped the Bomb?) (1995년)를 먼저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일본인과 더 일반적으로 아시아인에 대한 미국인의 증오는 결코 진주만 사건 이후에 생긴 것이 아니라 유래가 깊은 것임을 지적했다. 예를 들어 일찍이 1911년 6월 12일의 한 통의 편지에서 젊은 트루먼은 훗날의 자신의 아내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어떤 사람이 흑인이나 중국인(China man)이 아니라면 그는 다른 사람처럼 충분히 선량하고, 성실하며 품위가 있다고 여긴다. 윌리엄 아저씨는 일찍이 하느님은 먼지로 백인을 만들고, 진흙으로 흑인을 만든 연후에 남은 것은 버렸는데, 이 남은 것이 나중에 중국인으로 변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확실히 중국인과 일본인을 미워했고 나도 그렇다. 나는 이것을 인종 편견이라고 하리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나는 확실히 흑인은 아프리카에 있어야 하고, 황인종은 아시아에 있어야 하며, 백인은 유럽과 미국에 있어야 한다고 강렬하게 생각한다.
청년 트루먼이 여기서 드러내는 이른바 "중국인" 즉 아시아인에 대한 극단적 멸시는 히로시마 폭격 후에 그의 이른바 "일본인은 짐승"이라는 논조와 의심할 나위 없이 일맥 상관한다. 이러한 인종적 편견은 그와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음은 의심할 나위 없이 사실이다. <타임>은 히로시마 50주년 특별호에서 아시아 전장에서 미군이 투항한 일본 병사를 임의로 죽이고 병원을 마구 불태우는 등등의 폭행을 상세하게 보도하였다.
그러나 이 글의 마지막에서 내가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는 것은 미국이 원자 폭탄을 사용한 것이 아무리 정당성을 결여하였고, 당시의 인종적 편견이 설령 대단했다고 하더라도 모든 이러한 것들은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벌인 하늘에 가닿은 죄행을 결코 감소시킬 수 없다는 점이다.
도리어 우리들은 이안 버라마(Ian Burama)가 자신의 저작에서 지적한 하나의 사실을 더욱 지적할 필요가 있다. 히로시마 폭격으로 죽은 사람 중에서 상당히 많은 수의 조선인이 있다. 이 참사자는 지금까지 일본 관방에 의해 사망자의 명단에 포함되지 않고 있다. 미국의 학계와 미디어로부터 일반 대중에 이르기까지 히로시마 폭격에 대한 보편적 반성 태도와 비교할 때 일본은 지금까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천인공노할 죄행에 대해 조금의 반성도 없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고도 분노스럽다!
이 점에 대해 말한다면 우리들은 반드시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히로시마 핵 폭격에 대해 검토할 점이 있다는 것이 결코 일본을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1995년 8월 13일 시카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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