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 창업자 신격호(95) 총괄회장이 끝내 정신감정을 거부하고 19일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에서 무단 퇴원하면서 지난해 7월 이후 이어진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에서 신동빈 회장이 승리를 굳히는 분위기다.
장남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은 "아버지(신격호 총괄회장)가 후계자로 나를 지목했다"고 줄곧 강조해왔지만 90대 중반의 고령인 신 총괄회장의 정신건강이 과연 정상인지부터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없다면 신 전 부회장의 '후계자 낙점론'도 공인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 신동주 "법원 지시 따랐지만 아버지가 거부"
신 총괄회장은 지난 16일 정신 감정을 위해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으나 입원 만 사흘만인 19일 돌연 퇴원해 본인의 집무실 소공동 롯데호텔로 돌아갔다.
신동주 전 부회장이 운영하는 SDJ코퍼레이션 관계자는 조기 퇴원 배경에 대해 "신 총괄회장의 강력한 거부의사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의료진과의 협의를 거쳐 퇴원을 결정하게 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전적으로 신 총괄회장 본인 의지에 따른 것이라기보다, 장남 신동주 전 부회장과 측근 인사들이 전략적으로 '입원과 조기 퇴원' 방식을 택했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신동주 전 부회장은 지금까지 계속 "아버지 신 총괄회장의 정신건강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며 신 총괄회장에 대한 후견인(법정대리인) 지정을 반대해왔다.
정말 정신건강에 문제가 없다면 약 2주정도 입원을 통해 깔끔하게 '정상' 판정을 받는 게 신 전 부회장 입장에서도 여러모로 유리하지만 사실상 현재 신 총괄회장의 상태가 썩 좋은 편이 아닌만큼 일단 공식적으로 감정에 응하되(16일 입원) 신 총괄회장의 고집을 내세워 조기 퇴원시킴으로써 검증 자체를 무산시켰다는 의혹을 받는 것이다.
신 전 부회장으로서는 다음 달로 예상되는 일본 롯데홀딩스의 주주총회 일정도 고려해야 한다.
지난 3월 6일 주총 당시와 마찬가지로 신 전 부회장은 이번 주총 안건으로 다시 동생 신동빈 롯데 회장과 쓰쿠다 다카유키(佃孝之) 사장 등 7명을 롯데홀딩스 이사직에서 해임하는 안건을 제기할 예정인데 주총 표 대결 전에 "신 총괄회장의 정신 건강에 문제가 있다", "신 총괄회장의 후견인이 지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승산이 더 희박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신 전 부회장은 신 총괄회장의 입원 정신감정을 포함한 성년후견인 지정 심리 자체를 최대한 늦출 필요가 있고, 당초 '4월 말'이었던 법원 지정 기한을 넘겨 지난 16일에야 신 총괄회장의 입원이 이뤄진 것도 같은 맥락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 한정후견만으로도 신동빈 승리
하지만 추측처럼 신 전 부회장 측의 판단에 따라 '입원 연기-조기 퇴원'이 실현됐고, 의도한 대로 시간 끌기나 항소 등에 대비한 명분 쌓기 등에는 성공했을지라도 더 중요한 사실은 신격호 총괄회장이 결국 정신감정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신동주 전 부회장 쪽에 결정적으로 불리하다.
성년후견인 신청자(여동생 신정숙씨)측 법률대리인 이현곤 변호사는 "치매의 경우 짧아도 2주일 정도는 입원 감정이 필요한 사안인데, 사흘만에 퇴원했다면 정상적 조사가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얘기"라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결과적으로 정신 건강에 이상이 없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없어진 만큼 성년후견인 지정 가능성이 더 커졌다고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당초 법원은 정신감정 절차가 끝나면 병원(감정인) 의견서를 받아 검토하고, 다시 관계자들을 모아 심문을 거쳐 최종적으로 신 총괄회장에 대한 후견인(법정대리인) 지정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사실상 신 총괄회장의 정신 감정이 무산됨에 따라 법원은 주변인의 진술과 그동안의 의료기록 등을 토대로 신 총괄회장에 대한 후견인 지정 필요성 여부를 판단하게 된다. 아울러 신 총괄회장 당사자가 떳떳하게 정신감정에 응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중요한 고려 사항인만큼 현재로서는 법원이 신 총괄회장에게 후견인이 필요하다고 판결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법조계 안팎의 예상이다.
남아있는 변수라면 후견의 종류 정도인데, 이는 신동빈 회장이 승리를 굳히는 데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후견 대상(신격호 총괄회장)의 정신건강 문제 정도에 따라 후견의 종류는 성년후견, 한정후견, 특정후견, 임의후견 등으로 나뉜다. 성년후견은 정신적 제약으로 사무처리 능력이 지속적으로 결여됐다고 판단될 경우 한정후견은 같은 이유로 사무처리 능력이 부족한 경우 지정된다.
성년후견이 필요하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행위능력 상실자' 판정을 뜻하는 만큼 후견인이 대리인으로서 거의 모든 권리를 대신 행사하게 된다. 이에 비해 한정후견의 경우 법원이 정한 범위 안에서 후견인이 대리·동의·취소권 등을 갖는다.
하지만 만약 신 총괄회장의 후견 수준이 성년후견이 아닌 한정후견으로 결정되더라도, 정신건강상 문제가 분명히 확인됐다는 사실은 마찬가지다. 또 재산 분할 등 중요한 결정의 대부분은 후견인이 맡게 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한정후견인 지정만으로도 지금까지 아버지 신 총괄회장의 위임장 등을 근거로 '롯데그룹 후계자'를 자임해온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의 승계 당위성은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다. 아울러 롯데그룹과 동생 신동빈 회장을 상대로 제기한 8건의 소송에서도 신 전 부회장의 승소 확률은 크게 낮아질 전망이다.
이현곤 변호사는 "성년후견인이 아닌 한정후견인 지정이 결정된다 해도 정도의 차이일 뿐 정신건강 문제가 사실로 확인됐다는 의미이므로 '신 총괄회장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았다'는 신동주 전 부회장측의 주장은 효력을 잃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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