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북한은 원자 폭탄을 넘어서 수소 폭탄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제2차 세계 대전부터 동서 냉전이 불붙는 1960년대 초에 이르는 시기를 생생히 복원한 리처드 로즈의 <수소 폭탄 만들기>(정병선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가 원서가 출간된 지(1995년) 21년 만에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사실 이 책은 많은 독자들이 기다리던 책이기도 했습니다. 1986년 원서가 나오자마자 호평을 받으며 퓰리처상을 받은 <원자 폭탄 만들기>(문신행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의 후속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원자 폭탄 만들기>는 1995년 국내에 소개되어 역사, 과학, 르포르타주 삼박자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서술로 많은 이들의 눈길을 끌었죠.
<프레시안>은 5월에 같이 읽을 책 가운데 하나로 로즈의 <수소 폭탄 만들기>를 추천합니다. 아, 1100쪽이 넘는 분량에 압도된 나머지 선뜻 책에 손이 안 간다고요? 보통 사람이 읽기엔 너무 어려울 것 같다고요? 그래서 사이언스북스와 함께 먼저 읽은 두 독자의 가이드 독후감을 준비했습니다. (사실 이 책은 한 편의 첩보 스릴러를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합니다.)
첫 번째 독후감은 김명진 한양대학교 강사가 썼습니다. 김명진 씨는 대학이 아닌 시민 단체 시민과학센터에 터를 두고 과학기술학(Science & Technology Studies)을 연구하는 '독립 학자'입니다. 최근 몇 년간은 '냉전의 과학기술사'에 초점을 맞추고 공부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가 왜 지금 <수소 폭탄 만들기>에 주목해야 하는지 친절하게 설명합니다.
이러한 관심의 증가는 냉전이 종식된 후 시간이 흐르면서 역사학자들이 이를 대상화할 수 있는 충분한 거리감이 형성되고, 과거 기밀로 분류됐던 냉전 초기의 수많은 문서 및 영상 자료들이 공개되어 이에 대한 역사 서술을 자극한 결과일 것이다.
오늘날의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와 체제를 대변하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이 대결 구도를 펼쳤던 냉전 시기는 (마치 스티븐 스필버그의 <스파이 브릿지>가 주는 인상처럼) 매우 고색창연한 느낌을 줄지 모른다. 그러나 냉전 시기에 형성된 수많은 기획과 제도들은 현재까지도 크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냉전 시기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의 과학과 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일부를 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
냉전 과학사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쓴다면, 크게 '냉전이 과학의 수행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와 '과학이 냉전의 양상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로 나눠 볼 수 있다. 이 중 전자가 냉전기의 군사적 필요가 다양한 분야에서 과학의 내용, 방법, 가치, 제도, 인력 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탐구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과학에 힘입은 새로운 무기나 그 외 군사적 수단이 냉전의 전개에 어떤 파급 효과를 미쳤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이 중 후자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를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핵무기의 존재를 들어야 할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이 히틀러에 대항하기 위해 서둘러 개발했던 원자 폭탄은 전쟁 말미에 일본에 실제로 사용됨으로써 뒤이은 냉전의 긴장 상태를 더욱 끌어올리는 데 중대한 계기로 작용했고, 이후 소련의 원자 폭탄 개발, 미국의 패닉과 수소 폭탄 개발, 소련의 수소 폭탄 개발, 핵 군비 경쟁, 장거리 미사일 경쟁(우주 경쟁)으로 이어지며 전 세계를 파멸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미국의 저술가 리처드 로즈의 <수소 폭탄 만들기(Dark Sun)>(1995년)는 바로 이 과정, 즉 제2차 세계 대전부터 1960년대 초에 이르는 냉전 초기에 미국과 소련이 핵 군비 경쟁으로 빠져들게 되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재구성한다. 이 책은 그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로즈가 앞서 선보인 저서이자 퓰리처상 역사 부문 수상작 <원자 폭탄 만들기>의 후속편으로 집필되었고, 역시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이후 저자는 <수소 폭탄 만들기>의 뒤를 잇는 두 권의 후속작―[Arsenals of Folly](2007년)와 [The Twilight of the Bombs](2010년)―을 펴내 '핵무기 4부작'을 완성했다.)
이 책을 집어든 사람은 1100쪽이 넘어가는 엄청난 분량에 압도되는 것만큼이나, 처음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당혹감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책 제목은 '수소 폭탄 만들기'인데, 정작 책의 1부에 해당하는 전반부의 3분의 1 이상이 제2차 세계 대전 때 미국의 원자 폭탄 제조 계획의 '비밀'을 소련에 넘긴 스파이들의 첩보담과 소련 과학자의 활동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전작인 <원자 폭탄 만들기>와 흥미롭게 겹쳐지는 대목이다. <원자 폭탄 만들기>도 분량상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전반부에서 일견 폭탄과 멀어 보이는 20세기 초 물리학의 역사를 다루며, 최초의 원자 폭탄을 만들어낸 맨해튼 프로젝트는 책의 후반부에야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이어지는 2부(역시 3분의 1이 넘는 분량) 역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원자 폭탄의 통제를 위한 미국의 노력과 소련의 원자 폭탄 개발 과정을 주로 다룬다. 수소 폭탄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루는 3부는 전체 분량으로 보면 3분의 1이 채 되지 않으며, 그 분량과 깊이에서 1, 2부의 논의에 크게 못 미친다(특히 소련의 수소 폭탄 개발 과정은 짧게 언급되는 정도에 그친다). 저자는 3부의 일부를 할애해 냉전 초 미국의 핵 정책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사건들―1954년의 오펜하이머 청문회와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루면서 논의를 마무리 짓고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제목이 주는 인상과 달리) 수소 폭탄보다 오히려 원자 폭탄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두말할 것 없이 가장 분명한 이유 중 하나는 미국이 격렬한 논쟁을 거쳐 1950년에 수소 폭탄 개발에 나서기로 결정을 내리게 된 배경을 이해하려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전개된 상황을 소상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 1부에서 소련 스파이의 활동을 거의 장황하리만치 비중 있게 다룬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이 원자 폭탄을 개발하는(그럼으로써 미국의 수소 폭탄 개발을 촉발하는) 과정에서 스파이들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했다는 저자의 의중을 반영하고 있다. 아울러 이 책이 집필되던 시점에서(많은 점에서 현재까지도) 수소 폭탄에 관한 많은 사실과 문서들이 여전히 군사 기밀로 분류돼 있어 수소 폭탄 개발의 역사를 그에 앞선 맨해튼 프로젝트의 역사처럼 상세히 다루기 어려웠다는 점도 물론 고려해야 할 것이다.
(미국에서 수소 폭탄에 관한 정보는 초기부터 '태생적 비밀(born secret)'로 분류되었고, 이는 지금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현재 알려진 정보는 대부분 핵무기 프로젝트에 종사했던 과학자들의 인터뷰나 공개된 일부 자료들에서 얻어진 것이며, 이 책의 23장과 24장에서 설명되고 있는 텔러-울람 설계 역시 1970년대 말에 정보 공개 활동가의 노력에 힘입어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수소 폭탄의 '비밀'이 세상에 알려진 과정에 관해서는 알렉스 웰러스타인의 매력적인 짧은 논문을 읽어보길 권한다. (☞관련 자료 : From classified to commonplace: the trajectory of the hydrogen bomb 'secret'))
냉전 초기의 핵 군비 경쟁을 인물 중심의 역사로 재구성한 이 책이 갖는 현재적 가치는 어떤 것일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냉전 과학사라는 분야 자체가 기밀 해제된 새로운 자료의 공개에 의해 빠른 속도로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고, 새로 공개된 자료에 의해 이전의 연구 성과들이 뒷받침될 수도, 완전히 뒤집어질 수도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냉전사의 거장인 존 루이스 개디스가 저서 <새로 쓰는 냉전의 역사>(박건영 옮김, 사회평론 펴냄)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냉전사는 젊은 학자들이 나이든 대가들을 가르칠 수 있는 분야이며, 수십 년간 이 주제를 연구한 노학자보다 이제 막 공개된 아카이브를 섭렵한 젊은 대학원생이 세부적인 주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적확한 역사 서술을 해낼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수소 폭탄 만들기> 역시 냉전 종식 직후에 공개된 새로운 자료와 인터뷰에 의거하고 있지만, 이제 출간된 지 20년이 넘었으니 이 책의 내용 중 적어도 일부는 이후의 자료 공개와 새로운 연구들에 의해 '업그레이드'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가령 1부와 2부에서 다루는 소련의 원자 폭탄 개발 과정은 거의 같은 시기에 출간된 데이비드 할러웨이의 [Stalin and the Bomb](1994년)가 훨씬 더 학술적으로 엄밀한 서술을 제공하며, 수소 폭탄 개발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나 오펜하이머 청문회에 대해서는 카이 버드와 마틴 셔윈의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최형섭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가 훨씬 더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한 서술 역시 최근 쏟아져 나오고 있는 관련 도서들을 참고해야 할 것이다. 저자의 해석 중 일부도 어느 정도 수정이 불가피한데 가령 저자가 강조하는 소련의 핵개발에서 스파이의 중요성은 앞서 언급한 할러웨이의 책에서 상당 부분 부정되었고, 이후 공개된 새로운 자료들에 입각한 재해석을 제시한 마이클 고딘의 [Red Cloud at Dawn](2009년)에서 훨씬 더 세련화되었다. 그들에 따르면 스파이 활동이 소련 과학자들에게 일정한 시간과 자원을 절약할 수 있게 해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정도는 그리 크지 않았고, 스파이 활동으로 얻어진 정보는 항상 그 신뢰성을 둘러싸고 불확실성이 존재했기 때문에 역할이 상당히 애매했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적인 지적들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현재까지는 수소 폭탄 개발의 역사적 배경과 미-소 양국 모두의 수소 폭탄 개발 노력을 하나의 화폭 안에 큰 붓놀림으로 담아낸 저서는 로즈의 이 책이 유일하다. 그리고 상당한 시간이 지나 수소 폭탄에 관한 더 많은 정보들이 기밀 해제되어 새로운 역사적 종합이 가능해지기 전까지, 이 책은 그러한 지위를 계속해서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