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적으로 경기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막강한 자금력을 가진 이슬람권의 투자를 유치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슬람에 대한 지식 부족과 종교적인 편견 등으로 난항을 겪고 있다.
현재 이슬람권에도 한류의 바람이 불어 많은 이슬람교도들이 한국을 찾고 싶어 하지만, 제반 시설의 부족으로 한국행을 꺼린다고 한다.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할랄 식품(이슬람 율법에 따라 이슬람교도가 먹을 수 있는 음식) 단지 조성을 추진 중이지만, 이마저도 종교적 이유 때문에 커다란 벽에 부딪혔다.
이슬람은 우리에게는 낯선 종교이지만, 이웃 중국에서는 이미 7세기 중엽부터 이슬람을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하여 지금은 중국을 구성하는 일부분이 되었다. 현재 중국 내 무슬림(이슬람교도)은 2000만 명을 넘어서고 있으며, 이슬람권과의 긴밀한 협의를 통하여 많은 발전을 이루고 있다. 한 예로 할랄 식품 단지 조성 여부마저 불투명한 우리이지만, 중국은 이미 할랄 식품 국제 인증을 획득해 이를 통한 막대한 이익을 기대한다고 한다.
중국의 회족(回族)과 이슬람교
이슬람교는 당 초기인 651년에 최초로 중국에 전파되어 현재까지 1300여 년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당시 이슬람 상인들이 바닷길을 따라 중국의 천주(泉州)와 광주(廣州) 등지에 들어오면서 중국에 이슬람교가 전파되었다고 한다.
개방적인 성격을 가진 당은 이슬람의 포교를 인정하였고,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는 '청진사(淸眞寺)'라는 다분히 중국식 이름으로 바뀌어 도처에 설립되었다. 이 이후 이슬람은 오대십국(907~960), 북-남송(960~1279) 시기를 거쳐오다가 원대에 이르러 불교·유가·도교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칭기즈칸은 서역 정벌에서 수많은 페르시아인, 아랍인 등을 데리고 중국으로 돌아왔는데, 그들의 뛰어난 행정력과 과학기술 등을 매우 중시하였다. 이러한 점 때문에 원은 몽골 지상주의를 채택하여 한족들을 무척 탄압했지만, 서역의 이슬람교도인 색목인(色目人)들은 매우 우대하였다.
이렇게 이들은 원의 비호 아래 급속도로 성장하여 큰 세력을 이루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들의 후손은 '회족(回族)'이라고 불리며 중국 내 소수 민족 중 두 번째로 많은 인구수를 자랑하고 있다.
'회교(回敎)'는 이슬람교의 중국식 명칭인데, 회족이 믿는 종교라는 것에서 유래한다. 원대 색목인이 다량 유입되면서 이슬람교가 성행하자, 이슬람교도들을 '회회'(回回)라고 불렀다. 회회의 어원은 불확실하지만, 다음과 같은 경유를 거쳐 정착된 것으로 추측된다.
즉, 과거 중국인들은 파미르 고원 부근에 거주하던 현 위구르족의 선조를 회흘(回紇) 또는 회홀(回鶻)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후대로 갈수록 의미가 확대되어 서쪽에 거주하는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통칭하던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중국사 속의 이슬람교도
원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던 회족들은 중국의 발전에 크게 기여해왔다. 먼저 공성전에 약했던 기마민족 몽골이 독일까지 진격할 수 있었던 데에는 색목인들의 과학기술이 절대 빠질 수 없다.
또 중국은 종종 유구한 역사로 자신들의 물건을 자랑하는데, 이중 술은 대표적이다. 하지만, 중국의 술 중 40도가 넘는 술은 결코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색목인들에 의해 증류 기술이 중국에 유입되었고, 이를 통해 독한 백주(白酒)가 탄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애주가들은 이들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주원장이 명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10대 '회회 장수'는 큰 힘을 발휘하였으며, 이 무리의 우두머리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명의 제일 개국공신 서달(徐達, 1332~1385년)이었다. 영락년간(1403~1424년)에 이르러 7번이나 대함대를 이끌고 아프리카까지 다녀왔던 정화(鄭和, 1371~1433년) 역시도 회족이다.
정화의 대원정은 유럽의 대항해 시대보다 약 한 세기나 앞섰고, 약 3만이나 되는 대인원으로 바스코 다 가마의 170명, 콜럼버스의 88명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정화의 원래 이름은 마삼보(馬三寶)로 당시 회족 중에는 마씨가 많았는데, 이는 '무함마드'(Muhammad)의 중국식 표기인 '마합마(馬哈麻)'에서 '마(馬)'를 성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세계사의 획기적인 사건이었던 정화의 대원정이 결코 중국 혼자만의 힘으로 가능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당시 정화를 포함한 수많은 회족들이 이슬람의 뛰어난 천문학, 항해술 등을 중국에 접목하였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청대에도 회족들은 각계각층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대표적으로는 괴기 소설의 백미로 꼽히는 <요재지이(聊齋志異)>의 지은이 포송령(蒲松齡, 1640~1715년), 갑오전쟁 중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평양에서 전사한 애국지사 좌보귀(左寶貴, 1837~1884년) 등이 있다.
현대 중국과 이슬람교
이렇게 오랜 기간 중국에 융합되었던 이슬람교는 이제 완전하게 중국을 구성하는 일부분이 되었다. 중국의 난주(蘭州) 지역 라면은 매우 유명하여 어딜 가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 회족들이 운영하고 있어 가게에 들어서면 수타면을 만들고 양꼬치를 굽는 회족들을 볼 수 있다. 중국화한 이슬람 교당인 청진사도 도처에 건립되어있어, 히잡 등 중국화한 이슬람 전통의상을 두르고 정성스럽게 예배드리는 회족의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
중국은 장기 국책 사업인 일대일로(一帶一路)의 개발 등을 통해서도 이슬람과 긴밀한 협력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얼마 전에는 중국 감숙성(甘肅省) 임하(臨夏)의 할랄 식품 단지가 말레이시아 이슬람 개발부의 국제 인증 기관 권한을 승인받았다고 한다. 즉, 앞으로 임하에서 만든 할랄 식품을 이슬람권으로 수출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중국은 이슬람 국가들의 더 큰 호감을 얻어 일대일로 사업이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고, 막대한 이득을 창출하는 할랄 식품 시장에서도 강력한 경쟁력을 가지게 되었다. 중국이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또 다른 포석을 다진 것이다.
이에 반해 우리는 여전히 이슬람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이 대부분이다. 이는 우리가 이슬람에 대해 직접 보고 듣는 내용이 아니라, 반이슬람 정서가 농후한 서방을 통해 왜곡된 내용을 무조건 수용하다 보니 '이슬람=테러리스트'라는 무지한 선입견이 생겼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맹목적이고 어설픈 종교적 배척으로 이슬람을 '하나님의 적'으로 여기는 것 역시 심각한 문제이다. 이슬람을 자신의 구성원으로 인정한 중국은 그들과의 공존으로 많은 순효과를 거두고 있다. 중국의 예처럼 이슬람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그들과의 공존 방법을 찾아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정말 우리에게 무리인 걸까.
(임상훈 교수는 현재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역사문화연구소에서 연구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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