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5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31강은 강원도 감영(監營)이 있었으며 치악산 자락에 숱한 전설이 서려있고, 섬강(蟾江) 주변에는 나말여초(羅末麗初)의 폐사지(廢寺址)들이 즐비한 원주고을을 찾아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31강은 2016년 5월 22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원주IC-충렬사-창의사-원천석묘역-김제갑충렬비-원주역사박물관-강원감영-원주향교-점심식사 겸 뒤풀이-거돈사지(원공국사탑비/3층석탑)-법천사지(당간지주/지광국사탑비)-이달시비-충효사-반계리은행나무-조엄묘역-원충갑묘역-김제남신도비-흥법사지(진공대사탑비/3층석탑)-문막IC-서울의 순입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31강 답사지인 <원주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치악산 아래 원주고을
백두대간 상의 두로봉에서 갈려나온 지맥(支脈)은 13정맥에는 들지 못하지만, 이 산줄기는 오대산(1563m), 계방산(1577m), 흥정산(1277m), 태기산(1261m), 치악산(1288m)을 일구고 남한강으로 숨어드는 높고 험한 산줄기입니다. 그 끄트머리에 치솟은 치악산 아래 원주고을이 펼쳐져 있습니다.
원주는 동쪽에 치악산(雉岳山, 1288m), 서쪽에 봉화산(鳳華山, 334m), 남쪽에 백운산(白雲山, 537m), 북쪽에 장양산(長陽山, 265m)이 둘러쳐진 분지(盆地)로 “산골짜기 사이사이에 들판이 섞여 열려서 명랑하고 수려하여 몹시 험하거나 막히지 않았다”고 <택리지(擇里志)>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주의 물줄기는 크게 섬강(蟾江)과 원주천(原州川)으로 나누는데, 섬강은 길이 92㎞로서 태기산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흐르면서 금계천(錦溪川), 횡성천(橫城川), 원주천 등의 지류를 합수한 후 다시 남서쪽으로 흘러 경기, 강원, 충청의 3도가 접하는 원주시 부론면에서 남한강과 합류합니다.
원주천은 시내 중심부를 지나 북서쪽으로 흐르면서 호저면 옥산에서 섬강과 합류되고 대안천, 매지천, 궁촌천 등도 북서쪽으로 흐르면서 섬강과 합류하는데, 이들 하천이 흐르는 유역에는 원주분지와 문막 일대에 넓고 기름진 충적평야(沖積平野)를 부려놓았습니다.
원주(原州)는 삼한시대에 마한(馬韓)에 속했고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토였다가 고구려의 남하정책으로 469년(장수왕57) 평원군(平原郡)이 되었습니다. 신라시대 678년(문무왕18) 북원소경(北原小京), 경덕왕 때 북원경(北原京)이라 하다가 고려시대는 940년(태조23) 북원경을 폐지하고 원주로 개칭되었습니다. 995년(성종14) 충원도[忠北]에 소속되었다가 1291년(충렬왕17) 익흥도호부(益興都護府)로 개칭하고 1308년(충렬왕34) 원주목(原州牧)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조선시대 1395년 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강릉도와 교주도를 합하고, 강릉의 ‘강(江)’자와 원주의 ‘원(原)’자를 합하여 강원도라 하였습니다. 원주에 강원감영이 설치되었는데 1895년 원주는 충주부에 소속되었고, 1896년 전국을 개편할 때 원주에 있던 감영은 춘천으로 이전하였습니다.
강원감영(江原監營)은 조선시대 관찰사가 머물던 관아(官衙)로, 관찰사는 고려의 안찰사(按察使) 제도를 이어받은 것입니다. 안찰사가 임시적인 순찰관(巡察官)이었던데 반해 관찰사는 통치체제가 확립된 조선에서 임기가 확립된 전임관의 성격이었습니다. 감영에는 행정과 군사 최고책임자인 관찰사와 관찰사를 보좌하는, 중앙에서 파견된 정3품 경력(經歷), 종5품 도사(都事), 종5품 판관(判官) 등의 관원과 지역의 토착민들 중에서 임명하는 이예직(吏隸職) 등이 있었습니다.
강원감영이 있었던 원주
조선시대에 감영이 있었던 곳으로, 경기감영은 돈의문 밖(지금의 적십자병원), 충청감영은 충주(忠州, 선조35년 공주로 옮김), 경상감영은 상주(尙州 선조29년 달성으로 옮김), 전라감영은 전주, 황해감영은 해주, 강원감영은 원주, 함경감영은 함흥(咸興), 평안감영은 평양(平壤)에 있었습니다. 감영의 중심 건물인 선화당(宣化堂)이 남아 있는 곳은 원주의 강원감영뿐입니다.
선화당(宣化堂)은 관찰사(監司)가 집무하는 정당(正堂)으로, 고제(古制)에선 당헌(棠軒)이라고도 하였는데, 강원감영의 선화당은 동헌(東軒)의 부속건물로서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현종 때 원주목사 이후산(李後山)이 중건한 것입니다.
포정루(布政樓)는 선화당의 정문으로 1660년(현종1) 건립되었으며 1896년 강원감영이 춘천으로 이전하고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가 이곳에 들어서자 ‘선화당(宣化堂)’ 대신에 ‘운주헌(運籌軒)’, 포정루 대신에 ‘선위루(宣威樓)’라 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운주헌과 선위루의 현판이 없어졌다가 한국전쟁 이후 원주 사람 민환기(閔桓基)가 ‘강원감영문루(江原監營門樓)’라는 현판을 달았다가 1991년 본래의 이름대로 ‘포정루(布政樓)’라 하였습니다.
원주향교(原州鄕校)는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기록에 의하면 1402년(태종2)에 원주목사 신호(申浩)가 61칸의 규모로 중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3년(선조36)에 이택(李澤)이 대성전을, 1609년(광해군1)에 목사 임취정(任就正)이 명륜당과 동재 서재를, 1632년(인조10)에는 목사 이배원(李培元)이 중수하고 감사 이민구가 기문(記文)을 지었다고 하는데 대성전, 동무, 서무, 명륜당, 동재, 서재, 외삼문(外三門), 수복실(守僕室)이 남아 있습니다.
충렬사(忠烈祠)는 고려 때 영원산성에서 원나라 반적(叛賊) 합단적(哈丹賊)과 싸워 이긴 응양상호군(鷹揚軍上護軍) 원충갑(元冲甲)을 주향(主享)하고, 임진왜란 때 영원산성에서 전사한 원주목사 의재(毅齋) 김제갑(金悌甲), 임진왜란 때 김화에서 왜적에게 패전 후 투신 자결한 여주목사 원호(元豪)를 함께 배향한 사당(祠堂)으로, 1669년(현종10년)에 건립되었고 1670년(현종11)에 사액(賜額)되었습니다.
원충갑은 고려 무신이며 향공진사(鄕貢進士)로 원주별초(原州別抄)로 있을 때, 1291년(충렬왕17) 원(元)의 반란군인 카단적[哈丹賊]을 상대로 영원산성에서 10차에 걸쳐 크게 무찔러 카단적이 더 이상의 공격과 노략질을 못하게 하였는데, 원충갑의 이러한 공로로 원주는 익흥도호부로, 다시 1308년 원주목으로 승격되었고 원주에 부과되던 각종 부역(負役)과 잡공(雜貢)이 3년 동안 면제되었습니다.
창의사(彰義祠)는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의 영정을 모신 사당입니다. 그는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은사(隱士)로,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수록되어 있는 <회고가(懷古歌)>의 지은이로 유명한데 1330년(충숙왕17) 개성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춘천향교에서 공부하였습니다. 27세에 국자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고려 말의 혼란한 정치정세로 출사(出仕)하지 않고 원주 치악산에 은거하여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모셨고, 목은 이색 등과 교유하면서 시국을 개탄하였습니다.
그는 조선 태종 이방원의 어릴 적 스승이기도 한데 조선 개국 후 벼슬이 내려졌으나 거절하고 태조가 치악산으로 찾아왔을 때에도 만나지 않고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습니다. 만년에는 유학자이면서도 불교와 도교에 관심을 가지고 ‘삼교일치론(三敎一致論)’을 주장하였으며 고려 왕조를 재건하려는 입장에서 왕조교체보다는 제도개혁에 치중하는 포은 정몽주(鄭夢周)와 같았습니다.
무학대사가 그 터를 잡아주었다고 전해지는 원천석의 묘 앞에는 ‘고려국자진사원천석지묘(高麗國子進士元天錫之墓)’라 새겨진 묘비와 상석이 놓여있고, 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1670년(현종11) 세운 묘갈(墓碣)이 있습니다. 유언에 따라 본래 표석을 세우지 않았다가 4대가 지난 후에 묘표가 세워졌으며 묘갈의 비문은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짓고 글씨는 이명은(李命殷)이 썼으며 제액의 전서(篆書)는 허목이 썼습니다.
경순왕 사연 서린 경천묘
조엄(趙曮) 묘역에는 봉분, 상석(床石), 망주석(望柱石)이 있고 상석의 왼쪽으로 묘비가 세워져 있으며, 묘소 진입로 쪽에 1835년(헌종1)에 세운 신도비(神道碑)가있습니다.
조엄은 문장에 능하고 경사(經史)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경륜(經綸)도 뛰어나 민생 문제에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경상도 관찰사 재임시 조운(槽運)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하여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이 주장한 제도에 따라 1760년 창원 마산창(昌原馬山倉), 진주 가산창(晉州駕山倉), 밀양 삼랑창(密陽三浪倉) 등 조창(漕倉) 3개의 증설을 건의하여, 전라도까지만 미치던 조운(漕運)을 경상도 연해 지역에까지 통하게 하여 세곡수송(稅穀輸送)의 폐해를 시정하였습니다.
또 공물(貢物)의 수납을 공정하게 하여 국고(國庫)의 안정을 기하였으며, 1763년(영조39)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대마도(對馬島)에 들려 고구마 종자를 가져와 동래(東萊)와 제주도(濟州島)에서 최초로 고구마 재배를 실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보장법(保藏法)과 재배법을 널리 보급하여 구황작물로 이용하게 하였습니다. 고구마라는 말 자체도 그가 지은 <해사일기(海槎日記)>에서 일본인이 이를 ‘고귀위마(古貴爲麻)’라고 부른다고 기록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특히 제주도에서는 고구마를 조엄의 성씨를 따와 조저(趙藷)라고 부릅니다.
충효사(忠孝祠)는 효자(孝子)로서 시호(諡號)를 받은 황무진(黃戊辰)을 모신 사당입니다. 황무진은 부친을 일찍 여의고 모친을 모시고 살면서 효성이 지극하여 하늘이 낸 효자라는 칭송을 받았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 의병활동을 하여 그 공으로 절충장군행용양위부사과에 봉해졌습니다. 1634년(인조12)에 그의 효성을 찬양하기 위해 정문(旌門)을 그의 집 앞에 세웠으며 1652(효종3) 그가 죽자 시호를 충효공((忠孝公)이라 하고 사당을 건립하여 각판, 현판, 제기 등을 하사하였으나 사당은 그가 죽은 지 69년 후인 경종1년(1721)에 건립되었습니다.
김제남(金悌男) 묘역에는 묘소, 사당 그리고 신도비가 있는데, 신도비는 신흠(申欽)이 짓고, 심열(沈悅)이 썼으며 전서체 제액(題額)은 김상용(金尙容)이 썼습니다.
김제남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602년 둘째딸이 선조의 계비[仁穆王后]에 뽑힘으로써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에 봉해졌습니다. 1613년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해 인목왕후 소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세자로 추대하려 했다는 모함을 받아 사약을 받았으며 1616년에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면서 다시 부관참시(剖棺斬屍)되는 불운을 겪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 뒤에 관작(官爵)이 복구되고 왕명으로 사당이 세워졌습니다.
미륵산 아래에 있는 경천묘(敬天廟)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敬順王)의 영정(影幀)을 모신 묘우(廟宇)입니다. 경순왕은 927년 왕위에 올랐으나 신라가 이미 운명을 다했음을 알고 935년(경순왕9) 신하들과 논의하여 고려에 나라를 넘기고 산천을 두루 다니다가 이곳 용화산(龍華山, 현 미륵산) 정상에 미륵불상을 조성하고, 그 아래에 학수사(鶴樹寺)와 고자암(高自庵)을 세웠다고 전해지는데 경순왕이 죽자 왕을 추종하던 신하와 불자들이 고자암에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받든 것이 영정각(影幀閣)의 시초였다고 합니다.
고려 중기 이후 전각은 무너지고 인적도 끊어졌다가 조선 초에 이색, 권근 등에 의해 전각이 다시 지어졌으며 숙종 때 원주목사 김필진(金必桭)이 새로 초상화를 그리고 전각을 지어 모셨으나 소실되었고, 영조 때 재건되면서 영정각을 ‘경천묘(敬天廟)’로 개칭하였습니다.
영원산성(嶺願山城)은 치악산에 있는 돌로 쌓은 산성으로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축조되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궁예(弓裔)가 치악산 석남사(石南寺)를 근거로 하여 가까이 있는 고을을 공격한 일이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궁예가 이 산성을 이용하였던 것이 아닌가 짐작되기도 합니다.
성의 전체 둘레는 약 2.4km 정도이고 성벽은 동쪽과 서북쪽 일부 구간에 잘 남아있으나 대체로 붕괴된 상태입니다. 옛 기록에 “영원성은 석축성으로 둘레 3,749척, 성내에 우물 1개, 샘이 5곳 있었으나, 지금은 폐하였다”고 하였는데, 지금도 여러 곳에 샘터, 건물터, 성문터와 세 곳에 숯가마터가 남아있으며 여장(女牆)에 총안(銃眼)이 없으며 치성(雉城)을 동남쪽에 4곳, 북쪽에 4곳, 서쪽에 4곳에 설치하였습니다.
반계리 은행나무는 높이가 34.5m, 가슴 높이의 줄기 둘레가 16.9m, 밑동 둘레가 14.5m에 이르며 가지는 동서로 37.5m, 남북으로 31m 정도로 넓게 퍼져있으며 나이는 대략 800년 정도로 추정됩니다.
이 나무의 기원에 대하여 성주이씨 가문의 한 사람이 심었다고도 하며, 어떤 대사가 이곳을 지나가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신 후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꽂아놓고 간 것이 자란 것이라고도 하는데, 마을사람들은 이 나무속에 커다란 흰 뱀이 살고 있어서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는 신성한 나무로 여겼습니다.
치악산이 품은 많은 사찰들
치악산은 깊고 그윽하여 그 기슭에는 많은 사찰이 있었습니다. 구룡사(龜龍寺)는 신라 문무왕 6년(666)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9마리의 용이 살고 있는 연못을 메우고 사찰을 창건하여 구룡사(九龍寺)라 하였으나, 조선 중기에 거북바위 설화와 관련하여 현재의 명칭인 구룡사(龜龍寺)로 개칭하였다고 합니다.
한편 <치악산구룡사사적(雉岳山龜龍寺事蹟)>에 의하면 신라 말 도선국사(道詵國師)에 의해 창건되었다고도 하는데, 사중기록에 의하면 ‘강희(康熙) 45년’ 명(銘)의 와당이 출토되어 1706년(숙종32)에 구룡사가 중건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따르면 구룡사의 모든 건물은 숙종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고 절 입구에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부도군과 구룡사의 전설을 말해주는 거북바위와 용폭(龍瀑), 용소(龍沼)가 있으며 치악산 일대의 소나무에 대한 무단 벌채를 금하는 ‘황장금표(黃腸禁標)’가 있습니다.
상원사(上院寺)는 신라 문무왕때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하였다는 설과 신라 말 경순왕의 왕사였던 무착선사(無着禪師)가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오대산 상원사에서 수도하던 중 문수보살에게 기도하여 관법으로 창건하였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창건 이후로 고려 말에 나옹화상이 중창하였고, 월봉, 위학, 정암, 해봉, 삼공, 축념 등의 선사들이 이곳에서 수도하였으며 조선시대의 여러 왕들은 이 절에서 국태민안을 기도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영원사(鴒原寺)는 영원산성 아래 있으며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영원산성의 수호사찰로 창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폐사되었다가 1664년(현종5)에 중건하면서 지금의 절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전하며, 그 뒤의 사적은 불확실하지만 1939년에 계호(戒浩)가 중건하였고 1964년에 김병준 주지가 중건하였고 사찰의 동쪽 산 위에 후고구려의 궁예가 이 성을 근거로 인근의 여러 고을을 공략했던 영원산성의 흔적이 10리에 걸쳐 남아있습니다.
국형사(國亨寺)는 국향사(國享寺)라고도 부르며 신라 경순왕대에 무착대사에 의해 창건되어 고문암(古文庵)이라 하였다고 하나 당시의 유물과 유적은 남아있지 않고 다만 조선 태조 때 이 절에 동악단(東嶽壇)을 쌓아 동악신을 봉안하고 매년 원주, 횡성, 영월, 평창, 정선 고을의 수령들이 모여 제향을 올렸다고 합니다.
보문사(普門寺)는 향로봉의 서쪽 골짜기인 보문골에 있는 사찰로 신라 경순왕 때 무착(無着)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며 대웅전과 요사는 근래에 중건한 것으로 당시 희귀한 청석탑 부재가 출토되어 오래된 절터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예부터 전해오던 보문암 창기(創記)에 의하면 보문사를 옛날에는 보문연사(普門蓮社)라 했고 또 보문사를 건립하기 위하여 원주 지역 주변 사찰인 국형사, 구룡사, 신륵사, 상왕사 등에서 시주한 금액이 명기(銘記)되어 있다고 합니다.
입석사는 자세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이곳에 와서 수도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경내에는 신축한 대웅전과 최근에 주변에 흩어져 있던 석탑재를 일부 사용하여 복원한 3층석탑이 있습니다.
섬강 주변의 유명 폐사지들
섬강 주변에는 나말여초에 세워진 대규모 사찰들이 석탑과 탑비 그리고 주춧돌만이 남아 쓸쓸하게 절터를 지키고 있습니다.
법천사지(法泉寺址)는 명봉산(鳴鳳山) 자락에 기대어 한강으로 흘러드는 법천을 끼고 가람이 조성되어 있으며 주변에 법천사 도요지가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사찰의 규모가 컸을 뿐만 아니라 사하촌(寺下村)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라 말에 세워진 이 지역의 대표적 사원으로 고려시대에는 유가종사찰(瑜伽宗寺刹)로 금산사(金山寺)와 함께 개성 밖 지방 선종사찰(禪宗寺刹)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무신정권 이전까지 법상종(法相宗)의 대표적인 사찰로 왕실과 문벌귀족의 후원을 받아 번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시대 관웅(寬雄), 지광국사(智光國師) 해린(海鱗), 정현(鼎賢), 덕겸(德謙), 관오(觀奧), 각관(覺觀) 등이 주석하였고 조선 초 유방선(柳方善)은 이곳에 별서(別墅)를 짓고 한명회(韓明澮), 서거정(徐居正), 권람(權擥), 강효문(康孝文) 등의 제자를 가르쳤으며 1609년 허균(許筠)이 방문했을 때에는 이미 폐허로 변해 있었음을 그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절터에는 당간지주, 지광국사현묘탑비(智光國師玄妙塔碑), 법당터, 석탑의 일부와, 지금은 경복궁 뜰 앞으로 옮겨진 지광국사현묘탑(智光國師玄妙塔)을 모셨던 탑전지(塔殿址)가 남아 있으며 주변에는 이 절터에서 나온 석재(石材)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중앙의 건물지는 기단부가 탑의 기초 부분이라 할 수 있는 지대석이 깔려있어 마치 감은사지 서3층석탑에서 볼 수 있는 탑의 기단부와 같은 형식인 점으로 보아 이곳은 목탑지가 아닌가 생각되며, 특히 건물지 옆에 불상의 후면을 장식하는 광배(光背) 유구, 계단 사이를 장식하는 화려한 조각의 답도석(踏道石), 그리고 예배를 드리던 배례석(拜禮石)도 남아 있습니다.
지광국사탑비는 지광국사(智光國師)의 행적을 기록한, 11세기를 대표하는 비문으로, 고려 초의 문장가인 정유산(鄭惟産)이 짓고 글씨는 안민후(安民厚)가 구양순체로 썼는데, 앞면에는 지광국사가 수도한 내력을, 뒷면에는 1370여 명에 이르는 지광국사의 제자 이름과 인원수를 적었는데, 비석을 세운 연대는 1085년(고려 선종2)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광국사 해린(海鱗)은 속성이 원씨(元氏)이며 원주의 토착세력 출신으로 법고사 관웅대사 밑에서 수학하고 그를 따라 개경에 들어가 준광에게 출가하였으며 16세 때 용흥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21세인 1004년(목종7) 승과에 합격하고 법상종 승려로서 대덕(大德)이 되었습니다. 71세인 1054년(문종8) 개경에 있는 현화사 주지가 되었고 이후 삼중대사, 승통, 왕사의 칭호를 받았고, 74세인 1057년(문종11) 개경 봉은사(奉恩寺)에서 국사(國師)로 추대되었으며, 1070년(문종24) 법천사에서 열반하였습니다.
거돈사지(居頓寺址)는 한계산 기슭의 남쪽사면 물줄기가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곳에 펼쳐진 절터로, 발굴조사 결과 신라 말 9세기경에 처음 지어져 고려 초기에 확장, 보수되어 조선 전기까지 유지된 것으로 밝혀졌으며 중문 터, 탑, 금당 터, 강당 터, 승방 터, 회랑 등이 확인되었고 3층석탑, 원공국사승묘탑비가 남아있고 원공국사승묘탑은 경복궁 뜰안에 옮겨져 있습니다.
거돈사는 신라 말 신라 왕실의 후원사찰인 안락사(安樂寺)로 고려 초기 불교계의 중심이었던 법안종의 주요 사찰이었으나 고려 중기 천태종이 유행하면서 천태종 사찰로 흡수되었으며 여말선초의 절터로서 보기 드문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 가람배치입니다.
원공국사는 고려 초기의 천태학승(天台學僧)으로, 8세에 개경 사나사(舍那寺)에 머물고 있던 인도승(印度僧) 홍범삼장(弘梵三藏)에게 출가하였으나 홍범삼장이 인도로 돌아가자 광화사(廣化寺) 경철(景哲)에게 수업하여 946년(정종1) 영통사(靈通寺) 관단(官檀)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953년(광종4) 희양산(曦陽山)의 형초선사(逈超禪師) 밑에서 수행하였습니다.
954년 승과(僧科)에 합격하여 959년 광종(光宗)의 환대를 받으며 구법(求法)을 위해 오월국(吳越國)으로 유학하여 영명사(永明寺) 연수(延壽)에게 법안종(法眼宗)을 배웠고, 961년 국청사(國淸寺) 정광(淨光)에게 '대정혜론(大定慧論)'을 배워 천태교(天台敎)를 전수받았습니다. 970년 고려로 돌아와 왕권 강화를 위해 개혁정치를 표방하던 광종의 비호를 받으며 법안종을 크게 일으켰으나 광종이 사망하고 그의 급진적 개혁정치가 중도에 그치면서 법안종도 세력이 급속도로 위축되고 원공국사도 89세인 1018년 병든 몸을 이끌고 거돈사에 이르러 열반에 들었습니다.
원공국사탑비는 원공국사 지종(智宗)의 생애와 행적, 그의 덕을 기리는 송덕문이 새겨져 있는 비석으로, 최충(崔冲)이 지었고 글씨는 구양순체로 김거웅(金巨雄)이 썼으며, 이는 고려시대의 여러 비에 새긴 글 중에서도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됩니다.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3층석탑은 통일신라 양식으로 9세기 작품으로 추정되며, 절터에 있는 민가 우물가에는 탑 옆에서 옮겨왔다는 배례석(拜禮石)이 놓여 있습니다.
흥법사지(興法寺址)는 영봉산(靈鳳山) 자락에 있으며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적연국사(寂然國師) 영준(英俊)의 탄생(태조15)과 진공대사(眞空大師)의 열반(태조23)이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졌다는 기록으로 보아 나말여초(羅末麗初)의 선종계 사찰로 추정됩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 편찬된 1480년경(조선 성종11)에도 폐사(廢寺)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으로 보이며 1693년(숙종19)에 이곳에 도천서원(陶川書院)을 건립하였다가 1871년에 폐지하였습니다.
흥법사지에는 3층석탑 1기와 진공대사탑비(眞空大師塔碑)의 귀부(龜趺), 이수(螭首)가 남아 있고 금당지(金堂址)로 보이는 대상(臺上)에는 민가(民家)가 있으나 그 주위로 축대석(築臺石)과 많은 유구(遺構)들이 흩어져 있으며, 진공대사탑비의 비신과 진공대사탑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있습니다.
한편 흥법사지에 있었다고 하는 염거화상탑(廉居和尙塔)은 원 소재지와 연대 등에 대하여 계속 문제가 제기되고 있으나, 1914년 원주 흥법사지에서 서울의 파고다공원으로 옮겨졌다고 하며 해방 뒤 경복궁으로 옮겼다가 경복궁 중건 공사로 1990년대에 국립고궁박물관(당시 국립중앙박물관) 뒤뜰로 옮겨졌다가 2004년 현재의 국립중앙박물관 앞뜰로 옮겨졌습니다.
염거화상탑은 부도 안에서 나왔다고 하는 ‘염거화상명탑지(廉巨和尙銘塔誌)’ 동판(銅板)에 근거하여 844년 입적한 염거화상의 부도로 생각하고 있으나 흥법사지에서 염거화상탑지를 전혀 발견할 수 없고 일본인들에 의해 옮겨질 때 목록 작성에서 차질이 생긴 것으로 인식되어 ‘전흥법사지염거화상탑(傳興法寺址廉居和尙塔)’으로 명명되고 있습니다.
염거화상은 가지산문(迦智山門)의 개산조인 도의선사(道義禪師)의 제자로, 주로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머물며 선(禪)을 널리 알렸으며 체징(體澄)에게 그 선맥(禪脈)을 전하고 844년(문성왕6)에 입적하였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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