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5월입니다. 서울학교(교장 최연. 인문지리학자, 서울해설가) 제50강은 봄날 흐드러지게 핀 살구꽃이 바위와 잘 어울리는 절경이라 한양의 경치 좋은 다섯 곳 중의 하나로 꼽혔던 인왕산(仁王山)과 옥류동천(玉流洞天)을 둘러볼까 합니다.
인왕산은 한양의 내사산(內四山) 중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하며 달리 필운산(弼雲山)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인왕산이 임금이 계신 궁궐의 오른쪽에 있어 “군주는 오른쪽에서 모신다(右弼雲龍)”는 의미로 그리 불렀으며, 이항복의 집이 있었던 필운대(弼雲臺)라는 지명도 이로부터 나왔습니다. 또한 인왕산이 품고 있는 계곡을 옥류동천(玉流洞天)이라 합니다.
서울학교 제50강은 2016년 5월 8일(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서울 종로구 홍지동 상명대 입구 중국음식점 <팔선생> 앞에서 모여 출발합니다(광화문 KT빌딩 앞 버스정류장에서 7016번 상명대 가는 버스 이용하면 20여 분 걸립니다. 정시에 출발하니 출발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석파정 별채-탕춘대성-너럭바위(자하문밖 조망)-기차바위-한양도성-인왕산 정상(한양도성안 조망)-곡성-선바위-국사당-택견수련터-황학정(등과정터)-사직단-점심식사-필운대-백호정터-송석원터-인경궁/자수궁터-옥류동천-기린교-이완용집-선희궁터-정철생가터-육상궁(칠궁)-창의궁터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5월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인왕산 기슭에 터 잡은 사대부 살림터와 정자, 별장들
인왕산이 동쪽으로 부려놓은 터전이 넓고 수려하여 경희궁, 인경궁, 자수궁, 사직단이 들어섰을 뿐만 아니라 맑은 계곡에 기암괴석과 송림이 어우러져 조선 사대부들의 살림터와 정자가 많았습니다. 세종과 송강 정철의 탄생지, 영조의 잠저(潛邸)인 창의궁(彰義宮), 안평대군이 살았던 수성동(水聲洞)의 비해당(匪懈堂), 조광조의 제자 성수침(成守琛)의 집터 청송당(聽松堂), 이항복(李恒福)의 집터 필운대(弼雲臺),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의 집터 청풍계(淸風溪)와 서인(庶人)과 중인(中人)들의 시회(詩會)를 열어 위항문학(委巷文學)을 부흥시킨 천수경(千壽慶)의 정원(亭園)인 송석원(松石園)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인왕산의 서쪽으로 부려놓은 터전은 수려하고 그윽하기는 하나 넓지 못하여 안평대군의 무계정사(武溪精舍), 대원군의 석파정(石坡亭) 등 왕족의 별장이 몇 채 있었을 뿐입니다.
석파정(石坡亭)의 원래 이름은 삼계정(三溪亭)입니다. 삼각산의 문수봉(文殊峰)과 보현봉(普賢峰) 그리고 북악(北岳) 사이로 흘러내리는 세 물줄기가 하나로 모여 홍제천(弘濟川)이 되어 난지도(현재의 하늘공원)에서 불광천(佛光川)과 만나 한강(漢江)으로 합류하는데, 계곡이 시작되는 곳에 지은 별장이라고 삼계정이라고 하였습니다.
삼계정은 철종(哲宗) 대에 영의정을 지낸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중심인물인 김흥근(金興根)의 별장이었으나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이 잠시 머물기로 하고는 그냥 눌러앉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정자의 이름을 석파정으로 바꾸고 자신의 호도 ‘석파’라 하였습니다.
석파정의 본채는 부암동터널 입구 본래의 자리에 그대로 있고, 별채는 서예가 손재형(孫在馨)이 자신의 한옥을 지을 때 사들여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으며 ‘대원군별장’으로 명명되어 본채와 무관하게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별도로 지정되었는데, 한국식과 중국식이 혼합된 새로운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어 건축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대원군별장’을 나와 홍제동쪽으로 인도를 따라 조금만 가면 왼쪽으로 인왕산에 오르는 나무계단이 나타나고 조금은 가파른 산자락을 올라가면 탕춘대성의 일부가 연결되어 있고 산성은 도중에 끊어져 있습니다. 서쪽능선은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한적한 곳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창의문(彰義門)에서 바로 인왕산에 오르기 때문입니다. 능선에 올라 호젓한 소나무길을 걸어가면 도시에서 켜켜이 쌓인 홍진(紅塵)이 말끔히 씻어지는 듯한 상쾌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능선에 있는 너럭바위에 앉아 멀리 산줄기를 조망해 보면 서남쪽으로 보현봉, 문수봉, 승가봉, 사모바위, 비봉, 향로봉, 수리봉으로 뻗쳐 있고 동남쪽으로는 보현봉에서 형제봉을 지나 구준봉을 거쳐 백악에 이르는 능선이 뻗어 있습니다.
이 두 능선 사이의 계곡을 아름다운 바위와 맑은 물로 유명한 ‘한양5경’의 하나인 ‘세검정 계곡’이라 하고 달리 경치 좋은 곳으로 통칭되는 ‘자하문밖’이라고도 하는데 자하문(紫霞門)은 창의문의 다른 이름으로 ‘자하문밖’이라 함은 지금의 세검정, 평창동, 구기동, 부암동 신영동 일대를 말합니다.
소나무길을 잠시 벗어나면 좌우로 낭떠러지인 유명한 ‘기차바위’가 나타나는데 이곳에서 잠시 다리쉼하며 내려다보면 백악에서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漢陽都城)이 띠처럼 둘러쳐 있고 백악과 인왕산 사이의 안부(鞍部)에 창의문이 서 있습니다.
인왕산 정상에 오르면 조선의 법궁(法宮)인 경복궁(景福宮)과 내사산(內四山)인 백악(白岳), 낙산(駱山), 목멱산(木覓山), 인왕산을 둘러친 한양도성이 내려다보입니다.
한양은 내사산을 잇는 18.6km의 도성을 둘러치고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네 개의 큰 문과 네 개의 작은 문을 내고 도성 중심에 종루(鐘樓)를 설치하였으며 도성 안의 명당수(明堂水) 물줄기인 청계천(淸溪川)이 도성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흥인지문 옆에 오간수문(五間水門)을 설치하고 그 위로 사람들이 통행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인왕산은 사림문화 이전에 한양의 불교성지
인왕산은 사림(士林)의 문화가 터를 잡기 이전부터 한양의 불교성지였습니다. 인왕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한 인왕사(仁王寺)를 비롯해서, 선승들의 수도처인 금강굴(金剛窟), 세조 때 지은 복세암(福世菴), 궁중의 내불당(內佛堂) 등 도성의 내사산(內四山) 가운데 사찰이 가장 많이 있었습니다. 특히 인왕은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으로 사찰의 입구에 있는 수호신이었음을 미루어볼 때, 인왕산은 한양을 지켜주는 수문장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암석숭배 혹은 바위정령을 믿는 우리나라 민속신앙의 성향으로 보아, 인왕산의 형세는 그것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음을 증명해 보이듯 합니다. 높이 솟은 주봉의 암반은 당당한 위풍을 뽐내고 그 주변과 계곡에 널려 있는 크고 작은 바위 형상들은 모두 개성이 뚜렷하며 그 모양새에 따라 선바위, 말바위, 매바위, 기차바위, 부처바위, 맷돌바위, 치마바위, 감투바위 등 다양하게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선바위[墠岩]는 ‘제사 지내는 터’라는 뜻으로 이곳에서 무학대사가 기도를 해서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에 이은 조선의 건국을 성공적으로 이루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연유로 두 개의 큰 바위는 무학대사와 이성계, 또는 이성계 부부라 전해지고 있습니다만, 달리 두 바위 중 오른쪽 바위가 고깔을 쓴 장삼 차림의 승려를 닮았다고 하여 ‘선암(禪岩)’으로 전해져 오기도 하는데 이는 바위가 가부좌를 틀고 참선하는 형상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 전해져 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또한 도읍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면서 도성을 쌓을 때 그 경계에 대하여 무학대사와 정도전(鄭道傳)의 주장이 대립되어 태조가 고민하던 중에 어느 날 인왕산에 눈이 내렸는데 능선을 따라 한 쪽만 눈이 녹으면서 선이 그려졌습니다. 이를 하늘의 계시로 여기고 그 선을 따라 성을 쌓았는데 공교롭게도 선바위가 그 경계선 밖으로 내쳐져 “선바위가 도성 안에 들어가도록 성을 쌓아야 된다”고 주장했던 무학대사의 뜻이 좌절되었으며 그때 무학대사는 통탄하며 조선시대에 불교가 쇠퇴하고 유학자들에 의해 억압이 지속되리라 예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왕산 정상에서 동쪽 아래로 넓게 펼쳐진 ‘치마바위’는 중종과 단경왕후의 애절한 사연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중종(中宗)이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르자 공신들이 단경왕후(端敬王后)가 연산군의 처남으로 좌의정까지 지낸 신수근(愼守勤)의 딸임을 문제 삼아 폐위시키고 궁궐에서 내쫓았습니다. 중종은 폐비(廢妃) 신씨(愼氏)가 보고 싶을 때면 누각에 올라 신씨의 집 쪽을 바라보곤 했는데, 신씨가 그 사실을 전해 듣고 집 뒤쪽에 있는 큰 바위에 자신이 궁중에서 입던 분홍색 치마를 눈에 띄게 걸쳐 놓았다고 하는데, 중종은 그 치마를 보며 신씨를 향한 애절한 감정을 진정시키곤 했다고 합니다.
선바위 아래에 있는 국사당(國師堂)은 1925년 남산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는데, 이것은 일제가 목멱산 기슭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더 높은 곳에 국사당이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전을 강요하자 건물을 해제하여 현재의 자리에 원형대로 복원한 것입니다. 이전 장소를 인왕산 기슭 선바위 아래로 정한 것은 그곳이 태조와 무학대사가 기도하던 명당이기 때문이고, 국사당에는 태조와 왕비 강씨부인상, 무학대사, 나옹화상, 최영장군, 명성황후상, 산신, 용왕신, 칠성신, 삼불제석 등이 모셔져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호국의 신으로 삼아 개인적인 제사는 금하고 국가의 공식행사로 기우제(祈雨祭)와 기청제(祈晴祭)를 지냈다고 합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목멱신사(木覓神社)라는 사당이 남산 꼭대기에 있었고, 매년 봄, 가을에 초제(醮祭. 별을 향하여 지내는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 말엽에는 이미 국가적인 제사를 지내는 일이 없었고 다만 별궁(別宮)의 나인들이 치성을 드리러 오거나 개성 덕물산(德物山)에 치성을 드리러 가는 사람들이 먼저 이 당을 거쳐 갔습니다. 궁중 발기(撥記)에는 명산과 당, 묘 등에 치성을 위하여 보낸 금품목록이 적혀 있는데, 여기에 국사당의 이름이 여러 번 등장하며 명성황후가 궁중 나인들을 시켜 국사당에 치성을 드렸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난 능선을 따라 내려서면 우리의 전통무술인 택견을 수련하고 시합까지 하였던 곳이 남아있으며 일제강점기 때까지 택견시합이 열렸는데 우대와 아랫대 두 지역으로 편을 갈라 시합을 하였답니다.
우대라 함은 청계천 상류지역인 도성 안의 서북쪽으로 경복궁에 가까워 하급관리(吏胥)인 중인들이 많이 살았고, 아랫대는 청계천의 하류지역인 도성 안의 동남쪽으로 훈련원이 있어서 하급장교[軍摠]인 중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습니다.
필운대는 백사 이항복의 집터
사직단으로 내려서기 전에 만나는 황학정은 사정(射亭)으로, 1898년(광무2) 대한제국 시절에 고종의 어명으로 경희궁 회상전(會祥殿) 북쪽에 지었던 것을 일제강점기인 1922년에 등과정터인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습니다.
조선시대 서울에는 궁술 연습을 위한 사정(射亭)이 다섯 군데 있었습니다. 필운동(弼雲洞)의 등과정(登科亭), 옥동(玉洞)의 등룡정(登龍亭), 삼청동(三淸洞)의 운룡정(雲龍亭), 사직동(社稷洞)의 대송정(大松亭), 누상동(樓上洞)의 풍소정(風嘯亭)으로, 그 위치가 모두 인왕산과 북악 사이에 있는 서촌에 있어 서촌 오사정(西村五射亭)이라고 하였습니다.
오사정은 조선 전기부터 무인의 궁술 연습지로 유명했는데, 갑신정변 이후 활쏘기 무예가 쇠퇴하자 많은 활터가 사라졌고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활쏘기를 금지하여 황학정만 그 맥을 이어왔으며, 지금 황학정이 세워져 있는 곳은 오사정의 하나인 등과정이 있던 자리입니다.
사직단(社稷壇)은 토지의 신[社]과 오곡의 신[稷]에게 제사지내던 곳입니다. 고대국가에서는 임금은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고 해서 대대로 세습이 되었으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임금의 씨가 마르지 않게 대를 잘 잇게 하는 것이고, 다음으로 백성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해야 하므로 비옥한 토지와 튼실한 씨앗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궁궐을 중심으로 임금의 조상 위패를 모시는 곳[宗廟]을 왼쪽에 두고 조상의 음덕으로 대를 잘 이을 수 있도록 기원했으며,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 제사지내는 곳[社稷壇]을 두어[左廟右社] 임금이 친히 납시어 제사를 지냈습니다.
필운대는 백사 이항복의 집터로서 원래는 장인인 도원수 권율 장군의 집이었으며, 지금은 바위에 새겨진 글씨 세 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왼쪽에는 '필운대(弼雲臺)'라는 글자가 있고 오른쪽에는 집을 지을 때 감독관으로 보이는 동추(同樞) 박효관(朴孝寬) 외 9명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으며 오른쪽 위에는 백사 이항복의 후손인 월성(月城) 이유원(李裕元)이 쓴 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살던 옛집에 후손이 찾아왔더니, 푸른 바위에는 흰 구름이 깊이 잠겼고, 끼쳐진 풍속이 백년토록 전해오니, 옛 어른들의 의관이 지금껏 그 흔적을 남겼구나. (我祖舊居後裔尋, 蒼松石壁白雲深. 遺風不盡百年久, 父老衣冠古亦今)”
광해군(光海君)은 임진왜란 이후 파주 교하(交河)에 신궁(新宮)을 건설하려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때마침 풍수지리가인 성지(性智)와 시문용(施文用) 등이 인왕산왕기설(仁旺山王氣說)을 강력히 주장하자 인왕산의 왕기를 누르기 위하여 1616년(광해군8)에 인왕산 기슭의 민가를 헐고 승군을 징발하여 인경궁(仁慶宮), 자수궁(慈壽宮), 경덕궁(慶德宮, 경희궁) 등 세 궁궐을 지었습니다.
인경궁은 사직동 부근에, 자수궁은 한양오학의 하나였던 북학(北學)의 자리에, 경덕궁은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定遠君, 元宗으로 追尊)의 사저에 지었으나 인조반정 뒤, 경덕궁만 남겨두고 인경궁과 자수궁을 폐지하였습니다. 인경궁은 1648년(인조26)에 청인(淸人)들의 요구로 홍제원(弘濟院)에 역참(驛站)을 만들 때 청나라 사신들의 숙소 등의 건물을 새로 지을 때 태평관(太平館)의 건물과 함께 허물려 재목과 기와를 사용하였습니다.
자수궁은 자수원(慈壽院)이라 이름을 고친 뒤 이원(尼院. 僧房)이 되었는데 후궁 중에서 아들이 없는 이는 이원에 들어와 있게 하였으므로 한때 5,000여 명의 여승이 살았다고 합니다. 1661년(현종2) 여승의 폐해가 심하여 부제학 유계(兪棨)의 상계(上啓)로 폐지되면서 어린이들은 환속시키고 늙은이들은 성 밖으로 옮겼으며, 1663년 자수원의 재목으로 성균관 서쪽에 비천당(丕闡堂)을 세우고, 또 일량재(一兩齋)와 벽입재(闢入齋)를 세웠습니다.
송석원 시사(松石園 詩社)는 천수경(千壽慶)을 중심으로 한 서울의 중인계층이 인왕산 아래 옥류동(玉流洞)의 송석원에서 1786년(정조10)에 결성하여 1818년(순조18)에 해산한 문학모임으로, 달리 옥계시사(玉溪詩社)라고도 불렀습니다. 송석원은 천수경의 별장 이름입니다.
사대부 문학이 중심을 이루던 조선 사회에 서인(庶人)과 중인(中人)을 중심으로 하는 위항문학(委巷文學, 閭巷文學)이 등장하게 된 것은 숙종 때입니다. 신분이나 경제력에서 사대부에 비하여 열등한 위치에 있던 위항인들이 자기 권익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채택한 것이 문학모임인 시사였고, 대표적 그룹이 송석원 시사였습니다.
그 주요 인물은 맹주인 천수경을 비롯하여 장혼(張混), 김낙서(金洛書), 왕태(王太), 조수삼(趙秀三), 차좌일(車左一), 박윤묵(朴允默), 최북(崔北) 등으로, 이들은 김정희(金正喜)가 쓴 ‘송석원(松石園)’이라는 편액(扁額)을 걸고 그들과 같은 처지의 시인들과 어울려 시와 술로 소요자적(逍遙自適)하였는데, 후일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도 여기에 나와 큰 뜻을 길렀다고 합니다.
그들의 활동 중 백전(白戰)은 전국적 규모의 시회로서 1년에 두 차례씩 개최되었는데, 남북 두 패로 나누어 서로 다른 운자(韻字)를 사용함으로써 공정을 기하였던 큰 모임이었습니다. 1797년 <풍요속선(風謠續選)>을 간행하여 <소대풍요(昭代風謠)> 이후 60년 만에 위항인들이 그들의 시선집(詩選集)을 간행하는 전통을 수립하였으며 구성원들의 활발한 작품활동으로 송석원 시사와 위항문학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체제와 제도를 명문화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문무관 2품 이상인 관원의 양첩 자손은 정3품까지의 관직에 허용한다”라고 하였으며 “7품 이하의 관원과 관직이 없는 자의 양첩 자손은 정5품까지의 관직에 한정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양첩(良妾) 자손은 그나마 한정된 벼슬에라도 오를 기회가 있었지만, 천첩(賤妾) 자손은 벼슬할 기회가 없었으므로 뛰어난 서얼 지식인들이 늘어나자 정조는 서얼금고법(庶孽禁錮法)에 해당되지 않도록 검서관(檢書官)이라는 잡직(雜職) 관원을 뽑았습니다. 이들은 규장각(奎章閣)에서 서적을 검토하고 필사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정무직이 아니라서 기득권층의 반대도 없었고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서얼 학자들의 불만을 달래주는 효과도 있었습니다.
1779년에 임명된 초대 검서관은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입니다. 당대에 가장 명망 있는 서얼 출신의 이 네 학자를 4검서(四檢書)라고 불렀는데, 특히 유득공은 조선의 문물과 민속을 기록한 <경도잡지(京都雜志)>를 지었으며 대를 이어 검서로 활동했던 그의 아들 유본예는 서울의 문화와 역사, 지리를 설명한 <한경지략(漢京識略)>을 지었습니다.
왕실의 사묘(私廟) 육상궁의 사연
이완용(李完用)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곳은 태화관 터, 명동성당 부근 등이 거론되고 있지만 1913년 이후부터 죽기 전까지 살았던 곳은 ‘옥인동 19번지’ 일대로서 약 3,700여 평의 꽤 넓은 땅을 소유하였습니다. 해방 되자 다른 대부분의 친일파들과 만찬가지로 그 재산은 적산으로 몰수하여 일부는 민간인에게 불하되고 많은 부분이 국유지로 사용하게 되는데, 현재 파출소, 종로구보건소, 한전출장소 그리고 ‘남영동대공분실’과 함께 악명 높았던 ‘옥인동대공분실’이 그 국유지에 줄지어 들어서 있고, 다행히 이완용이 살았던 집도 유럽풍의 양식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선희궁(宣禧宮)은 영조의 후궁이며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의 신주를 봉안한 묘사(廟祠)로, 1764년(영조40) 건립되었으며 원래 영빈이씨의 시호(諡號)를 따서 의열묘(義烈廟)라 하였다가 1788년(정조12)에 선희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후 1870년(고종7)에 위패를 육상궁(毓祥宮)으로 옮겼다가 1896년 선희궁으로 되돌렸는데 그렇게 하게 된 연유는 영친왕이 태중(胎中)에 있을 때 순헌 엄귀비(淳獻嚴貴妃)의 꿈에 영빈이씨가 나타나서 폐(廢)한 사당을 다시 지어주기를 간곡히 부탁했기 대문이랍니다. 엄귀비가 영친왕을 낳고 나서 꿈 이야기를 고종에게 고하여 본래 자리에 사당을 새로 지어서 다시 신주를 받들었다고 하나, 1908년에 신주를 다시 육상궁으로 옮겨 받들었다고 합니다.
육상궁은 왕실의 사묘(私廟)로서 달리 칠궁(七宮)이라고도 부릅니다. 왕실의 사묘란 조선 시대 정실왕비(正室王妃)가 아닌 후궁에게서 태어난 임금이 그의 어머니의 신위(神位)를 모신 곳으로 역대 왕이나 왕으로 추존된 이의 생모인 일곱 후궁의 신위를 모신 곳입니다.
육상궁은 원래 1725년(영조1) 영조가 생모이자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신위를 모시고 숙빈묘(淑嬪廟)라 하다가 뒤에 육상묘(毓祥廟)로 바꾸었으며, 1753년 육상궁(毓祥宮)으로 개칭되었고 1882년(고종19)에 불타 없어진 것을 이듬해 다시 세웠습니다. 1908년 추존된 왕 진종(眞宗)의 생모 정빈 이씨(靖嬪李氏)의 연우궁(延祐宮),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綏嬪朴氏)의 경우궁(景祐宮),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暎嬪李氏)의 선희궁(宣禧宮), 경종의 생모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대빈궁(大嬪宮), 추존된 왕 원종(元宗)의 생모 인빈 김씨(仁嬪金氏)의 저경궁(儲慶宮) 등 5개의 묘당을 이곳으로 옮겨 육궁이라 하다가 1929년 영친왕의 생모 순헌귀비 엄씨(純獻貴妃嚴氏)의 덕안궁(德安宮)도 옮겨와서 칠궁이라 하였습니다.
창의궁(彰義宮)은 영조가 임금이 되기 전에 살았던 잠저(潛邸)입니다. 이곳은 원래 효종의 4녀인 숙휘공주(淑徽公主)의 부마 인평위(寅平尉) 정제현(鄭齊賢)이 살던 집이였으나 숙종이 이를 구입하여 훗날 임금에 오르는 연잉군(延仍君)에게 주었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영조의 세자인 효장세자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영조의 딸인 화순옹주(和順翁主)가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인 김한신(金漢藎)과 결혼하자 이들을 위해 창의궁 옆에 집을 지어 주었는데 부마 월성위(月城尉) 김한신의 집이라고 ‘월성위궁’이라 하였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산행차림(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지리기행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가 있으며, 곧 후속편이 나올 예정입니다. 또 서울 역사인문기행의 강의 내용이 될 <서울 이야기>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번씩, 둘째주 일요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대략 오전 9시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한 후에 1시간 30분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4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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