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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망할 놈의 전문가주의!

[기고] 총선, 다시 전문가가 대안인가?

아주 오랫동안 보건의료 운동은 제도적으로도 그렇고 의학적으로도 매우 전문적이라 전문가 운동의 영역으로 여겨졌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내가 글리벡 약값 인하 싸움을 시작할 당시만 하더라도 이 운동은 전문가인 의사(치과의사, 한의사 포함하여)와 약사 그리고 역시 전문가인 간호사들이 주축인 보건의료 노동조합을 축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나마 글리벡 투쟁 이후 환자들의 움직임이 많아지면서 비전문가인 환자가 이제 전문가들이 노는 영역에 얼굴을 들이민 정도이다.

항상 해왔던 말이지만 의료에서 환자와 의사의 관계가 수평적이지 않고 수직적으로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보통 '정보의 비대칭성'이란 말로 표현한다. 간단히 말하면, 각종 정보가 어느 한쪽에 쏠려 있어 갑과 을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수직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법조계가 그렇고, 교육계가 그러하며, 그중에서 의료계는 그 정도가 가장 심하다. 이런 곳에서는 이상하게도 돈을 지불하는 소비자가 갑이 되는 게 아니라 을이 된다. (돈을 더 많이 내면 낼수록 을이 된다. 의료의 경우 그건 아주 중한 질병이라는 소리일 테니까.)

그래서 이런 정보의 불균형을 그나마 줄이자고 해서 만든 게 '환자에 대한 의료인의 고지 의무'이고 이런저런 것을 통 털어서 이것을 '환자의 알 권리'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환자들이 전문가 수준의 정보를 이해할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사실 턱도 없는 일이다.

"우리는요 당신들이 이야기하고 설명해주는 말도 잘 못 알아듣거든요." "진료비 세부내역서를 떼어도 그게 뭐가 뭔지 모르거든요."

이게 예전이나 지금이나 환자의 모습이 아닌가 말이다.

어느 영역이든 전문가들의 정보와 지식은 그 자체가 밥그릇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와 지식이 보편화된다는 것은 그만큼 전문가로서의 사회적 포지션이 자꾸 약화되어 간다는 의미다. 그래서 전문가 집단은 일반적으로 지식과 정보를 자체 내에서만 유통하고 공유하려고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정보와 지식의 공유를 가급적 허용하지 않는 것이 기본적인 분위기이지만 인터넷의 발달은 자꾸 전문적인 정보와 지식을 보편화시키는 데 환경적 조건을 급격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이전보다는 훨씬 더 정보와 지식의 공유가 확장되었다지만 어떤 분야보다도 의료분야는 오랫동안 전문가 영역을 공고화하여 일반 사람들의 진입이 쉽지 않다.

전문가 집단이 자신들의 시장을 공고히 하고 사회적 포지션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야 다 밥그릇 문제라고 치자. 하지만 시장적 가치를 지양하고 집단적인 삶의 행태를 가치로 하는 사회운동 내의 정보와 지식의 전달 체계는 어떠한가? 한마디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나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본다. 나는 개인적으로 모든 사회운동이 대중운동의 영역으로 확장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 전문가주의의 고착화에 있다고 생각한다. 전문가주의는 모든 사회운동 영역에 포진해 있다. 혹시라도 염려스러워서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전문가를 배척하거나 멀리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님을 먼저 분명히 밝혀 둔다. 누구나 특정 분야의 일에 대해 철학을 기초로 한 전문적인 지식과 능력을 가진 전문가가 되고자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각설하고, 이 전문가의 역할은 전문적인 지식과 정보들을 비전문가인 대중들이 먹고 체하지 않게 씹어서 뱉어내는 일이다. 이유식을 먹이다가 죽을 먹게 하고 점점 일반식을 먹게 하는 것, 다시 말하면 전문적인 정보와 지식을 대중들에게 확산시키고 대중들 스스로가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내는 능력을 갖도록 기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국적으로는 전문가와 대중의 전문적 격차를 줄여나가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대중은 거꾸로 전문가가 되며, 운동은 대중운동이 된다. 이 과정에서 운동의 내용이 훨씬 더 성숙해짐은 말할 필요도 없다. 조직의 수준도 그 조직을 이루고 있는 개개인도 모두 발전한다. 리더는 이 과정에서 신뢰와 실천이 확인된 전문가 중의 어떤 사람 또는 전문가 수준으로 성장한 실천적인 대중 속의 어떤 사람이 될 것이다.

문제는 전문가의 이러한 사회적 역할-정보와 지식을 씹고 뱉어주는-이 잘 안 보인다는 것에 있다. 이런 역할이 부재한 상태에서 대개의 경우 전문가 집단은 오히려 시장 내에서의 전문가 집단과 마찬가지로 실천력과 철학이 검증되지 않은 채로 자신들의 정보와 지식을 도구로 대중들의 앞에 서게 된다. 이 결과로 시장 내의 관계처럼 전문가와 일반 대중들의 관계는 알게 모르게 수직화 되고, 많은 경우 운동의 헤게모니는 오랜 세월 전문가 집단이 독식하다시피 하게 되었다. 이렇게 전문가주의 내지 전문가가 운동의 전 흐름에 가장 광범위하게 포진되어 있는 곳이 보건의료운동이다. 뭐 다른 운동 분야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렇게 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미 위에 이야기한 바와 같이 전문가들의 자기 존재와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전문가들의 대중운동에 대한 이해가 척박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특정한 이슈와 계기를 통해서 대중이 전진하더라도 대중들은 많은 경우 특정 전문가들의 사회적 지위와 운동의 헤게모니를 공고히 해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 속에서 대중운동의 리더가 되기는 매우 어렵다. 대부분의 대중들이 인식도 잘하지 못하는 성장 진입장벽을 곳곳에 포진한 전문가들이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전부터 보건의료 내의 전문가들을 향해 허구한 날 정책만 연구하지 말고 운동 주체에 대한 연구도 좀 하시라고 했었는데, 이게 잘 안 되는 이유가 위의 두 가지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스갯소리로 정치를 가장 잘하려면 모든 정치학 박사와 교수들을 데려다가 정치를 시키면 되겠지만 현실에서 그렇게 했다가는 나라 말아먹기 십상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실은 전문가들이 각각의 분야에서 자신들의 위치와 역할을 공고히 해놓았다. 이 사람들이 대부분 다시 정치판으로 진입했고 그래서 정치판 역시 대중운동 속에서 걸러지지 못한 의심스러운 전문가들로 가득하다. 이러다보니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전문가들이 당연히 모든 집단의 꼭대기에 위치하는 것을 당연시 하게 되었고, 게다가 우리 애들에게도 전문가가 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게 일반적이다. 이렇듯 우리 안의 전문가주의는 자본주의 시장의 논리만큼이나 사상적으로 뿌리가 깊다.

모든 운동은 대중운동이며 전문가 운동이란 없다. 단지 전문적인 지식과 전문가들의 사회적 역할이 존재할 뿐이다. 정말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가? 혹시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정작 전문가로부터 권력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 그러면 사회에서 소위 한가닥 한다는 당신의 머릿속부터 먼저 뒤집어버려야 할 것이다. 우리 안의 이 망할 놈의 전문가주의를 극복해야 세상이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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